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와 벚꽃 그리고 유채…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도 함께 [ESC]

한겨레 2024. 4. 27. 07:0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남희의 걷다 보면 경주·제주
황리단길 벗어나 남산 정착 지인
칠불암·신선암 오르며 봄날 즐겨
제주엔 현직 화가와 전직 경찰
서로 도우며 세상 넓어지는 경험
올해 4월 제주 서귀포시 녹산로에 핀 벚꽃과 유채꽃.

섬세하다기보다는 거칠고 투박한 쪽에 가깝다. 세련됨과는 거리가 먼 대신 소박하고 정겹다. 지나가던 도공이 잠시 다리 품을 팔려고 앉았다가 심심한 마음에 끌이며 정을 꺼내 깎아나갔던 걸까. 바위를 깎는 동안 도공이 떠올린 얼굴은 늙은 어미였을까. 아니, 아이를 낳고 아직 부기도 빠지지 않은 아내의 얼굴이었는지도 모른다. 부처라기보다는 동네 어귀에서 마주칠 법한 여인을 닮았다. 불곡 마애여래좌상. 이 동네 사람들은 ‘감실 아지매’ 혹은 ‘감실 할매 부처’라고 부른다. 화강암에 감실을 파서 부조로 앉힌 불상은 그저 편안한 얼굴이다. 재지도 따지지도 않는, 넉넉한 미소다. 이 불상이 경북 경주 남산의 불상들 중에서 유독 내 마음을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감실 아지매의 미소가 내가 아는 이와 꼭 닮아서일 것이다. 그가 꾸리는 방 한 칸짜리 숙소의 이름이자 봄에 피는 꽃 히어리를 닮은 그를 나는 ‘히어리 언니’라 부른다. 자매가 없는 내게 그는 남쪽 도시로 시집간 친정 언니 같은 사람이다.

경주 남산 불곡마애여래좌상. 이 동네 사람들은 ‘감실 할매 부처’라고 부른다.

벚꽃 없어도 경주는 완성형

아직은 바람이 매서운 지난달 말, 나는 남산 자락에 단정히 자리한 그의 집 부엌에 앉아있었다. 참나무 장작이 탁탁 터지는 소리와 함께 구수한 나무 냄새가 공기 중으로 번지고 있었다. 유리창 밖 막 새순을 낸 단풍나무 가지에는 빗방울이 구슬처럼 매달려 있었다. 내리는 봄비 덕분에 기압이 낮아 굴뚝의 연기가 마당을 낮게 돌며 빠져나가는 아침. 처마 아래에는 이 집에 둥지를 튼 길고양이 가지와 까불이가 졸고 있었다. 언니가 육수를 내 끓여준 떡국으로 아침을 든든히 먹고 난 후였다. 경주에 내려온 지 사흘째. 벚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지만, 벚꽃이 없어도 경주는 이미 완성형. 담 너머 바깥의 경주도 물론 아름답지만, 안채와 사랑채를 더해도 서른 평을 넘지 않는 이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은 충만하다. 이곳에 있으면 굳이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부족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 집은 두 사람의 성품을 닮았다. 화려하거나 세련된 공간은 아니지만 소박한 품격이 있는 집이다. 이곳에는 부지런한 부부의 손길이 구석구석 빠짐없이 닿아 있다. 언니 부부는 세상의 번잡함을 피해 ‘황리단길’로 한창 뜨던 동네를 떠나 남산 자락 아래로 이사했다. 삼림연구원 근처의 한적한 동네에 직접 설계한 집을 짓는 일은 코비드 시기라 쉽지 않았다. 예상보다 오랜 시간과 돈을 들여야 했다. 안채와 사랑채가 마주 보고 서 있는 한옥을 두른 낮은 담장 너머로는 너른 들판과 남산이 눈에 들어온다. 작은 부엌 옆 공간에는 나지막한 테이블과 의자, 무쇠 난로가 놓여 있다. 이곳에 있는 많은 것이 손으로 만든 것들이다. 언니의 퀼트 작품을 재활용해 만든 커튼, 대나무를 자르고 구리 줄을 엮어 만든 수저통, 짙은 색을 입힌 선반…. 모두 언니와 아저씨가 손수 만들었다. 지치는 일도 없이, 질리는 일도 없이 살림을 살아온 한 사람의 생이 담긴 공간이어서 이런 평온함을 주는 걸까. 이름난 가구나 비싼 가전 하나 없이, 그윽하게 아름답다. 아, 집은 이런 곳이어야 하지. 그런 기분이 들게 하는 곳이다.

경주 남산 자락에 있는 ‘히어리 언니’의 집.

감실 할매 부처가 어떤 마음으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듯이 언니의 삶이 어떻게 여기까지 다다랐는지도 나는 알 수 없다. 내가 아는 건 단단하고 흔들림 없는 일상의 힘이 여기에 가득하다는 것. 텃밭을 일구고, 길고양이들의 끼니를 챙겨주기. 찾아오는 손님을 정성껏 대접하며 마음을 나누기. 그렇게 하룻밤 인연도 소중히 붙들어 오래도록 관계를 이어가는 사람이 히어리 언니다. 언니는 1년에 서너번씩 전화를 걸어온다. “남희씨. 보고싶데이. 언제 내려올란가.” 그러면 나는 못 이기는 척 내려와 언니의 친절과 다정함에 기대곤 한다.

히어리 언니의 모습.

푸른 눈 스님의 ‘템플스테이 영업’

넉 달 만에 다시 찾은 경주에서 새롭게 한 일은 칠불암에 오른 일이다. 언니네 집에서부터 걷기 시작해 칠불암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히어리 언니도 20년 만이라고 했다. 날은 따뜻했고, 숲에는 진달래가 한창이었다. 소나무 사이로 희끗희끗한 분홍색이 봄 햇살에 반짝거렸다. 전날 비가 내린 덕분에 계곡의 물소리가 시원했다. 마지막에는 제법 가파른 길을 올라 칠불암에 다다랐다. 암자에는 푸른 눈의 비구니 스님이 앉아 계셨다. “차 한 잔 드시고 가세요!” 눈이 마주치자 활짝 웃으며 시원한 목소리로 우리를 불렀다. 체코에서 온 휴정 스님은 숭산 스님의 책을 읽고 출가를 결심했단다. 4년간 경북 청도 운문사에서 공부하고, 경주에 온 지는 어느새 10년이 넘었다. 경주를 “우리 동네”라 부르는 말투가 정겨웠다. 산 아래 절에서 스님들이 돌아가며 올라와 며칠씩 머무르며 암자 관리를 한다고 했다. 스님이 내어주신 차를 몇 잔이나 마시고서야 일어섰다. “다음에 오면 여기 칠불암에서 주무세요. 수십 명도 잘 수 있어요.” 휴정 스님은 템플 스테이 영업도 확실히 하셨다.

경주 남산의 칠불암.

칠불암의 마애불상군은 볼수록 근사했다. 특이하게도 앞의 바위 사면에 부처님이 조각되어 있고, 뒤의 바위에 세 불상이 나란히 있다. 칠불암에서 건너다보이는 산줄기가 시원했다. 휴정 스님이 꼭 올라가 보라고 권한 신선암을 향해 다시 바위길을 10여분쯤 올랐다. 신선암은 절벽 끝에 자리하고 있었다. 천지 만물을 굽어보기 좋은 위치에 마애보살 반가상이 있었다. 남산은 높은 산은 아니지만 골짜기가 길고 깊다. 어떤 골짜기에서 어떤 불상과 마주칠지 알 수 없어 걷는 일이 즐겁다. 첨성대와 계림, 반월성, 동궁과 월지, 대릉원…. 수많은 유적을 지닌 경주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봉황대와 진평왕릉이다. 두 능 모두 우아한 느티나무들을 품고 있다. 봉황대는 드물게도 능 위에 느티나무 일곱 그루가 자리를 잡았고, 진평왕릉은 능 주변에 우람한 느티나무 세 그루가 있다. 봉황대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거나 진평왕릉의 발치에 누워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 근심이 다 사라지는 것 같다. 언니와 함께 산책을 할 때면 종종 언니에게 묻는다. “언니, 이 능은 누구 능이에요?” “모른데이.” 잠시 후에 또 묻는다. “그럼 이 능은요?” “알 수 없제.” 좋은 것들은 다 이렇게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걸까.

☞한겨레S 뉴스레터 구독하기. 검색창에 ‘한겨레 뉴스레터’를 쳐보세요.

☞한겨레신문 정기구독. 검색창에 ‘한겨레 하니누리’를 쳐보세요.

유채꽃 위로 연분홍 벚꽃이 만개

사흘을 경주에서 보낸 후 바로 제주로 날아갔다. 제주는 내 마음의 산소호흡기 같은 곳이다. 제주공항의 출국장 문을 열고 나와 야자나무가 보이는 순간, 먼 이국에라도 온 듯 가슴이 뛴다. 한반도 유일의 아열대 섬 제주의 풍경은 시작부터 다르다. 겨울에도 성성한 초목, 낮고 부드러운 오름과 멀리 보이는 푸른 바다, 머리를 풀고 누운 할매 같은 한라산. 정말이지 제주가 없었다면 한반도는 좀 쓸쓸했을 것이다. 서울에서는 자라지 않는 나무들 옆으로, 사이로, 뒤로, 검은 현무암으로 쌓은 나지막한 돌담이 보인다. 돌담의 높이가 조금만 더 높았어도 이 풍경이 주는 느낌은 달라졌을 것이다. 적당히 감추고 적당히 드러내어 자연과, 이웃과 더불어 사는 풍경이 주는 안도감과 편안함. 제주의 돌담이야말로 세계문화유산 감이라고 나는 믿는다.

공항에서 애월로 향했다. 유수암에서 목수로 일하는 양선 언니의 집이다. 컴퓨터 엔지니어로 일하던 부부가 차례로 직장을 그만두고 목공 학교에 들어가 3년씩 공부한 후 제주로 내려온 지도 어느새 10년이 넘었다. 언니는 한창의 나이에 몸이 아파오자 삶을 바꾸라는 신호로 알아듣고 회사를 그만뒀다고 했다. 목수로서의 경력이나 연고도 없이 제주에 내려왔으니 얼마나 막막했을까. 지금은 아들까지 목수의 삶을 선택해 세 사람이 가구를 만들고 있다.

제주는 벚꽃이 한창 피어나고 있었다. 서울에서 하던 일을 접고 제주에 둥지를 튼 현정과 함께 한라산 둘레길을 걸었다. 곶자왈과 삼나무 숲이 번갈아 이어지는 길은 편안하고 고즈넉했다. 벚나무가 늘어선 길에서는 젊은 청년이 벚꽃 나무 아래서 혼자 흥취에 젖고 있었다. 이 계절이면 자주 들리는 ‘벚꽃 엔딩’을 틀어놓은 채 춤을 추듯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가끔씩 신음소리 같은 감탄사가 들려왔다. 그 모습이 좀 민망해 시선을 돌리니 이번에는 젊은 연인이 카메라를 세워놓고 양손을 마주 잡고 어린아이들처럼 뛰고 있었다. 벚꽃에는 사람을 흥분시키는 무언가가 있는 게 틀림없다.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에 있는 윤정원 작가의 아틀리에에서 지인 윤주씨가 작품을 둘러보고 있다.

며칠 후에는 서울에서 지인 윤주씨가 내려왔다. 그와 함께 녹산로의 벚꽃을 보기 위해 이른 아침에 길을 나섰다. 활짝 핀 노란 유채꽃 위로 연분홍 벚꽃이 만개해 비현실적인 공간이 몇㎞에 걸쳐 이어지고 있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동쪽 바닷가로 건너가 보기로 했다. 하도리에는 내가 좋아하는 현직 화가인 윤 작가와 전직 경찰인 박 반장이 살고 있다. 윤 작가는 박 반장의 집에 한달살이를 왔다가 1년을 넘게 살았고, 마침내 바로 옆에 땅을 구해 아틀리에와 집을 지었다. 박 반장은 그사이 책을 내어 글 쓰는 이가 되었고, 윤 작가의 매니저까지 겸하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이 고요한 동쪽 바닷가는 팍팍한 삶에 지친 이들이 마음의 안식을 얻으러 다녀가는 공간이 되었다. 세상사에 무관심하고 화폭의 세계에만 머물던 윤 작가는 매니저 박 반장 덕분에 수많은 일을 벌이게 되고, 자신의 아틀리에로 찾아오는 이들을 묵묵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오롯이 붓질만 하며 살아온 그녀의 삶이 이제는 다른 이들을 위로하는 그림으로 피어났다. 한눈파는 일도 없이 자신의 세계를 지켜온 어른 두 사람이 쉰을 넘긴 나이에 만나 서로로 인해 세상이 넓어지는 경험을 하며 살고있다. 얼마나 멋진 인생인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들이 각자 헤쳐왔을 거친 세월을 상상해 본다. 그림을 사주는 이도, 알아주는 이도 없이 혼자서 묵묵히 캔버스를 마주하고 보낸 수십년의 세월. 한국 최초의 여성 강력반 반장이라는 타이틀의 무게를 어깨에 맨 채 매일 강력범들과 보낸 30년의 시간. 스스로를 믿고, 자신이 하는 일을 믿으며 걸어오는 동안 그들도 두렵고, 쓸쓸한 밤을 오래도록 견뎌야 했을 것이다. 그 밤들을 건너왔기에 오늘의 두 사람은 말이 없이도 나와 윤주씨를 위로해준다. 우리는 반장님의 서재에서 그가 내려주는 커피를 마시며 근황을 나눴다. 그들의 단골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고, 동네도 한 바퀴 돌고 난 후, 다음엔 서울에서 만나자 인사하고 돌아섰다.

내가 경주와 제주를 유독 사랑하는 이유는 그곳에 내가 닮고 싶고, 살고 싶은 미래의 삶이 있어서일 것이다. 경주에 히어리 언니가 있듯이 제주에는 양선 언니와 윤정원 작가와 박미옥 반장님 같은 분들이 있다. 경주를 닮고, 제주를 닮은 사람들이 꾸려가는 이 정착민의 삶에 나도 다다르고 싶다. 아직은 때가 아닌지 서울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내 손가락은 벌써 다음 여행지의 항공권을 검색하고 있다.

글·사진 김남희 여행가

여행가 김남희는 2003년 이후 유목민의 삶을 살아오고 있다. 언젠가는 앉아서 유목하는 경지에 오르기를 바라면서, 지은 책으로는 ‘길 위에서 읽는 시’, ‘여행할 땐, 책’, ‘호의는 거절하지 않습니다’ 등이 있다.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