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이 죽고, 전경은 일기를 썼다 “진정한 분노의 대상 알아야”

조일준 기자 2024. 4. 27.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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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커버스토리
1991년 봄, 박석진 일경의 일기
“예전 내 동지들에게 최루탄을…
왜 우리가 적이 돼 싸워야 하나
폭력보다 강했던 시위대 비폭력”
마지막 일기 4일 뒤 양심선언
1993년 5월25일, 박석진(당시 24살, 사진 가운데) 일경 등 군·경 양심선언과 관련해 수배된 8명이 서울 종로구 기독교회관에서 수배 해제를 촉구하는 단식농성을 벌이던 중 농성장으로 찾아온 가족들과 만나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그해 4월은 잔인한 달이었다. 1991년 봄이었다. 12·12 군사반란의 핵심 주역들이 포진한 노태우 정권은 임기 4년차인 1991년 들어 대학가와 노동계의 민주주의 요구를 거칠게 탄압하며 신공안 정국을 조성했다. 박석진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 상임활동가의 삶의 향방도 이때 결정됐다. 박씨는 당시 대학을 휴학하고 서울경찰청 제1기동대 소속 전투경찰로 병역을 수행하고 있었다.

4월26일 명지대 강경대 학생이 전경의 무차별 폭력으로 목숨을 잃자, 박 일경(당시 계급)은 양심선언을 하고 국방부 소속 ‘군인’이 아닌 내무부 소속 ‘전경’으로서의 군 복무를 거부했다. 그 뒤로도 한달 새 11명의 젊음이 분신과 폭력진압으로 스러져갔다. 박석진 활동가는 당시의 괴로운 심경과 결단의 과정을 담은 일기를 한겨레에 처음 공개했다. 그의 일기는 내밀한 개인의 기록을 넘어 당시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공적 기록의 의미가 있어, 일부를 발췌해 소개한다. 괄호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편집자가 붙인 설명이다. (▶관련 기사= 여전히 깊은 군사문화·권위주의…“부당한 명령 거부할 권리 있어야”)

1991년 1월18일(금)

오후에 두 시간 정도 진압 훈련을 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기다릴 때의 긴장감보다 부딪힐 때의 혹독함이 나았다. (…) 많은 사고가 나를 혼란시키고 있어서 정확히 정리 내지 정돈할 순 없지만 (…) 다음번 휴가 때 학교 친구들을 만나는 생각을 했다. 정말 건강하고 편한 모습으로.

1월23일(수)

맞교대로 미 대사관 경비를 섰다. (…) 저녁에 회식이 있었다. 요즘엔 회식 때마다 과음하기로 했다. (…) ○○○ 일경과 얘기를 좀 했는데 쪽팔렸다. 모방과 답습의 내 지식이, 아는 체하려는 내 꼴이. 철학 대사전을 사야겠다.

2월7일(목)

거의 살인적인 근무가 떨어졌다. 어제 심야 방찰사오(‘방범 근무’의 군대식 음어)에다가 미 공병단 근무까지, 그곳도 맞교대로. 새벽 2:30에 나가서 5:00까지 또 근무를 섰다.

2월22일(금)

치안본부 진압 검열이 있었다. 요 며칠 새 세번째 검열이다. 그래서 아침부터 진압복에 훈련을 했다. (…) 너무너무 추워서 아무런 사고도 할 수 없었다.

3월2일(토)

파고다(공원, 서울 종로2가)에서 민중당의 수서 지구(택지를 특혜 분양한 권력형 비리) 규탄 대회가 있었다. (…) 피곤함 때문인지 별 감정 없이 서 있다 돌아왔다. 이어지는 독산동 방범 근무. 피로는 우리를 여러모로 모지게(성격이나 태도를 거칠게) 하고 있다.

박석진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 상임활동가가 1991년 4월 서울경찰청 기동대 소속 전경으로 시위 진압에 동원되던 시절에 쓴 일기장 겉표지. 박석진 제공

3월11일(월)

08:00시부터 종로에서 가투 대비가 있다고 해서 파고다에 갔다. 그럭저럭 하루를 보내는가 싶었는데, 10시경에 사해(집회가 해산)되어서 장막(소속 기동대)으로 하나열(복귀 집합)했다. 특수진압술 시범 대비 훈련 때문이었다.

3월14일(목)

틈만 나면 자야겠다는 일념으로 불타는 내 의지와 관계없이 정오경에 상황이 있었다. 한진해운 노조의 집회였다. 무더기 연계(체포 연행)가 있었다. 격렬한 몸싸움이 있었고, 아직은 남아 있는 감정이(…) 단결투쟁가, 동지가, 노동가를 들으면서 되살아나는 용트림을 느꼈다.

3월27일(수)

시드니 셸던의 ‘내일이 오면’을 다 읽었다. 외박 나가면 (서점의) 외국서적센터에 가서 영문판 소설을 샀으면 싶다. ‘White Badge’(안정효 작가의 장편소설 ‘하얀 전쟁’의 영문판)도 함께. 영어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이 스쳤다.

4월3일(수)

동국대 상황 대비. 꽤 힘든 하루였다. 오래간만에 상황다운 상황을 맞은 것 같다. 많은 FB(화염병)와 돌을 맞았다. (전경의) 돌격이 많아서 위기도 많았고. 물론 동국대학생들에게. 나는 또 한번 동료(전경)들과의 이질감.

4월10일(수)

연세대에서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사수대 발대식이 있었다. 작년 건국대에서처럼 우리 소대가 또 기습을 받았다. 다른 동료들과 같은 분노를 느끼지 못하는 나는 어떤 표정도 지을 수 없었다. 당위성과 정당성이 똑같이 고개를 들었고(…) 정말 지루한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박석진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 상임활동가가 1991년 4월 서울경찰청 기동대 소속 전경으로 시위 진압에 동원되던 시절에 쓴 일기. 박석진 제공

4월16일(화)

오늘 난 무슨 생각을 하면서 그 무수한 돌과 화염병과 그들의 욕설을 받아냈던가? (…) 예전의 내 동지에게 돌을 던지고 방패로 찍고 깨스(최루탄)를 퍼부어대는 이들은 또한 어떻게 내 동료인가? 왜 우리가, 우리 젊은이들이 싸워야 하는가? 얼마 전까지 같이 술 마시고 노래하고 같이 아파했던 이들이 어떻게 완전히 적이 되었는가? 누가 이런 대본을 썼는가? ―경희대 학내 진입 상황에서―

4월19일(금)

차라리 그것은 시위 진압이라기보다 ‘쥐새끼 소탕 작전’에 가까웠다. 우린 보이는 대로 봉으로 때리고 발로 차고 방패로 찍어서 개 끌듯이 끌고 다녔다. 폭력이라는 마약에 취해버린 그들은 미친 광기를 내보이며 온 거리를 헤집고 다녔다. 이미 힘의 우위를 느낀 그들은 거칠 것이 없었다. 그건 이미 악마적 유희였으며, 어디에서도 인간은 볼 수 없었다. (…) 아침 동이 트는 이 순간에도 우린 죽어가고 있다. 아니면 이미 죽어버린 삶을 살고 있거나.

(그로부터 일주일 뒤, 기어이 사건이 터졌다. 명지대 재학생 강경대씨가 전투경찰의 무차별 폭력 진압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강경대 사망 사건은, 앞으로 닥쳐올 참혹한 시대적 비극의 시작일 뿐이었다. 사흘 뒤인 4월 29일 전남대 학생 박승희의 분신을 시작으로, 5월까지 한 달 동안에만 11명의 젊은이가 강경대 타살에 항의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며 자신을 불살라 스러졌거나 폭력적인 시위 진압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관련기사= 강경대에서 김귀정까지…기억해야 할 이름들)

4월26일(금)

또 하나의 젊음이 꺼져 갔다.(명지대 강경대 사망) 채 시작되지도 못한 젊음이 이 시대에 의해 꺾여갔다. 누구를 탓할 것인가? 쇠파이프를 휘둘러 죽인 전경을 욕하고 벌하면 되는가? 아니면 극렬 시위를 했기 때문에 죽어 마땅하다고 해야 옳은가? 누가, 무엇이 이 시대의 젊은이들을 이렇게 처참하게 만들었는가? 전경의 분노 대상은 온전히 학생이고, 학생의 분노 대상은 온전히 전경인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우리는 이 부정한 시대에 정의를 수호하는 젊은이여야 한다. 우리의 진정한 분노의 대상을 알아야 한다.

1991년 4월 27일, 서울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강경대 학우 살인 규탄 대회’를 마치고 교문을 나선 학생들이 경찰의 물대포 세례를 맞으며 “살인정권 타도”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4월27일(토)

명지대에 갔다가 연세대로 향했다. 온 신촌 바닥을 메우고도 남을 개스탄이 쏟아졌고, 소대 전방에서 water cannon(물대포)의 물이 퍼부어졌다. 그에 맞서는 그들(시위대)의 비폭력은 폭력보다 더 무서운 것이었다. 방독면 속에 숨어서 나는 계속 달려가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이제 결정할 때가 아닌가? (…) 지난 10개월 동안 난 버텨왔다. 이 조직에 맞는 인간이 되려고도 했었고, 그저 냉소적이 되려고도 했었다. 그러나 그것이 옳지 않다는 걸 알았다. (…) 결심만 선다면, 결심만 선다면…, 난 뛸 것이다.

4월29일(월)

광화문 네거리. 시야가 제한된 방독면 속에서 난 앞사람의 워커(군화)만 보고 달렸다. 호흡 곤란으로 미칠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면서 난 떠밀렸다.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파탄을 일으키며 난 이미 내가 아니었다. 눈앞에서 터지는 사과탄과 SY-44탄에 학생들의 비폭(력 저항)은 여지없이 무너져버렸다. “애국 전경 동참하라”는 그들의 외침도 아련히 멀어져 갔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gas(최루탄 연기) 속에서 나는 지옥을 연상했다. (…) 부정의한 시대는 자신의 힘을 이기지 못해 미쳐가고 있었다. 왜 이리도 우리는 이렇게 황폐한 세상을 만들어버렸는가? (…) 달리고 싶다. 함께하고 싶다. 함께 외치고 싶다. 함께 호소하고 싶다.

4월30일(화)

이제 실천할 때이다. 모든 관념적 사고는 끝났다. 이제 행동만이 남았다. 더 이상 내 인생을 빼앗길 수 없다. 뛰리라. 마침내 난 외치리라.

박석진 일경의 1991년 봄 일기는 4월30일을 마지막으로 끝났다. 그리고 나흘 뒤인 5월4일, 박 일경은 전경복 차림으로 부대를 등지고 연세대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양심선언의 일부 대목은 이렇다.

“얼마 전까지 같이 진압복을 입고 방독면을 쓰고 고생했던 전경 동료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진정으로 학생들이 우리의 적일까요? 정말 학생들이 던지는 화염병과 돌 때문에 우리가 다치고 고생하는 것일까요? 왜 우리가 돌과 화염병을 막아야 합니까? 우린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에 왔습니다. 더 이상 국민과 학생들을 상대로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싸울 수 없습니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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