무관계와 관계: 무소유의 극치 [주말을 여는 시]

하린 시인 2024. 4. 27.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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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린의 ‘특별한 감정이 시가 되어’
이병일 시인의 ‘호접몽’
생명 사상으로 가득 찬 시
꽃과 나비의 경계 없음
무형의 교감이 만드는 일체

호접몽​

1
꽃의 여백은 죽은 나비들에 대한 추억으로 채워져 있고 죽은 나비들은 모두가 책이 되었다, 누가 그걸 펼쳐 읽을 것인가 늙은 개의 콧잔등에 앉은 저 산제비나비의 표정은 알 수가 없다 두려움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나비는 천천히 춤을 풀었다 그 안에는 신비하게도 파랑이 숨어 있다

2
향기의 침묵沈默은 언제나 이리저리 나를 끌고 다녔다 날개는 너무나 약해 바람을 잡을 수 없고, 꽃의 심지에 붙은 불을 끌 수도 없다 오늘도 부드러운 꽃의 음자리를 배열해주는 나비는 하나의 악기가 되었다 발끝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났다 나비의 감각들은 꽃의 악보들을 더듬더듬 찾는 것이다 그렇다, 꽃에게도 나비란 악기가 하나 있어 봄가을이 가볍게 튕겨지는 것이다

3
그해 여름이 오기 전, 어떤 나비도 꽃의 빛깔은 바꾸지 못했다 꽃들은 못생긴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렇게 나는 날개를 물끄러미 세워뒀으니 살아온 날들은 신기하게도 호접몽이 되었다 사람들은 시간을 빌리러 그곳으로 갈 것이다 그러나 늙은 개는 하늘을 접었다가 폈다 장난을 치는 산제비나비의 춤 따위엔 관심이 없다 나는 낯선 책갈피처럼 부서졌으니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 갈 것이다 나는 장님처럼 한때 내 날개의 세상에게 찾지 말라고 편지를 썼다 그리고 곧 무너져 내릴 호접몽 속에서 나는 해와 달을 깎다가 잠든 공명空冥이 되었다

이병일
· 2005년 평화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데뷔
· 2007 문학수첩 신인상 시부문 수상
· 5·18문학상 등 수상

이병일, 「옆구리의 발견」, 창비, 2012

아무 것도 없는 하늘에서 꽃과 나비가 뿔뿔이 흩어지겠다는 건 무소유의 극치다.[사진=펙셀]

이병일의 첫 시집 「옆구리의 발견」은 향토성의 재발견이다. 젊은 시인이 이토록 향토적인 것에 빠져들어 시적 경향을 띤 건 무척 이채롭다. 이병일에게 향토는 일상이고 생체적인 현상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그것이 전혀 낯설지 않다. 과거 토속풍의 시가 현실도피적 의미의 자연 예찬이나 중심 세계나 자본으로부터 격리·소외된 존재의 한탄이나 비극, 그리고 보편적 근원의식이나 초월적인 자세의 정신주의 등으로 다뤄졌다면, 이병일의 시는 실체적이고 구체적인 향토성을 세련된 화법으로 현대화하고 있다.

대다수 젊은 시인이 관심을 갖지 않는 분야에 관심을 둔 것은 이병일이 마이산 자락에서 뛰어놀며 자란 그의 생래적인 체질 때문일 것이다. 이병일은 그곳에서 가난도 현실도 뛰어넘는 생명성을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그 생명성이 자신 안에서 꿈틀대고 있음을 감지한다. 이병일은 "자연이 정교한 기계장치로 돼있는 생물이라고 믿고, 자연 속에서 생명의 첨예한 촉수를 발견하는 일이 즐겁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병일의 시에 나오는 시적 자아는 내외부적 생명 사상으로 가득 찬 실존의식의 존재태가 된다. 그것을 감각적인 인식을 통해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호접몽'은 꿈속에서 나비가 돼 날던 장자가 꿈에서 깨어나 자신이 나비인지 사람이지 모를 상태를 경험하고, 무엇이 현실이고 환상인지 구분이 안 되는 물아일체의 지점을 상징적인 말로 표현한 것이다.

시 '호접몽'에서는 사람과 나비의 경계 없음이 아니라, 꽃과 나비의 경계 없음을 이야기한다. 분명 꽃과 나비는 각자만의 방식으로 이질성을 띤 채 살아가는 존재다. "그해 여름이 오기 전, 어떤 나비도 꽃의 빛깔은 바꾸지 못했다"처럼 나비는 꽃의 일에 전혀 관여할 수 없다.

[사진 | 게티이미지뱅크]

하지만 나비는 "부드러운 꽃의 음자리를 배열해주고 하나의 악기가 되어 꽃의 악보들을 더듬더듬 찾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둘은 실체적으로는 일체가 될 수 없지만 무형의 교감으로 일체가 되고 움직일 수 없는 꽃을 움직이는 꽃으로 만드는 상상적 조응을 보여준다.

이병일의 인식은 꽃과 나비의 그런 관계성에만 머물지 않는다. 더 나아가 화자의 삶에 깃든 '호접몽'도 이야기한다. 화자는 "살아온 날들"이 "신기하게도 호접몽이 됨"을 느끼고, "곧 무너져 내릴 호접몽 속에서" "해와 달을 깎다가 잠든 공명空冥이 될 것"임을 예지한다.

이것은 놀라운 발견이다. 유대성이 없는 꽃ㆍ나비가 타 대상과 하나가 돼 '호접몽'이 되는 것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호접몽'을 뛰어넘어 '아무것도 없는 하늘(공명空冥)' 속에서 "뿔뿔이 흩어지겠다"고 한 것은 무소유의 극치에 해당한다.

하린 시인 | 더스쿠프
poeth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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