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복동생과 불륜으로 아기까지 낳았다”···한 문인의 이중적 사생활 [사색(史色)]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 2024. 4. 27. 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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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66]“이슬처럼 떨어지는 작은 잉크 한 방울이 수백만명을 사색으로 이끈다.”

‘문장의 힘’을 이토록 절묘하게 포착한 문인이 또 있을까요. 미문으로 가득한 작품으로 18세기 잉글랜드 최고의 스타로 떠오른 조지 고든 바이런 경입니다. 천재적인 문학 소양이 있던 데다가, 얼굴 또한 미남 중 미남. 이성으로부터 인기 폭발이었지요.

젊은 바이런. 그는 수려한 외모로도 유명했다.
탁월한 문재(文才)만큼이나, 문제적 인물이었습니다. 여자를 지나치게 좋아한 나머지 사달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조국 잉글랜드를 자의 반 타의 반 떠나야 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습니다.

풍운아가 향한 곳은 독립전쟁 중인 그리스. 무슬림의 맹주 오스만 투르크와 힘겨운 전쟁을 벌인 그리스에 힘을 보태기 위해서였습니다.

천재적 문장가로 사람들을 울리고, 유부녀를 포함해 뭇 여성들과 성관계로 물의를 일으켰으며, 타국의 자유를 위해 총을 들다 산화한 인물. 오늘날 도덕적 잣대로 설명이 안되는 바이런 경 이야기를 전합니다. 지난 4월 19일이 그가 죽은 지 정확히 200년이 되던 날이었습니다.

조지 고든 바이런 경. 1813년 초상화.
난봉꾼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바이런
“유부녀 킬러 ‘매드 잭’”

바이런의 집안은 유구한 역사를 가진 귀족이었습니다. 1066년 정복왕 윌리엄과 함께 잉글랜드로 건너온 유서 깊은 가문이었지요.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수많은 하인을 거느리며 살았을 것처럼 보이지만, 바이런의 집안은 이런 귀족들의 삶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집안 남자들이 하나같이 ‘사고뭉치’였기 때문이지요.

바이런의 아버지 존은 ‘미친 잭’이라고 불릴 정도로 사고뭉치였다.
그의 아버지 존 바이런부터가 그렇습니다. 그의 별명은 ‘매드 잭’. 워낙 미친 짓을 많이 하고 다녔기에 붙은 별명이었습니다. 군에 복무했던 존은 귀족 아멜리아 오스본과 사랑에 빠집니다. 아멜리아는 엄연히 남편이 있는 몸이었지요.

존은 개의치 않고 열렬히 구애하다가, 1778년 사랑의 도주에 성공합니다. 두 사람은 아이 셋을 낳았지만, 존은 아내를 거칠게 대하는 파렴치한이었습니다. 손찌검했고, 돈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기도 했었지요. 셋째 아이를 낳은 이듬해, 그녀가 숨을 거둡니다.

돈 많은 여자 찾아 나선 매드 잭
풍운아 존은 여자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도박, 술, 여자를 즐기기 위해 돈 많은 귀족집 자제만 찾아 나섰지요. 스코틀랜드의 명문가의 자녀 ‘캐서린 고든’을 그때 만났습니다.

외모가 수려하지 않지만 돈은 많았습니다. 존이 찾던 꿈의 이상형. 두 사람은 이내 결혼했습니다. 아이 하나를 낳았지요. ‘조지 고든 바이런’이었습니다. 아내 집안의 더 많은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아이의 이름에 이례적으로 ‘처가의 성’을 사용했습니다.

바이런의 엄마 캐서린. 돈 많은 집안의 자제였던 그녀는 ‘매드 잭’에게 사기를 당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존은 자기가 꿈 꾼 삶을 살아갑니다. 도박을 한 뒤, 술을 마시고, 매춘을 하며, 여행을 하는 삶. 하나님이 캐서린을 보우하셨는지. 남편 존이 프랑스에서 객사합니다(결핵설과 자살설이 공존합니다). 아들 바이런의 나이 고작 4살이었습니다.
거친 어머니 밑에서 장애를 지고 살아간 바이런
“이 절름발이 꼬맹아”

바이런은 어렸을 때부터 외로웠습니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데다가, 그에겐 신체장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른쪽 다리뼈가 안쪽으로 휜 안짱다리였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캐서린은 화가 날 때면 아들의 장애를 노골적으로 비하하기도 했었지요. ‘절름발이 꼬맹이’(a lame brat)는 그의 어머니가 그를 부르는 또 다른 호칭이었습니다. 바이런의 내면에 고독과 우울, 소외가 스며든 배경입니다.

10대 후반의 바이런. 그는 장애로 인해 약간의 우울함을 가지고 있는 소년이었다.
그가 처음 발을 디딘 사회는 ‘폭력’이라는 가면을 쓰고 그를 맞이합니다. 초등학교에서 급우들은 그의 안짱다리를 보며 비웃곤 했습니다. “제대로 걸어보라”는 모멸 섞인 말도 수시로 오갔지요.

어린이는 너무 순진해서 때론 어른보다 잔인합니다. 바이런이 만난 어린 친구들 모두가 그랬습니다. 그가 성치 않은 몸으로 수영, 크리켓 등 체육활동을 누구보다 열심히 한 배경도 여기에 있었지요. 멀쩡한 다리를 가진 녀석들을 이겨보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바이런이 어렸을 때 살던 노팅햄셰어의 사우스웰 인근 자택. 귀족집안이었음에도 풍요롭지 않은 삶을 보여준다. [사진 출처=roger geach]
그리스로 ‘그랜드 투어’를 떠난 바이런
“아름다운 그리스여! 사라진 가치의 슬픈 유적이여.”

21살이 됐을 무렵, 1809년 바이런은 여행을 떠납니다(귀족은 원래 일하지 않는 법입니다). ‘그랜드 투어’였습니다. 유럽의 주요 도시를 돌면서 세상에 대한 인식을 확장하는 그랜드 투어가 귀족사회에서 유행했기 때문입니다.

떠나야겠어, 여행을. 유럽을 만든 그리스로. 바이런 경 초상화.
바이런의 목적지는 ‘그리스’였습니다. 그가 케임브리지에 다닐 때부터 바라고 바라던 이상향이었습니다. 폼페이의 유적이 새롭게 발견되면서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에 대한 지식인 사회의 관심이 폭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의 모든 걸 배우고 모방하는 흐름이 생겨납니다. ‘신고전주의’(Neoclassicism)의 탄생이었지요.

아테네의 고대 유적지를 탐방하고, 자연을 즐기면서 그는 자신이 ‘고대 그리스인’이 되었다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스파르타의 유로타스 강에서 직접 수영하면서 스파르타 전사처럼 행동하기도 했었지요. 바이런 경에게 그리스 아테네로의 투어는 단순한 여행 이상의 의미가 있었던 것이지요.

바이런이 그랜드 투어를 떠났던 알바니아에 그를 기념하는 표지판이 남아있다. [사진 출처=Gashi Bujar]
그는 그리스를 두고 이렇게 찬미합니다. “잃어버린 신들과 신의 경지에 오른 인간의 땅(Land of lost gods and godlike men).” 바이런 경은 알바니아, 스페인, 포르투갈을 거쳐 3년의 그랜드 투어를 완성합니다.
귀족 바이런 유럽의 스타가 되다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유명해져 있었다”

문인의 여행은 때론 명작의 마중물이 됩니다. 바이런이 출시한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바이런경이 그랜드투어 때 경험했던 것을 바탕으로 가상의 순례기를 시의 형식으로 쓴 것이지요.

바이런을 인기 스타로 만든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
1812년 3월 3일, 그의 책이 출간되었을 때 사흘 만에 초판이 전부 판매됩니다. 런던의 귀족들은 그의 책에 묘사된 모험담을 읽느라 밤잠을 설쳤을 정도였습니다.

고독하고, 반항적이며, 감정적 고뇌에 수시로 휩싸이는 주인공 해럴드에 모두가 빠져든 것이었지요. 그의 책 출간 이후로 그와 같은 주인공상을 ‘바이로닉 히어로’(바이런적인 영웅)라고 불렀을 정도입니다. 후대 문학가들도 깊이 있는 캐릭터에 영향을 받습니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주인공 히스클리프가 대표적입니다.

바이런적 영웅은 후대 문학가가 구현하는 주인공상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주인공 히스클리프도 마찬가지였다. 영화 ‘폭풍의 언덕’에 출연한 로렌스 올리비에.
사교계의 모임마다 바이런 경은 ‘섭외 1순위’ 스타였습니다. 미문을 쓰는 미남자를 보기 위한 귀족들의 행렬이 이어졌지요. 이때부터였습니다. 그가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걸었던 건.
아버지처럼 유부녀 킬러가 된 바이런
“사랑해요, 바이런.”

1812년 책을 출간한 해였습니다. 인기스타가 된 바이런이 사교 모임에 도착했을 때,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캐롤라인 램 부인. 그녀의 남편은 후에 총리에 오르는 유력 정치인 윌리엄 램이었습니다.

“바이런, 당신을 갖고 싶어. 내가 유부녀라도” 캐롤라인 램은 바이런을 ‘미칠’ 정도로 사랑했다.
부부관계에 어려움을 호소하던 캐롤라인이 바이런에게 빠져든 것이었지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호색의 기질 때문이었을까요. 바이런은 너무 쉽게 캐롤라인과 몸을 섞습니다.

비극은 사랑의 끓는 점이 다른 데서 시작됩니다. 미지근한 바이런과 뜨거운 캐롤라인. 바이런이 그녀를 만나기 거부했을 때, 그녀가 사교모임에서 공개적인 자살 시도를 했을 정도였습니다. 런던 사교계는 수군거렸지요. “캐롤라인 부인이 불륜 행위를 하다가 미쳐버렸군.”

“바이런, 당신이 없다면 이 생에 미련이 없어” 캐롤라인 램.
잇단 성 추문의 중심에 선 바이런
큰 스캔들에도 바이런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유부녀, 처녀를 가리지 않고 숱한 염문을 뿌렸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마침내 운명의 상대가 나타납니다. 어거스타 마리아 리였습니다.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아요?”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바이런을 닮아 있었습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어거스타의 아버지가 ‘매드 잭’, 존 바이런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두 사람은 이복남매. 존이 첫 번째 결혼에서 낳았던 딸, 어거스타가 유부녀가 된 모습으로 이복동생인 바이런 앞에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동생 아니 바이런 경, 당신 참 매력적이네요” 바이런의 이복누나 어거스타 리.
두 사람은 서로에게 빠르게 빠져들었습니다. 아버지가 같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정략결혼 한 어거스타는 방탕한 남편을 견디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녀 마음의 빈자리를 이복동생 바이런이 채워줬지요. 바이런은 다른 여성과 결혼한 이후에도 어거스타를 만난 것으로 추정됩니다. 1814년 어거스타가 셋째 딸 엘리자베스를 낳았을 때, 런던 사교계는 “바이런의 아이”라고 수군댔지요. 근친상간이라는 대형 추문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 리는 바이런과 어거스타 사이의 아이로 추정된다.
바이런의 두번째 ‘그랜드 투어’
“가자, 내가 사랑하는 유럽 대륙으로.”

바이런의 두 번째 그랜드 투어가 시작된 건 그때였습니다. 주변 사람으로부터 쏟아지는 손가락질을 ‘강심장’인 그조차도 견딜 수 없었지요.

추문을 못 견딘 아내도 이미 딸을 데리고 떠나버린 뒤였습니다(딸 에이다는 이후 엄마 밑에서 수학천재로 자라납니다. 암호화폐 에이다가 그녀의 이름에서 따왔습니다).

바이런의 딸 에이다 러브레이스는 수학에서 큰 발자취를 남겼다. 수학계와 암호화폐에도 그녀의 이름이 남아있다.
마음의 안식처가 필요하던 찰나.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5년 전 떠나온 유럽 대륙이었습니다. 그의 두 번째 그랜드 투어가 시작된 셈이지요.

첫 번째 목적지는 스위스. 그의 주치의가 함께 머리를 식히자고 제안한 곳이었습니다. 빌라 디오다티에 바이런과 다른 문학인들이 모여서 여러 밤을 보냈습니다. 때는 1816년. 인도네시아 화산 폭발로 화산재가 해를 가리면서 기온이 급감하고 비가 많이 오는 날이 잦아졌지요. ‘여름없는 해’라고 불린 그 시기였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을 집필한 매리 셜리는 바이런 경을 비롯한 친구들과 담화를 나누는 가운데 작품을 떠올렸다. 1840년 작품.
다섯명의 문인들은 난롯가에 앉아 스산한 날씨에 맞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게임을 합니다. 이때 탄생한 이야기가 메리 셜리의 ‘프랑켄슈타인’, 존 폴리도리의 ‘뱀파이어’였습니다. 바이런은 지구멸망을 다룬 서사시 ‘다크니스’를 집필합니다. 기후위기가 예술의 창조자가 되었던 셈이지요.
성을 문학의 동력으로 삼은 바이런
‘문학과 섹스’는 투어의 화두였습니다. 책을 쓰고, 여성들을 만나 관계를 나누는 삶이 지속되었지요. 섹스가 그의 문학에 불쏘시개라도 되는 듯이요. 베니스, 피사, 라벤나를 여행하면서도 쾌락은 절대 놓치지 않았습니다.
“제가 꼬신 게 아니라요, 저는 유혹당했을 뿐이에요” 바이런의 ‘돈 후안’ 속 내용을 묘사한 헨드릭 셰퍼의 그림 ‘하이디의 무릎에서 잠든 돈 후안’. 1827년 작품
그가 여행 도중에 쓴 책의 이름은 ‘돈 후안’. 스페인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바람둥이 ‘돈 후안’을 바이런의 독특한 시각으로 재해석합니다.

민간전설에서 돈 후안은 자유분방하고 능동적으로 여성을 꾀는 바람둥이지만, 바이런의 작품에서 돈 후안은 여성에 의해 유혹당하는 순진한 남자로 그려집니다. 마치 바이런 자신의 스캔들이 모두 여성에 의해 강요당했다는 듯이.

“저 미남은 누구지?” 1873년 묘사된 ‘하이디의 돈 후안 발견’. 바이런의 작품을 묘사한 포드 메독스 브라운 작품.
독립전쟁에 투신한 바이런
“우리 그리스의 독립을 도와주겠소?”

이탈리아 제노아에서 거주하던 1823년의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로부터 편지가 도착합니다. 그리스 독립전쟁에 참전해 달라는 제안. 바이런은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재건은 그의 오랜 화두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는 이제 독립국이다” 오스만에 저항해 혁명전쟁을 펼치는 그리스 사람들. 화가 피터 폰 헨스의 작품.
유럽의 문명을 잉태한 그곳이 부활한다니. 바이런의 가슴은 뛰었습니다. “당장 합류하겠습니다” 의용군의 역사에 길이 남을 선택이었지요. 유럽의 슈퍼스타가 그리스 독립군으로 자원입대였기 때문입니다.

바이런은 물질적, 정신적으로 그리스의 독립을 지원합니다. 잉글랜드에 있는 자산을 팔아 그리스를 도울 생각이었지요. 2만 파운드에 달하는 거금이었습니다. 감동한 그리스인들이 바이런과 함께 총을 들기로 결심합니다. 30명의 장교, 200명의 병사가 모여 ‘바이런 여단’이 결성되지요. 수는 적었지만 기세가 대단한 부대였습니다.

“유럽의 스타 바이런 경을 맞이하라” 테오도로스 브리자키스의 작품 ‘미솔롱기에서 바이런 경 영접’ .
그러나 독립의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바이런의 꿈은 원대했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모든 독립 운동사가 말해주듯, 항상 적은 외부보다는 내부에 있습니다. 그리스인 독립군들 알량한 권력을 두고 분열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독립 전쟁을 묘사한 마르시글리 필리포의 작품.
“열이, 열이 나는군” 설상가상이었습니다. 오스만이 점령한 그리스 땅의 레판토 공격을 앞두고 바이런이 열병에 쓰러집니다. 당황한 의료진이 그를 서둘러 치료했지만, 오히려 악수였습니다. 미신적인 치료기술 중 하나였던 사혈요법으로 바이런의 건강이 더 악화했기 때문입니다.

바이런의 그리스 독립 열정은 그렇게 꺼져갔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인 1824년 4월 19일, 그의 나이 고작 36살이었습니다.

바이런 경의 죽음. 기형이 있던 오른발을 시트로 가린 모습이 인상적이다.
더는 존재하지 않으면서 불면한 바이런
죽은 바이런은 그러나 불멸의 존재였습니다. 그가 고대 그리스를 찬미하며 썼던 Immortal, though no more(더는 존재하지 않으나, 불멸하는 그리스여!)라는 표현처럼요.

바이런의 영웅적 행동에 감동한 유럽이 그리스 독립을 돕기로 결정합니다. 그리스 혁명을 지지하는 여론이 폭발했고, 러시아·프랑스·영국 등이 군사적 지원을 시작했지요. 죽은 바이런이 만든 기적이었습니다.

“그리스의 독립은 신의 뜻이다” 데오도로스 브리자키스의 작품.
1832년 콘스탄티노플 조약을 통해 그리스가 독립국가로 출범합니다. 바이런이 살아 있었다면, 초대 그리스 국왕은 바이런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까지 나왔습니다. 그만큼 그리스 사람들에게 바이런은 국민영웅이었다는 의미입니다. 아테네 인근 지역이 ‘비로나스’로 불리는 이유입니다. 바이런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의 영웅, 조국에선 색정광
조국 영국에서 바이런의 추모는 쉬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성 추문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의 기념비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건립된 건 1969년. 그가 눈을 감은지 145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그리스 아테네 여신이 바이런에 왕관을 씌우는 모습을 묘사한 동상. 아테네 국립공원에 있다. 그리스에서 바이런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대목. [사진 출처=Jebulon]
한 언론인은 이렇게 일갈합니다. “바이런의 애완견은 영국의 거대한 무덤에서 기념되지만, 바이런 경 자신은 초라한 무덤조차 없다”. 애견인이었던 바이런이 반려견 ‘보츠웨인’을 위해 큰 무덤을 만들어 준 상황을 풍자한 것이었지요.
바이런의 반려견 보츠웨인의 기념비. 바이런이 사망 후 별다른 안식처를 찾지 못한 것과 대비된다. [사진 출처=트레버 리카드]
잉글랜드의 뛰어난 문인이자, 변태 성욕자였고, 그리스에서는 민족 독립 영웅이었던 바이런. 선과 악, 도덕과 방탕이 공존하는 바이런. 200년이 지나도 그는 여전히 복합적인 인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가 남긴 메시지가 여전히 우리 내면과 공명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는 선과 악이 너무 이상하게 혼합되어 있어서 나를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다.”

알바니아 전통 복장을 한 바이런 경.
<네줄요약>

ㅇ영국의 위대한 시인 중 하나인 바이런은 유려한 문장과 뛰어난 미모로 사교계의 주목을 받았다.

ㅇ성에 방종했던 그는 이복동생과 불륜 스캔들로 조국을 떠나야 했다.

ㅇ이후 바이런은 그리스 독립 전쟁에 참가했다. 고대 그리스를 이상향으로 삼아서였다.

ㅇ그리스에서 영국의 시인 바이런을 추앙하는 이유다. 세기의 바람둥이, 위대한 독립운동가가 공존하는 다면적 인물이었다.

<참고문헌>

ㅇ박재영, 궁지에 몰린 바이런:돈·결혼·그리고 문학적 명성, 19세기 영어권 문학 18권 2호,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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