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에 지(池)는 왜 만들었을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경기일보 2024. 4. 27.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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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 연못은 백성의 휴식공간을 위해 판 것이 아니다.

또 공사에 필요한 흙을 조달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화성 연못은 시간이 지나며 역할이 변신한다.

화성에 큰 연못이 5개 있다. 왜 이리 연못이 많을까? 이강웅 고건축가

지(池)와 연(淵)은 흔히 말하는 못 또는 연못이다. 화성에는 남지 2개, 동지 2개, 북지 1개로 모두 5개가 있다. 행궁에 있는 2개, 성 밖에 있는 2개를 제외한 개수다. 하나의 성에 연못이 5개나 있는 성은 화성이 유일하다. 의궤 용어 ‘지’는 편의상 ‘연못’으로 표현한다. 화성에 왜 이렇게 많은 연못이 있을까?

연못에 대해 의궤에는 아주 간략히 설명하고 있다. 남지에 대해서는 “가운데 작은 섬이 있으며 홍련과 백련을 심었다. 가운데에 섬 둘이 있는데 두 못의 사이에 정자 터가 있다”고 기록돼 있다. 북지는 “성 밖 도랑의 물을 끌어댔기 때문에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했다. 동지는 “마름과 연꽃을 심었고 가운데에 작은 섬이 있다. 이것이 상지다. 하나는 구천의 북방에 있다”고 설명한다.

화성에 연못은 왜 이렇게 많이 만들었을까? 연못을 만든 이유로 학자들은 공사에 필요한 흙을 조달하고 백성에게 아름다운 휴식공간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결론을 말하면 이런 주장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흙이 필요해 연못을 팠다는 것이 아니라는 몇 가지 근거를 제시한다.

화성의 연못은 휴식공간으로 조성했을까? 이강웅 고건축가

첫째, 공급에 맞는 일정이 아니다. 5개 연못 전체에서 나올 흙의 3분의 2는 하남지와 상동지에서 나온다. 흙이 필요했다면 많은 흙이 나오는 하남지와 상동지를 먼저 파야 하는데 이 두 곳은 모든 성역이 거의 끝나는 시점에 팠다. 둘째, 흙의 양이 너무 적다. 북성의 내탁에 필요한 흙은 5만㎥로 계산된다. 반면에 북지에서 나온 흙은 2천㎥다. 북성에 필요한 양의 4% 정도다. 매우 미미하다. 남지의 경우도 남성에 소요되는 양의 13%에 해당한다.

셋째, 결정적 이유로 초기에 흙이 필요하지 않았다. 의궤 ‘토품(土品)’에 “남성과 북성은 토질이 개흙과 같아서 땅을 6척을 파고 벽돌을 3중으로 깔았다”고 기록했다. 실제로 초기에는 토질을 바꾸는 치환공사와 기반을 보강하는 공사라 흙이 필요하지 않고 두툼한 판석과 벽돌이 필요한 시기였다. 연못을 판 착공 첫해 3, 4월에는 흙이 필요한 시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판 흙을 버려야 했다. 종합하면 소요되는 자재의 종류, 시기, 수량이 모두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연못을 팠을까? 북지, 남지, 동지별로 살펴보자.

북지는 왜 팠을까? 의궤에 “북지는 성 밖 도랑의 물을 끌어댔기 때문에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했다. 이 말은 북지가 성 밖 물을 성안으로 끌어들여 모아 두는 역할을 했다는 근거다. 성을 쌓을 곳 밖에 있는 도랑 때문이다. 성 기초공사를 하기 위해 6척을 파니 물이 들어차 공사를 할 수 없었다. 어떡하든 물을 잡아둬야 했다.

성을 쌓는 데 사용한 막대한 양의 흙은 북성 밖 둔전을 만들며 나온 흙을 사용했다. 이강웅 고건축가

북성 공사를 시작하려면 북은구를 먼저 설치해야 했다. 은구(隱溝)란 성 밑을 관통하는 수로를 말한다. 물길을 만들어 줘야 성 기초공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은구 공사를 위해 도랑을 성안으로 끌어들여 물을 잡아둔 것이다. 북지 파기를 마친 날이 4월4일이고 북성 공사에 착수한 날이 4월7일이다. 이 사이에 북은구 공사를 한 것이다. 한마디로 북지는 물을 모아두는 저류지(貯留池) 목적으로 판 것이다.

남지를 판 이유는 무엇일까? 북지와 똑같은 이유로 팠다. 다른 점은 성 밖 도랑이 아니라 성안 도랑의 물을 가둬 둔 점이 다르다. 도랑이 공사할 남성 터를 통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은구 공사를 위해 도랑물을 가두어 둬야 했다. 상남지를 끝낸 날이 4월1일이고 남성 공사에 착공한 날이 4월16일이다. 이 사이에 남은구 공사를 했다. 북지와 같은 저류지 역할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심정(深井)공법이다.

끝으로 동지는 왜 팠을까? 동지는 북지나 남지와 위치가 다르다. 동지 인근 성 안팎 어디에도 도랑이 없다. 당연히 은구도 없다. 성 기초공사와 관련이 없다는 말이다. 혹시 남수문과 관련이 있을까 살펴봐도 연관이 없다. 동지를 판 것이 화성 성역 착공 첫해 4월이고 남수문은 2년 후 공사를 했기 때문이다. 그럼 무슨 목적으로 팠을까?

화성 성역에서 가장 먼저 착수한 공사는 3개의 연못이다. 공사 전 물을 제어하기 위함이다. 이강웅 고건축가

동지는 동성 공사에 착수하기 위해 판 것이 아니라 동성 공사를 위한 공사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판 것이다. 모든 공사에는 공사용수가 필요하다. 현재도 공사가 시작되면 가장 먼저 가설 전기와 가설 수도를 설치한다. 당시도 공사용수 공급을 위해 웅덩이를 판 것이다. 물을 모아두기 위함이다.

북지는 북은구 공사가 완료되자마자 평지북성과 산상서성의 공사용수를 공급했다. 남지도 남은구 공사가 완료되자 평지남성과 산상서성에 공사용수를 제공했다. 은구 공사가 완료되며 저수조(貯水槽)로 역할이 바뀐다. 저수조는 ‘물탱크’다. 저류지에서 저수조로 역할이 바뀐 것이다. 도랑물을 모아둔 시간에 은구 공사를 했다. 저류지 역할이다. 은구를 사용하게 되니 성 쌓기 공사를 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공사용수를 공급하는 저수조로 변신했다.

이런 화성 연못이 화성 건설이 끝난 후에 그 목적이 또 바뀐다. 저류지와 저수조 역할은 없어지고 새로운 세 가지 기능을 제공한다. 연못이 없었다면 수원은 지속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에 관한 내용은 다음 편에 계속 발표할 예정이다. 연못을 통해 정조의 치수 관리와 올바른 공사 선후 관리를 엿봤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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