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국민은 하나라는 원칙 지킨 것이 통일 앞당겨”

최아리 기자 2024. 4. 27. 0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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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나이더 동독 특임관 인터뷰
한독통일자문위 참석차 29일 방한
2022년 독일 연방의회에서 열린 토론회에 참석한 카르스텐 슈나이더 동독특임관/로이터 연합뉴스

“‘독일 국민은 하나’라는 일관된 원칙을 고수한 것이 독일 통일을 앞당기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카르스텐 슈나이더 독일 총리실 정무차관 겸 동독 특임관은 26일 본지 인터뷰에서 “서독 기본법에 규정된 통일 조항이 동·서독 통일에 기여했다”며 이같이 말했다. “동독 주민도 독일 국민으로 대우하는 기본법 덕분에 동독 주민들도 ‘독일 시민으로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릴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2차 대전 후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된 독일은 1990년 하나로 합쳐졌다.

동독 특임관은 통일 후 동·서독 격차를 줄이기 위한 정책을 담당한다. 슈나이더 특임관은 30일부터 부산에서 열리는 제13차 한독통일자문위원회에 독일 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29일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작년 연말 북한은 한국과 관계를 ‘적대적이고 교전 중인 두 국가’로 공식 규정했다. 서로 다른 국가임을 명시한 것이다. 독일 통일 과정에서도 이런 선례가 있었다. 서독은 ‘독일 국민은 하나’라는 원칙을 고수한 반면, 동독은 1974년 헌법 개정으로 통일 조항을 삭제했고, 독립 국가 지위를 주장했다.

슈나이더 특임관은 “1989년 동독 주민들이 자유선거와 언론 자유, 감시 국가 철폐를 위한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이런 요구가 점차 통일에 대한 요구로 초점이 옮겨갔다”고 했다. 독일 정부에 따르면 동독에서 서독으로 이주한 주민 수는 1961년 베를린 장벽 건설 이후 매년 1만~4만명 수준에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에는 수십만명으로 급증했다.

통일 후 독일에 대해 슈나이더 특임관은 “공동 성장을 위해서는 인내심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1990년에 예상했던 것보다 동독의 경제 구조 조정은 상당히 오래 걸렸고, 이제 드디어 서독에서 동독으로 이주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며 “모든 어려움에도 동독 지역은 흥미롭고 다양성이 존재하는 곳이 됐다. 통일은 그야말로 행운이었다”고 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통일부 역할에 대해 “국내적으로 통일에 대한 공감대를 넓히고 북한의 실상을 예의 주시하는 동시에 국제사회가 더 관심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다음은 주요 일문일답 내용.

-작년 8월 미국 캠프데이비드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의에서 각국은 ‘자유롭고 평화로운 한반도 통일’이라는 비전을 지지했다. 과거 서독은 통일에 대한 국제적 지지를 어떻게 확보했고, 통일 과정에서 국제 사회는 어떤 역할을 했나?

“우호적인 국제적 여건이 없었다면 독일 통일은 불가능 했을 것이다. 동서독과 제2차 세계 대전 승전국인 미국, 소련, 프랑스, 영국이 맺은 ‘2+4 조약’(통일 독일의 국제적 지위 결정하고 영토와 군사적 문제 해결하는 내용을 담은 조약)은 통일을 위한 국제 사회 지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이 조약을 통해 독일은 최종적으로 대내외적 주권을 회복했다. 조약 체결에 앞서 국제적 차원에서 독일 통일을 준비하는 정치, 외교적 수 많은 논의들이 있었다. 서독이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서방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었다는 점은 독일 통일에서 과소 평가돼서는 안 된다”

-독일은 분단 기간 통일에 어떤 비전을 갖고 있었고, 국내 및 국제적 지원을 어떻게 확보했나?

“독일의 분단과 통일에 관한 서독의 정책은 당시 기본법에 독일인의 의무로 명시된 통일 조항을 중심으로 보아야 한다. 기본법은 서독이 독일의 통일을 위해 노력할 것을 의무화했다. 한편, (동독 평화혁명과 갑작스런 베를린 장벽 붕괴가 있었던) 1989년에 서독은 어떤 통일 비전을 따랐다기보다, 동독의 평화혁명과 동구권 정치적 격변이 만들어낸 공간을 실용적으로 활용했다”

“(국내적으로는)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 채택으로 동서독 주민 간 접촉이 지속적으로 확대됐다. 주민들 간 접촉이 통일 과정에서 중요한 동력이 됐다. 국제 지지를 확보하는 데 있어서는 통일된 독일이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와 유럽 공동체에 확고하게 속해 있겠다는 약속이 중요했다”

-’독일 국민은 하나’라는 원칙을 고수하며 동독을 국제법상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던 서독의 입장은 통일에 어떤 영향을 줬나?

“서독이 기본법의 통일 의무 조항을 확고하게 준수했던 것이 (통일에) 매우 중요했다고 본다. 많은 동독 주민들에게 독일 시민으로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제공했다. 1989년 동독 주민들은 자유선거, 언론의 자유, 감시 국가 철폐를 위한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이런 요구는 점차 통일에 대한 요구로 초점이 옮겨 갔다. 당시 (통일에 대한 요구는) 동독 내에서도 논란의 여지가 있었으나, 베를린 장벽 붕괴 후 1990년 3월 열린 동독의 첫 자유 선거에서 동독 주민 압도적 다수가 조속한 통일에 찬성했다”

-과거 서독은 동독 주민들의 정보 접근성을 높이고, 서독 주민들에게 동독 현실을 알리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나?

“분단시기 동독 주민들이 서독의 라디오와 TV 프로그램을 수신할 수 있었다는 것은 특히 중요했다. 동독의 거의 모든 주민들은 서독으로부터 정보와 여론을 접하고, 이를 동독 내 정보와 비교할 수 있었다. 주민들 간의 직접 접촉도 중요했다. 예를 들면 서독 학생들이 동독 지역으로 수학여행을 가고, 학교 동아리 간 교류도 이뤄졌다. 이 모든 것이 동서독 주민들의 태도에 영향을 미쳤다”

-동독 특임관으로 통일 이후 동서독간 격차를 줄이기 위한 지원 정책을 담당하고 있다. 한국 정부의 통일과 대북 정책에 조언을 준다면?

“공동 성장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내심이 필요하다. 통일 이후 동독의 생활환경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동독 주민들에게는 큰 도전이었다. (통일이 된지 3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상처와 상대적 박탈감이 흔적으로 남아있다. 동독 경제의 구조조정은 1990년 예상했던 것보다 상당히 오래 걸렸다. 동독 지역에서 서독 지역으로 대규모 이주가 있었는 데 이제 드디어 역전되기 시작했다. 모든 어려움과 도전에도 동독지역은 현대적이고, 흥미롭고, 다양성이 존재하는 곳이 됐다. 통일은 그야말로 행운이었다”

-이번 한국 방문의 목적은 무엇인가?

“양국간 긴밀한 신뢰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고 싶다. 다양한 분야에서 상호 지식과 경험을 공유해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2년전 (한독통일자문위원회 참석차) 한국을 방문했을 때 경험했던 한국인들의 환대가 정말 기대된다.(이번 한독통일자문위원회가 열리는) 부산을 알게 되는 것을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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