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수에 채소 한 장, 고기 한점을 ‘찰랑’

정동현 음식칼럼니스트 2024. 4. 27.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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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정동현의 pick] 샤부샤부

사람들이 빠져나간 여의도는 저문 바다 위의 섬 같았다. 빌딩 사이로 빠져나가는 봄날 저녁 공기는 한산한 거리만큼이나 상쾌했다. 1982년 10월 준공된 충무 빌딩에 들어가니 그 옛날 얼마나 콘크리트를 두껍게 부었는지 한기가 느껴졌다. 그 건물 2층 구석에 자리한 ‘녹향샤브샤브’는 이 빌딩에서만 내리 26년 장사를 했다. 그곳의 구석진 자리에 앉아 저녁 식사를 할 참이었다. 손님은 몇 없었다.

그중 문 가까이에 자리를 잡은 노부부는 하얀 머리카락과 마른 몸이 세월 속에 서로 닮아져 한 사람 같기도 했다. 둘은 냄비 하나를 각각 앞에 두고 채소와 고기를 번갈아 육수에 담갔다. 테이블에 놓인 핫플레이트는 이제 단종이 되어 구할 수도 없다고 했다. 다른 집처럼 인덕션을 쓰면 물이 금방 끓는다. 그러나 전기저항을 먹여 철판 자체를 가열하는 핫플레이트는 천천히 달아올랐다. 그사이 대추, 인삼 조각이 동동 뜬 맑은 육수가 조금씩 끓어올랐다.

서울 영등포구 ‘녹향샤브샤브’의 샤부샤부 /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

예전에 샤부샤부는 흔한 음식이 아니었다. 고기 질이 좋지 않으면 음식 자체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의 샤부샤부는 일본과 다른 형태로 발전했다. 가볍게 육수에 데쳐 먹는 형태에서 한국식 찌개와 같은 진한 국물로 그 바탕부터 바뀌었다. 칼국수 사리는 기본이고 참기름, 김가루 같은 갖은 양념을 한 볶음밥까지 먹어야 끝이 났다. ‘녹향샤브샤브’는 그런 유가 아니었다. 얇게 썬 소고기 목심은 지방이 거의 없는 붉은색 살코기였다. 소담하게 쌓아준 채소와 면 사리는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았다. 동행한 형이 소매를 걷어 올리며 젓가락을 집었다. 형은 육수에 채소 담그는 것 하나에도 잔소리를 했다.

“와사비 잎처럼 두꺼운 채소는 딱 5초면 된다. 하나두울세엣.”

설명은 5초였지만 입으로는 셋을 셌다. 어쨌든 채소가 힘이 빠져 아예 풀이 죽거나 혹은 죽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풋기가 살짝 빠진 이파리는 초록색이 선명했다. 혼잣말인지 아니면 나를 보고 하는 소리인지 형이 말을 이었다.

“한 번에 채소를 우르르 집어넣으면 안 돼. 이건 샤부샤부지 찌개가 아니잖아.”

맞는 설명이지만 속으로는 ‘언제 하나하나 넣어 먹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은 정말로 채소를 한 장씩 육수에 담그고 몇 번 찰랑거리더니 양념장에 푹 찍었다. 직접 간장을 달여 만든다는 양념장에는 무, 쪽파, 고춧가루, 레몬이 들어가 있었다. 빛깔과 다르게 양껏 찍어도 짠맛이 적었다. 물이 빠지지 않은 싱그러운 채소는 씹을 때마다 아삭하고 향긋했다. 고기는 오히려 채소보다 빨리 익었다. 고기가 하얗게 변하면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달콤하고 새콤한 양념장 깊이까지 고기를 담갔다. 핏기만 가신 고기는 느끼하지도 잡내가 끼지도 않았다.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 채소 한 장, 고기 한 점 뱃놀이를 하듯 찰랑찰랑거리고 있노라니 지금껏 바쁘게 우르르 채소와 고기를 한데 집어넣고 먹던 것이 조금은 부끄러웠다.

국수 차례였다. 국수를 풀 때는 양념장의 7할 정도를 육수에 부었다. 그래야 간이 맞는다는 게 형의 설명. 오래된 거래처에서 받아온다는 국수는 쉽게 풀리거나 끊기지 않았다. 육수를 머금어 통통해진 국수를 먹으니 아쉬운 느낌이 없었다. 죽까지 청하자 주인장은 일부러 남겨둔 단호박을 으깨고 공깃밥을 부은 다음 깻잎 몇 장을 잘라 넣었다. 뭐 하나 들어간 것이 없는 듯했지만 단호박의 맛이 깔끔하게 똑 떨어져 죽 한 숟가락 한 숟가락에 맛이 비지 않았다. 여기에 달걀 한 알을 따로 청해 넣으니 단맛에 진득한 노른자의 맛이 더해져 저절로 ‘아아’ 소리가 나왔다.

어느 틈에 꺼버린 구식 핫플레이트는 열이 식는 데 한참 시간이 걸렸다. 음식만큼이나 무던한 주인장은 사람이 없는 한가한 가게에서도 조용히 바닥을 쓸고 채소를 다듬었다. 거추장스럽게 멋을 부리지 않는 음식은 더 이상 세월 앞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잠잠히 끓어올랐다. 그리고 그곳을 찾는 오래된 사람들은 묵묵히 달아오르고 식는 그 철판처럼 굳게 입을 닫은 채 끝내 모든 것이 멈춰버릴 때까지 오직 스스로를 담금질할 뿐이었다.

#녹향샤브샤브: 샤부샤부 1만5000원, 고기 추가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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