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茶는 청량하고 뒷맛이 달고 그윽해요”

순천/김성윤 음식전문기자 2024. 4. 27.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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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초의선사 제다법 이은
‘동춘차’ 박동춘 소장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소장(오른쪽)이 불가에서 초의선사 다맥을 이어갈 덕진 스님과 찻잎을 따고 있다./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차밭은 전남 순천 주암호 상수원 보호구역에서도 한참 더 들어가는 깊은 산골에 있었다. 곡우(穀雨)를 하루 앞둔 지난 18일 차밭에서 만난 박동춘(71)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소장은 앞치마 가득 딴 연녹빛 해찻잎을 한 움큼 집어 건네며 “이 기막힌 향을 좀 맡아보라”고 했다. 재스민·박하처럼 싱그럽고 달착지근한 허브와 구수한 햅쌀이 섞인 듯한 향이 올라왔다.

“올해는 찻잎이 올라오는 3월부터 4월 초 날씨가 덥지 않아 맛있게 자랐어요. 서늘하고 일교차가 커 천천히 자랄 수 있었고, 덕분에 맛과 향이 조밀하게 응축됐네요. 이 찻잎으로 만들 차가 기대돼요.”

박 소장은 한국 차의 중흥조로 불리는 초의선사(1786~1866)의 다맥(茶脈)을 잇는 인물이다. 그가 만드는 ‘동춘차(東春茶)’는 초의선사가 되살려 낸, “첫 맛은 소쇄담박하고, 목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시원한 기운이 온몸에 퍼지는” 한국 차의 원맛을 고스란히 드러낸다고 평가받는다.

박동춘 소장이 갓 덖은 해차를 살펴보고 있다. 박 소장은 “차에서 가장 중요한 건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기운이며, 맛과 향은 외형일 뿐”이라고 했다./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초의차 계승해 탄생한 동춘차

명성이 자자하지만 실제 동춘차를 맛본 이는 극히 드물다. 생산량이 원체 적은 데다 팔지도 않는다. 스님들 그리고 차밭 유지·관리 등 차 만드는 데 필요한 비용을 대는 후원회 회원들과 조금씩 나누는 실정이다. 한때 동춘차가 ‘이건희 회장도 사 마시지 못하는 차’로 소문났던 까닭이다. 박 소장은 “보존에 힘써 왔던 우리 차 문화를 어떻게 더 널리 알릴지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한 해 만드는 차가 얼마나 되나요?

“지난해 잎차 600통과 동전만 한 단차(團茶) 56개를 생산했어요.”

-단차가 뭐죠.

“한국 차 문화가 가장 융성했던 고려 시절 왕실과 귀족 등 엘리트들이 즐기던 차입니다. 찻잎 찌고 틀에 담아 작은 덩어리로 찍어내 말린 차입니다. 마실 때는 곱게 가루로 갈아 뜨거운 물을 부어가며 다말(거품)을 내 마셨죠. 2018년 고려 건국 1100주년을 맞아 재현했습니다.”

-더 만들어서 더 널리 나누면 안 되나요.

“차밭 3곳 총 4000여 평을 가지고 있는데, 개인이 관리하기에는 이 정도가 한계인 것 같아요. 주변에 좀 더 수확할 수 있는 야생 차나무 군락지가 있지만 시간도 인력도 부족해 생산량을 늘릴 엄두를 내지 못해요.”

-팔아서 비용을 충당할 수는 없을까요.

“초의선사로부터 이어온 한국 차 문화를 보존하려는 마음이었지 돈 벌려고 시작한 일이 아니라서요. 차 문화 발전을 도울 분들에게 선물은 하고 있어요.”

-차밭이라지만 모르고 보면 대나무 숲 아래 우거진 잡목 덤불 같습니다.

“고려 때부터 존재해 온 차밭입니다. 과거 대광사란 절이 있었고 스님들이 차를 얻으려고 가꾸던 차밭인데, 임진왜란 때 절이 불타면서 400년 이상 방치됐죠. 차를 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스님에게 소개받았어요. 차나무가 스스로 번식하고 자라는 야생 상태입니다. 제가 하는 일이라고는 가을에 오래된 나무줄기를 베고, 봄에 대나무를 솎아주는 정도. 약을 치거나 거름을 줄 필요도 없지만 상수원 보호구역이라 쓸 수도 없어요.”

-본래 한학자인데 어떻게 차와 인연을 맺었나요.

“1979년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추천으로 응송스님을 만났어요. 응송스님은 전남 해남 대흥사 주지에서 물러나 초의선사와 차에 대해 연구하며 글을 쓰고 계셨죠. 응송스님이 쓴 글을 윤문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제가 대학원에서 한문학을 전공해 원문과 응송스님의 번역을 비교하며 글을 다듬을 수 있었거든요. 그렇게 절에 머물며 초의차 이론과 제다법을 스님에게 전수받았지요.”

차 만들기 핵심 과정인 초벌 덖음. 박 소장은 찻잎을 덖는 가마솥의 미묘한 온도 변화를 감지하기 위해 얇은 삼베만 손가락에 감고 차를 덖는다./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도자기 굽기보다 까다로운 차 덖음

해찻잎 따기는 오전 7시 30분 시작해 11시에 끝났다. 박 소장과 그를 도와 동춘차를 만드는 이들이 찻잎을 감싸고 있는 껍질인 백합과 나무줄기, 불순물 따위를 솎아냈다. 본격적인 차 만들기는 오후 3시부터 진행됐다. 초의선사가 정립한 제다법은 찻잎을 덖고(살청), 비비고(유념), 식혀, 말리기(재건)로 이뤄진다. 이 중 가장 까다롭고 중요한 과정은 초벌 덖음이다. 박 소장은 “덖음을 한 번도 남한테 맡겨본 적 없다”고 했다.

-찻잎을 왜 덖나요.

“찻잎이 스스로를 지키려고 품은 독성을 중화해 사람이 먹어도 탈이 없게 다스리는 과정입니다. 제다 성패의 70~80%가 여기서 판가름 나요. 찻잎이 설익으면 마신 뒤 속이 냉하거나 쓰리고, 너무 익으면 차의 기세가 꺾입니다. 가마솥 온도를 300~350도로 유지하며 찻잎 자체 수분으로 익힙니다. 타지 않고 고르게 익히는 게 중요합니다. 솥 바닥 열기가 손이 아릴 정도면 온도가 맞아요. 이걸 감지하려고 장갑을 끼지 않지요.”

덖음은 2인3각 경주였다. 찻잎을 덖는 이와 아궁이에 불 지피는 이의 합이 완벽하게 맞아야 했다. 박 소장이 가마솥 앞에 앉고 도예가 이명균 ‘하빈요’ 대표가 아궁이에 불을 땠다. 이 대표는 박 소장과 함께 고려 다인들이 사용하던 청자 다구(茶具)를 되살려 낸 이다.

그릇 굽는 가마를 다루는 도예가들은 불 때기 전문가들이다. 이 대표는 “차 덖는 솥 불 지피기가 도자 가마보다 어렵다”고 했다. “도자 가마 불은 100도 단위로 조절하는데, 찻잎 덖는 불은 10도 안팎으로 훨씬 섬세해야 하거든요.”

박 소장이 가마솥에 쟁반 하나에 소복하게 쌓인 찻잎을 붓고 대나무 가지를 묶어 만든 솔로 찻잎을 뒤적였다. 솥뚜껑을 덮었다 열기를 서너 차례 반복하며 솥 안 온도를 높이고 열기를 고루 퍼지게 했다. 솔로 찻잎을 저으면서 이 대표에게 계속 불 조절을 지시했다. 이 대표는 대나무를 쪼갠 장작을 넣고 빼거나, 물을 뿌리거나, 삽으로 덮으며 아궁이 불을 정교하게 다스렸다.

박 소장이 솥뚜껑을 여닫을 때마다 퍼져 나오는 향이 마법처럼 변했다. 허브 향 나던 생찻잎을 한 번 볶고 나자 매운 풋내가 나더니, 다시 볶자 고소한 냄새가 피어 올랐다. 마지막으로 솥뚜껑이 열렸을 땐 싱그러움과 구수함이 동시에 퍼졌다. 다음 과정은 유념(揉捻)이다. 왕골 돗자리에 빨래하듯 힘차게 비빈다. 찻잎에서 거품이 나와 손가락 사이에 진액이 엉기도록 7~8분을. 수분 함량을 일정하게 하고, 진액이 잎 표면을 덮도록 하면서 잎 조직을 적당히 파괴해 차 성분이 쉬 우러나게 하는 작업이다.

유념을 마치면 갈대 발에 한지를 깔고 뭉친 찻잎을 풀어헤친 뒤 한지를 덮어 두어 바람을 쐰다. 진액이 살짝 마르며 찻잎 표면에 엉긴다. 바람을 쐰 찻잎은 다시 가마솥에 말리는 재건(再乾) 과정을 거치며 수분이 날아가고 향과 맛이 잎에 스며든다. 이때는 진액이 타지 않도록 가마솥을 80~100도 정도로 너무 뜨겁지 않게 때면서 솔로 저으며 서서히 말린다. 연두색이던 찻잎이 검은색에 가깝게 마른다. 재건이 끝난 차는 온돌방에 한지를 깔고 고르게 펴서 하룻밤 재우고 5~7일 화기를 빼주는 과정을 거쳐 통에 담는다.

박 소장이 올해 첫 동춘차를 따르고 있다. 이명균 도예가가 구운 청자 찻주전자·찻잔과 동춘차 빛깔이 조화롭다./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뜨겁게 우려야 茶 맛·향·효능 살아

박 소장이 “화기가 아직 다 빠지진 않았지만 서울 돌아가기 전 해차 한번 맛보라”며 차를 끓여 이 대표가 만든 청자 찻잔에 따라줬다. 입안이 시원하고 환해지더니, 기분 좋은 온기가 온몸으로 퍼졌다.

-곡우 하루 전 만들었으니 우전차(雨前茶)네요.

“곡우는 차 철의 상징이고, 매해 처음 채다한 여린 찻잎으로 만드는 우전차는 명차의 대명사가 된 지 오래죠. 하지만 우리나라 기후 조건에서 우전차를 만들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억지로 싹을 돋게 해 우전차를 만든다면 이치에 반할 뿐 아니라 차 정신에도 어긋납니다. 인간의 속된 욕망을 드러낼 뿐입니다.”

-그럼 첫물차를 따서 만들기에는 언제가 적당한가요.

“채다 시기는 지역 조건을 고려하되 찻잎이 두세 잎 정도 벌어졌을 즈음이 가장 적당합니다. 올해는 우연히 곡우 전 햇물차를 만들게 됐지만, 곡우는 상징적 의미일 뿐 채다 시기와는 별개로 봐야 합니다.”

5월 중순~6월 하순 딴 찻잎으로 만든 차는 두물차, 8월 초순~중순은 세물차, 9월 하순~10월 초순은 네물차라고 한다. 동춘차는 두물차까지만 만든다. 차를 따는 시기가 늦어질수록 찻잎이 두껍고 뻣뻣해 떫고 쓴맛이 많아진다. 늦게 딸수록 맛은 떨어지지만, 카테킨 등 몸에 유익한 성분은 많아져 건강에는 오히려 이롭다.

-좋은 차는 어떤 차인가요.

“마실 때 향기·맛·기운이 모두 좋아야 합니다. 마신 후에는 청량하고 뒷맛이 달고 그윽해야 하고요. 탁하거나 속이 쓰리면 안 됩니다. 차의 가장 중요한 효능은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기운입니다. 맛과 향은 외형일 뿐입니다.”

-차를 어떻게 우려야 하나요.

“차 본연의 효능과 풍미를 맛보려면 물을 완전히 끓인 뒤 90도 내외에서 우려 뜨겁게 마셔야 합니다. 오래 끓인 물은 생기가 빠져 차 맛이 밍밍해집니다. 떠온 지 4~6시간 사이 물이 이상적이고요.”

-차를 뜨거운 물에 우리면 속 쓰리고 위 버려서 미지근한 물을 써야 한다던데요.

“잘못된 얘기입니다. 일제강점기 차 공장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이들이 냉기와 독소를 제거하는 정교한 제다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차를 만들어 벌어진 일입니다. 제대로 만들면 그런 일이 없어요. ‘구증구포(九蒸九曝)’로 대표되는, 여러 번 덖는 것도 좋은 제다법이 아닙니다. 여린 찻잎을 화기에 자꾸 노출하면 좋을 리 없습니다. 차를 탁하고 저급하게 만듭니다. 숫자 9는 횟수가 아니라 정성을 다하라는 뜻이에요.”

-우리 차를 널리 알리고 싶으시다고요.

“젊은이들이 조금씩 관심 갖는 것 같아 다행이에요. 우리 연구소에서 공부하고 있는 젊은 연구원은 휴가까지 내고 왔어요.”

엔터테인먼트 회사에 다니는 1988년생 연구원은 “남편과 함께 차밭 조성할 땅을 꾸준히 알아보고 있다”며 “찾기만 하면 회사 그만두고 차밭 가꾸고 차 만들며 살 계획”이라고 했다. 그 모습을 박 소장이 흐뭇하게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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