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로 분쇄한 이미지, 아날로그 시공간을 채우다 [박미란의 속닥이는 그림들]

2024. 4. 26.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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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유연하게, 진동하는 이미지
자연의 추상적 이미지를 단위로 쪼개
아이패드로 소환…그림의 구성요소로
디지털 드로잉을 회화로 구현시켜내
텅 빈 캔버스, 가능성으로 가득한 상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형태소 넘나들며
끈끈히 결합되어 우주를 창조해 나가
화폭엔 이름 모를 ‘찰나의 균형’이 생겨

◆디지털 이미지 컴포넌트

“아이패드로 스케치할 때 구현하기 어려운 것은 즉흥적인 붓질뿐만 아니라 표면의 광택이나 질감이다. 어떤 재료를 써서 어느 정도 두께로 만들지, 물감의 표면이 보는 각도에 따라 어떻게 다를지는 가 보지 않은 미래를 상상하며 하는 수밖에 없다.”
박현정, ‘image(169)’(2024). 박현정 제공
2023년 2월2일 오전 10시34분의 박현정(37)이 남긴 글귀다. 작가노트에 분 단위 시간을 기록해 넣은 세세함은 어떠한 지독한 정확성이라기보다 작게 소분된 시간 단위의 조각을 수집하는 습관처럼 느껴진다. 마치 그의 화면 속 이미지들처럼, 형태소로 조각난 낱말들처럼 말이다.

그 자체로서 무엇의 최소 단위인 돌덩이 하나를 쪼개어 보다 작은 모래알과 먼지를 얻어내듯, 박현정은 자연물의 추상적 이미지를 수집하고 그것을 디지털 화면 위에서 분쇄하는 작업을 거듭해 왔다. 분할된 이미지의 형태소들, ‘컴포넌트’라고 명명된 이미지 단위들은 이후 부여된 일련번호 아래서 한 더미의 표본으로 정돈되었다. 이미지 표본들은 컴퓨터 모니터로, 아이패드 터치스크린 위로 소환되어 복수의 그림 속 구성요소로 활용됐다. 낱낱이 파편화된 이미지 표본들은 특정한 맥락이나 의미 없이 화면 위를 부유하는데, 한데 모여 다시 처음의 돌덩이가 되기보다 오롯이 운율 띤 모래알의 집합이기를 목표하는 것 같다.

서두의 고백에서처럼 아이패드 애플리케이션(앱)을 도구 삼아 이루어지는 그리기는 즉흥적이기보다 사려 깊고 촉각적이기보다 시각적이다. 전자는 언제든 조금 전의 과거로 되돌아가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고 후자는 손가락 끝으로 화면을 물들이는 데 쓰인 물감이 사실은 유리 아래 디지털 신호라서다. 그의 디지털 드로잉이 언제나 회화로의 이행을 목표 삼기 때문에, 스케치 단계의 그리기는 과거와 현재를 돌림노래같이 반복하면서도 회화로 구현될 미지의 미래에 대한 상상을 멈추지 않는다.
작품 앞에 선 박현정.
◆아날로그 회화의 시공간

이미지를 세공하는 일련의 작업은 디지털 화면 위에서 일어나지만 회화는 늘 현실의 아날로그 시공간 속에서 진행된다. “자연 현상처럼 이미지를 만들고 싶은지도 모르겠다”는 고백처럼 2020년 이후 박현정의 회화는 “중력에 의한, 물에 번지는 정도에 의한, 모필의 탄성과 물감의 점성에 의한 그리고 몸에 의한 예측하기 어려운 결과”를 수용하며 손으로 작업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우연한 효과들을 더욱 강조해 왔다.

에어브러시를 활용해 매끈한 질감을 구현하고, 재단된 마스킹 테이프를 사용해 베인 듯 섬세한 여백을 얻어내고, 그 공백을 가느다란 세필로 채색하는 일련의 과정은 아날로그 몸짓을 통하여 디지털 작업으로 만든 스케치 결과물에 최대한 가까이 도달하려는 최선의 노력이다. 한편 거꾸로 아이패드 드로잉의 과정 속에서 가상 브러시와 지우개의 미끄러진 오차들을 그대로 수용하여 화면 위에 남겨 두는 일은 디지털 세상과 아날로그 세상 간의 필연적인 연동을 의식한 행위이다.

드로잉 단계에서부터 우연성과 즉흥성을 의도적으로 수용하는 유연함은 “습관적으로 그리는 행위나 관습에 의해 고착된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인 동시에 완전히 기계적일 수 없는 이미지 창작의 과정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요인이다. 화면은 디지털에 기대기보다 그것을 아날로그 회화의 몸짓과 극적으로 대조함으로써 동시대 매체 환경 속에서 이미지를 마주하는 창작자의 관점과 고민을 함축한 결과물을 선보인다. 화면이 드러내는 것은 오직 색채와 형상으로 만들어낸 율동이며 그것이 자아내는 감각은 디지털의 매끈함과 아날로그의 요철을 교차적으로 환기하는 익숙하고도 낯선 정서이다.
박현정, ‘image(172)’(2024). 박현정 제공
◆영원히 유연하게, 진동하는 이미지

“새하얀 종이나 텅 빈 캔버스는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능성으로 가득한 상태다. … 모든 것은 변한다. 완성한 내 그림도 그랬으면 좋겠다. 찰나를 포착해서 영원을 만드는 게 아니라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는 이미지면 좋겠다.”

박현정이 2023년 11월29일 오후 5시2분에 쓴 글이다. 다시 분 단위를 의식한 기록은 온라인에 영구히 박제된, 그러나 언제든 편집 가능한 유동적 상태로 남겨진 단편의 순간들을 연상시킨다. 박현정의 화면 속 분쇄된 이미지 조각들은 개별적으로 어떠한 의미도 지니지 않으며 그로써 조합된 전체의 화면 또한 그렇다. 아무런 의미가 없어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형태소들은 유연한 몸으로 여러 화면을 넘나들며 저마다 층층이 쌓이고 끈끈히 결합되어 자신들의 우주를 창조해 간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탑 쌓기에 비유하곤 했다. 많은 수의 레이어로 근사하고 높이 쌓으려고 할수록 탑의 형태는 점점 예상 가능해진다. … 예상대로 결과가 나오면서는 회의가 들었는데, 리스크라고 생각했던 것이 새로운 길을 만드는 변수였다는 점과 나의 역량은 그런 변수를 마주할수록 강하게 발휘된다는 걸 알고 나서 그림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다.”

비어 있는 여백 위에서 조각난 이미지가 안착할 자리를 찾고, 각자의 색채를 부여하고, 이를 회화의 재료로 쌓아 올리는 작업 가운데 그가 발견하고자 하는 것은 이름 모를 찰나의 균형이다. 단지 하나의 상태에 고착되지 않으며, 수많은 방식으로 변용될 수 있는 여러 경우의 수를 화폭에 거듭 옮겨내는 일이다. “아름다운 결말은 수천 년이 지나도 그 자리를 지킬 석탑 같은 견고함이 아니”라는 믿음에 따라서다. 개별 화면은 연속된 시간선 가운데 잠시의 멈춤이며, 비선형적이고 입체적인 오늘의 디지털 시간선 위에서는 때로 되감기가 가능하다.

박현정은 홍익대학교 회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합정지구(2017, 서울), 아카이브 봄(2019, 서울), 학고재 디자인 프로젝트 스페이스(2019, 서울), YPC 스페이스(2023, 서울)에서 개인전을 개최했고 2023년 서울문화재단 금천예술공장에 입주해 작업했다. 2020년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의 ‘대기실 프로젝트: 전혀 예술적인, 엉성한 미술관’을 기획 및 진행했고 2017∼2018년 취미가의 기획전 ‘취미관’과 2015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연 전시 ‘굿즈’의 기획에 참여했다. 파이프갤러리(2024, 서울), 금천예술공장(2023, 서울), 갤러리 구조(2023, 서울), 아트스페이스3(2022, 서울), 학고재(2021, 서울), 아트스페이스 휴(2019, 파주), 일민미술관(2018, 서울)을 비롯해 다양한 국내외 기관이 개최한 단체전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박미란 큐레이터·미술이론 및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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