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는 먹, 먹은 숯, 숯은 불에서 와…거대한 순환의 스토리 지니고 있죠

2024. 4. 27.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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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숯의 화가’ 이배
베니스비엔날레 공식 병행전시인 이배 개인전 ‘달집태우기’ 모습. [사진 조현화랑]
“보는 전시가 아니고 느끼는 전시를 하자는 마음으로 전시 공간을 마치 관람객이 그림 안에 들어오도록 하는 것처럼 구성을 해봤습니다. ”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중앙SUNDAY와 만난 ‘숯의 화가’ 이배(68·사진)는 말했다. 베네치아 본섬 북부에 위치한 빌모트 파운데이션에서 2024년 베니스비엔날레 기간에 맞추어 11월 24일까지 열리는 그의 개인전 ‘달집태우기’ 전시에서였다. 이 전시는 비엔날레 본전시 감독이 지정하는 30개의 공식 병행전시 중 하나다.

유학 시절 싼 재료찾다 바비큐 숯 발견

빌모트 파운데이션의 고즈넉한 안뜰을 지나 전시장 입구에 이르면 바알간 불 속에서 검은 숯이 타닥타닥 타고 있는 영상이 장중한 현대음악과 함께 긴 복도를 따라 펼쳐진다. 작품 ‘버닝’이다. 복도 끝에 이르면 마치 3D 수묵 추상화 같은 공간, 즉 하얀 여백에 거대한 검은 물체들과 검은 붓획이 가로지르는 공간이 관람객을 맞는다.

공간 입구에 자리잡은 거대한 검은 관문 같은 것은 작가의 ‘불로부터(Issu du Feu)’ 연작 중 최신작이다. 캔버스 위에 절단한 숯 조각들을 여백 없이 놓고 접합한 후 표면을 연마해 낸 것으로서, 단순한 검은색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심오한 푸른색이 돌며 영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이배
그 너머에는 한쪽 벽에서 바닥을 가로질러 다시 다른 벽으로 이어지는 반원 형태의 일필휘지 숯의 흔적 ‘붓질(Brushstroke)’이 기다리고 있다. “숯가루를 가지고 서예 같은 기분으로 한 것입니다”라고 작가는 설명했다. 그 옆에는 약 5m 높이의 검은 기둥 ‘먹’이 서 있다. “서예할 때 쓰는 먹을 하나의 조각으로 만든 거예요. 먹의 느낌을 주는 검정 화강석으로 만들었습니다. 서예는 먹으로부터, 먹은 숯으로부터, 숯은 불로부터 오는 그런 연결성을 생각하며 하나의 스토리를 만들었습니다.”

숯과 먹의 관계에 대해서 이배 작가는 설명했다. “정교하게 좋은 먹을 만들 때는 숯의 그을음으로 만듭니다. 그을음을 자연 아교와 섞어 강하게 압축시켜 말린 게 먹이에요. 또 평범한 먹은 숯가루를 단단히 뭉쳐서 만들지요. 그러니까 먹은 숯에서 온 것이지요. 그래서 먹은 자연과 인간 문명 사이에 굉장히 중요한 매개체예요. 4천년쯤 전에 먹이 발명되면서 사람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자기 개인의 표현이 가능해졌어요. 먹이 우리 동양에서는 엄청나게 중요한 하나의 미디엄이며 메타포인 셈입니다. 정신과 신체를 일체화시키는 도구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먹을 일부러 크게 조각으로 만들어 본 것입니다. 크게 만들어 보려고 욕심을 좀 냈죠.”

그는 화강석 조각이 원래 23톤이었는데 베네치아 시에서 허가해 주는 상한선이 3톤 밖에 안 돼서 20톤을 덜기 위해 내부를 파야 했다고 말하며 웃었다. 이 전시의 기획을 맡은 이탈리아 출신 독립 큐레이터 발렌티나 부찌에 따르면, 이 조각은 아프리카 짐바브웨의 검은 화강암을 서양 대리석 조각의 본고장인 이탈리아 토스카나주 카라라의 대리석 장인들이 깎고 다듬어 만든 것이다. 베네치아의 파도와 타오르는 달집의 불꽃을 무늬로 새겼다.

청도 달집 태운 숯 가루로도 작업

지난 2월 작가가 경북 청도에서 행한 달집태우기. [사진 조현화랑]
이 전시 ‘달집태우기’는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 개막일인 20일에 개막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지난 2월 24일 작가의 고향인 경상북도 청도에서 시작했다. 그날은 음력으로 정월대보름이었고 작가는 청도의 오랜 전통에 따라 ‘달집태우기’ 행사를 했다. 집집마다 모아온 청솔가지와 짚단을 높게 쌓아올려 ‘달집’을 만들고 보름달 아래에서 태우며 송액영복과 풍년을 빌던 풍습이다. 작가는 세계 각지에서 보내온 소원을 모아 한지 조각에 옮겨 적고 그것을 달집에 묶어 함께 태웠다. 그 과정이 바로 전시장 입구 복도에 길게 설치된 영상작품에 나온다.

작가가 하얀 전시장을 종이 삼아 일필휘지한 재료도 청도의 달집이 타고 남긴 숯의 가루이다. 벽에 그냥 그린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 파브리아노의 친환경 제지를 전통 ‘배첩’ 기법으로 공간의 바닥과 벽에 도배한 후 그렸다. 가장 큰 ‘붓질’ 외에도 다른 벽면에 두 점의 ‘붓질’ 작품이 더 있다.

이배 작가는 파리에 근거지를 두고 30여년 동안 ‘숯’이라는 재료를 탐구해왔다. 흥미롭게도 그가 숯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은 한국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던 시절이 아니라 1990년 프랑스로 유학을 가서였다. 가벼운 주머니 사정 때문에 싼 그림 재료를 찾고 있다가 현지의 바비큐용 숯을 발견했다. 목탄 데생을 많이 했었기 때문에 그는 이것이 그림 재료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숯은 먹의 재료이기도 하니, 동아시아에서 온 그의 정체성과 잘 맞아떨어졌다. 훗날 유명 미술평론가가 되는 앙리 드바이유가 기자 시절 이배의 작업실을 찾았을 때 작가는 숯과 먹의 관계, 숯과 불의 관계에 대해 설명했다. 이에 매혹된 드바이유는 그의 기사를 썼고 전시도 주선했다.

작가의 이번 전시는 달집의 불이 숯을 낳고, 숯이 먹을 낳고, 먹이 수묵화의 여백을 낳고, 여백이 공기와 이어지고, 공기가 불로 이어지는 거대한 순환의 스토리를 지니고 있다. 작가는 전시장을 둘러보며 이렇게 덧붙였다.

“서예나 문인화를 하는 사람들은 자기 정신과 신체를 붓을 통해서 종이에다 일치시키는 연습을 하는데 그 과정이 중요한 것이지, 그 결과물이 아름다워야 된다는 목적이 있는 건 아니에요. 그래서 직관적으로 일필휘지하고 결과물을 수정하지 않죠. 반면에 서양미술에서는 연구하고 수정하고 뭔가 다른 걸 끌어들이고 만나게 하고 이런 게 풍성하죠. 우리는 세잔과 로스코를 이해하는데 서양인들은 팔대산인(중국 명대 말 청대 초 화가)나 겸재 정선을 이해하기 어려워하죠. 그걸 이해하는 틀을 근대화 시기에 우리가 제공해 줄 형편이 못 되었으니까요. 동양이 이제는 세계의 중심이 되어 가니까 동양미술을 이해하는 쪽이 점점 넓어지겠죠. 제 작품도 거기에 좀 역할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베네치아=문소영 기자 sym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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