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병주의역사저널] 정조의 안식처, 화성행궁
‘화성성역의궤’에 공사 전 과정 기록
지난 24일 수원시에 있는 화성행궁(華城行宮)이 119년 만에 완전히 복원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화성을 건설하면서, 자신이 임시로 머물 거처로 조성한 곳이다. 행궁은 왕이 임시로 머무르는 궁궐을 말하는데, 조선시대에는 국방의 요충지인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을 비롯하여 왕이 온천욕을 할 수 있는 온양에 행궁이 있었다.
낙남헌(落南軒)에서는 양로연(養老宴)과 함께 지역 인재를 선발하는 시험을 실시하고 이들에게 어사화(御賜花)를 하사하는 행사가 베풀어졌다. 득중정(得中亭)에서는 정조가 활쏘기 시범을 보이는 행사가 있었다. 과녁 가까이에서 활쏘기 모습을 구경하던 어린이들이 황급히 자리를 피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화성행궁에서 거행된 주요 행사는 김홍도가 주관하여 그림으로 남겼는데, 이 그림들은 조선후기 최고의 회화 작품으로 손꼽힌다.
19세기 말까지 원형을 유지했던 화성행궁은 1905년 우화관에 수원공립소학교가 들어서면서 점차 제 모습을 잃게 되었다. 1911년 봉수당이 자혜의원으로, 낙남헌은 수원군청으로, 북군영(北軍營)은 경찰서로 각각 변신하였다. 1923년 화성행궁 자리에는 경기도립병원이 세워졌고, 1989년까지 이곳에 있었다. 이후 역사 유적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수원시의 주요 인사를 중심으로 수원화성행궁 복원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본격적인 복원 사업이 단계적으로 진행되었다. 35년에 걸친 긴 시간이 소요되었고, 행궁의 중심 건물인 봉수당을 시작으로 482칸 건물의 복원이 2002년 일차적으로 이루어졌다. 행궁의 개방이 이루어지면서, 그 의미에 대해서는 대부분 공감하였지만, 행궁 담장이 너무 낮고 건물의 규모도 축소, 복원되었다는 비판도 있었다.
화성행궁의 복원에 중요한 기반을 제공한 자료는 정조의 명으로 편찬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이다. ‘화성성역의궤’에는 공사의 전 과정을 보여주는 기록들과 각 건물의 설계도를 비롯하여 크기와 두께 등이 매우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화성행궁 전도(全圖)까지 남아 있어서 행궁 건물의 규모와 배치 모습까지 확인할 수가 있다. 2002년 행궁이 개방된 이후 필자는 지금까지 1년에 2~3차례는 꼭 이곳을 찾고 있다. 학생들이나 일반인들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대표적인 역사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행궁이 복원되어 가면서 주변이 변화하는 모습들도 지켜보았다. 행궁의 정문인 신풍루(新豊樓)의 복원과 그 앞으로 넓은 광장이 조성된 장면, 우화관 자리에 있었던 신풍초등학교가 이전되는 과정에서 이를 반대하는 현수막, 초등학교 교정에 있었던 이승복 동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이제 우화관과 별주가 복원되면서 제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니, 조만간 행궁을 찾아보려고 한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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