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미국 경제 질주하는데 유럽은 정체…무엇이 갈랐나

임근호/박종서 2024. 4. 26.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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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권력
폴 시어드 지음 / 이정훈 옮김
다산북스 / 388쪽|2만5000원
전 S&P글로벌 부회장 분석
경기 부양할 때 골든타임 중요
유럽 경제가 美보다 약해진 건
소극적 재정 정책도 영향 미쳐
"인플레이션 부담되지 않는다면
돈 풀어서 소비와 투자 늘려야"
일각선 기축통화국의 해법 지적
Getty Images Bank


돈이 흐르지 않으면 경제는 쉽게 위축된다. 소비자들이 지갑을 닫아버리면 기업 생산에 타격을 주고 정부도 운신의 폭이 줄어든다. 민간의 활력이 떨어지면 세수도 줄어든다. 어떻게 해야 할까. <돈의 권력>은 정부가 돈을 팍팍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제가 위축되는 길로 들어설 것 같으면 나랏빚을 늘려서라도 돈이 흐르게 하라는 얘기다.

책은 S&P글로벌에서 수석이코노미스트와 부회장을 지낸 폴 시어드가 썼다. 이미 100여 년 전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한 얘기를 그냥 되풀이하는 건 아니다. 저자는 돈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낸다. 재정 및 통화 정책을 제대로 펴려면 돈이란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돈만큼 많은 오해를 받는 것도 없다. 심지어 경제학자 중에서도 돈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화폐금융론 교과서는 은행이 예금 가운데 일부를 대출하면서 시중 통화량이 늘어난다고 설명한다. 사실이 아니다. 은행은 예금에 든 돈을 빌려주는 게 아니다. A라는 사람이 돈을 빌리면 그 사람의 계좌에 해당 금액의 숫자를 찍어줄 뿐이다. 그러면 새로운 돈이 생긴다. 저자는 “현대에 만들어지는 돈의 대부분은 키보드에서 숫자를 입력하는 것만으로 생겨난다”고 했다.

물론 이렇게 생겨난 돈은 은행 밖으로 빠져나갈 수 없다. 해당 은행이 만든 돈일 뿐이기 때문이다. 외부로 보내려면 다른 형태를 취해야 한다. 바로 정부가 발행한 화폐인 현금과 지급준비금이다. 현금은 우리가 현금자동입출금기(ATM)에서 돈을 인출할 때, 지급준비금은 우리가 계좌에 든 돈을 다른 은행으로 이체할 때 쓰인다. 은행이 보유한 현금과 지급준비금은 고객의 계좌에 적힌 금액의 일부에 불과하지만 사람들이 한꺼번에 돈을 인출하거나 이체하지 않기 때문에 평상시엔 아무 문제가 없다.

책은 중앙은행이 돈을 만들어내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미국 중앙은행(Fed)이 양적완화(QE)를 시행하며 수조달러의 돈(지급준비금)을 민간 금융회사에 주입했을 때 이 돈은 그저 컴퓨터 키보드를 누르는 것만으로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에서 출발한 것이 논란이 많은 현대화폐이론(MMT)이다. 정부는 간단히 화폐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에 세금 징수와 국채 발행에 의존하지 않고도 재정 지출을 위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업과 같은 경제 문제는 정부 지출 부족으로 발생하며 정부는 적극적인 재정 지출로 이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MMT의 주장이다.

저자도 MMT와 비슷한 주장을 편다. 높은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돈을 풀어 소비와 투자를 늘리고, 경제 부양의 골든타임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는 재정 적자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정부의 적자 예산으로 창출된 돈(부채)은 국민이 보유하는 것이며 이 돈은 달리 갈 곳이 없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은 후 미국과 유럽의 위상이 달라진 점도 여기에 있다고 책은 지적한다. 미국은 양적완화 등으로 돈을 왕창 풀었다. 대규모 재정 적자도 감수했다. 유럽도 돈을 풀긴 했지만 미국만큼 적극적이진 않았다. 화폐 창출을 주저했고 독일의 반대로 적자 재정도 마음껏 활용하지 못했다. 1999년 도입한 유로화가 오히려 족쇄가 됐다고 저자는 본다.

저자는 MMT의 논리는 받아들이면서도 일반적인 MMT주의자들과는 다른 입장에 선다. 보통 MMT주의자들은 정치적 성향이 왼쪽으로 기울어 있다. 우파 경제 전문가가 MMT의 논리를 차용했다는 점이 눈에 띄는 책이다. 저자의 주장은 정부가 필요한 만큼 빚을 내도 된다는 게 아니라 돈을 써야 하는 시점이 다가왔을 때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증세와 국채 발행 없이 재정 지출을 늘릴 수 있다는 저자의 말은 과격하게 들린다. 기축통화국인 미국 이야기라는 점을 감안해야겠지만 MMT는 많은 경제학자가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지적해 왔다. ‘제로금리’ 시절에 관심을 받던 얘기다. 인플레이션이 문제가 된 요즘 MMT를 옹호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일단 소비가 늘어나면 가계든 정부든 통제가 되지 않는다. 저자의 주장이 일견 설득력 있게 보이면서도 도박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게다가 기축통화국이 아닌 나라가 호기롭게 따라 하기도 어렵다. 남미와 유럽 일부 나라가 나랏돈 펑펑 쓰다가 말로가 어떻게 됐나. 그 나라들이 한 것이 MMT와 많이 다른가.

임근호/박종서 기자 eig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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