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녀부터 독립운동가까지···윤석남 화백, 여성의 우정을 그리다 [작가의 아틀리에]

서지혜 기자 2024. 4. 26. 17:5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윤석남 화백 화성 작업실·수장고
불혹에 자아 찾기 위해 든 붓···"그림은 내가 살아있는 이유"
유관순 등 70여명 女독립운동가 연작···"100점 채우고파"
유기견 돌보는 할머니 사연에 5년여간 1025마리 강아지 조각
[서울경제]

“나는 나밖에 모르는 사람이에요.”

이달 17일 경기 화성시 융건릉 인근에 위치한 윤석남(85) 작가의 작업실. 이날 인터뷰를 위해 서울경제신문과 만난 작가는 자신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기적인 사람,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이날 두 시간가량 이어진 인터뷰에서 기자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2층으로 마련된 작가의 작업실은 한쪽은 작업 공간, 한쪽은 커다란 수장고로 사용되는데 두 건물이 모두 ‘저택’이라 할 만큼 층고가 높고 웅장했다. 작업실에는 작가의 대표작 ‘여성 독립운동가 초상’ 두어 점이 세워져 있었고 책상에는 또 다른 여성 독립운동가 초상 제작을 위한 사전 작업인 드로잉 작품이 놓여져 있었다.

작업실 한편에 마련된 커다란 소파에 앉았다. 올해는 윤석남이 전업 작가로 일을 시작한 지 45년째 되는 해다. 감회를 묻자 작가는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날을 회상했다. 작가는 비슷한 또래의 다른 여성 작가들보다 늦은 만 40세에 처음 그림을 시작했다. 평생 화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었지만 마흔 이전에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결혼 전에는 형제들의 학업 뒷바라지를 해야 했고 결혼 후에는 밥벌이를 하며 자식을 키워야 했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전후 한국 여성의 모습이다. 작가는 “마흔이 될 때까지 시어머니와 함께 단칸방에 살았는데 남편이 주는 월급을 안 쓰고 모아서 10평부터 시작해서 계속 집을 넓혔다”며 “마흔쯤 됐을 때 꽤 좋은 아파트를 샀다”고 말했다.

45년 전 4월···윤석남, 화가가 되다
윤석남이 자신의 작업실에서 한 여성 독립운동가의 초상을 그리고 있다. 사진=서지혜 기자
윤석남이 자신의 작업실에서 한 여성 독립운동가의 초상을 그리고 있다. 사진=서지혜 기자
윤석남이 자신의 작업실에서 한 여성 독립운동가의 초상을 그리고 있다. 사진=서지혜 기자
윤석남이 자신의 작업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서지혜 기자

1979년 4월 25일. 윤석남은 이날을 또렷이 기억한다. 그날 작가는 월급봉투를 들고 나가 화구를 사왔다. 그는 “이제 가정을 위해 이만큼 살았으니 나를 위해 살겠다”며 남편에게 그림을 그리겠다고 선언했다. 작업실은 애써 마련한 아파트의 방 한 칸. 작가가 자신을 ‘이기적’이라고 소개한 이유를 짐작할 만한 대목이다. 어머니·아내는 꿈을 접고 희생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지던 시대에 돌연 ‘나의 삶을 살겠다’고 선언했으니 세상의 시선이 곱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내 부친은 소설가 윤백남으로 예술가의 피를 물려 받았고, 남편은 가부장제와 거리가 멀어서 기꺼이 내 꿈을 지지해줬다”며 “가난했지만 좋은 운을 타고났다”고 말했다.

시작은 취미에 가까웠다. 미술을 전공하기 않았기 때문에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첫 번째 그림은 ‘친정 엄마’ 다음 그림은 친구들 등 지인의 모습을 그리는 것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유명해지면 좋지만 유명해지는 게 목표는 아니었다”며 “그냥 좋아하는 일을 해야만 했다”고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홍익대 미술학부를 졸업한 한 친구가 전시를 제안했다. 서울미술회관(현 아르코미술관)에서 진행할 자신의 개인전 공간을 분리해 윤석남에게 자리를 내준 것. 그게 그의 첫 번째 전시다. 처음으로 개인전을 연 아마추어 작가였지만 그는 지금처럼 그때도 과감하고 화통했다. 어머니와 친구들의 모습을 100호, 120호에 달하는 커다란 캔버스에 그려 전시한 것. 추상화 일색이던 당시 미술계에서 이 전시는 꽤 화제가 됐다. 그렇게 그는 미술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윤석남이 그린 ‘어머니-3 요조숙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친구에서 여성 독립운동가까지···‘자매애’를 그리다

작가의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여성’과 ‘자매애’다. 자신이 마흔 넘어 꿈을 이룬 ‘한국 여성’인데다 첫 번째 전시가 기꺼이 자신의 전시 공간을 내준 한 친구의 ‘자매애(우정)’였으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 작가는 오랜 시간 해녀, 여성 사업가 등 수많은 여성의 삶을 캔버스에 그렸다. 그러다 탄생한 작업이 바로 ‘여성 독립운동가 초상화’ 연작이다. 작가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재해석한다. 우선 그림을 그리기 전 여성 독립운동가의 사진과 1~2쪽 정도에 불과한 문헌을 읽는다. 이 자료와 흑백사진을 참고해 드로잉을 한 후에는 색을 칠한다. 흑백으로 남아 있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에게 채색된 옷을 입히는 것. 이때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진다. 작가는 “아주 작은 사진을 보고 그 당시의 의상을 상상해본다”며 “일반인들은 그냥 무채색 옷만 입었을 테니 색이 화려하지는 않다”고 말했다.

작가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자아’를 찾기 위해 독립운동에 나섰다고 주장한다. “여성 독립운동가가 줏대 있는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나라가 있고 사회가 있는데 여성의 의무는 ‘가정이잖아요’.” 그는 “독립운동이 당시 여성들에게 ‘나라를 찾는 일’일 뿐 아니라 ‘나를 찾는 일’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꽤 설득력 있는 해석이다.

윤석남, 차보석 초상, 2023, 한지에 채색, 210x94㎝. 사진 제공=대구미술관
임봉선 초상, 사진 제공=대구미술관

작품 속 여성들은 우리도 한 번쯤 들어본 이들이다. 유관순, 채공녀 강주룡, 권기옥, 김마리아, 남자현, 박자혜, 안경신···.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웅장해지는 총 70여 명의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작가의 작업실 옆에 위치한 또 다른 커다란 건물인 수장고에서 동지들과 함께 다른 동지들을 기다리고 있다. 작가는 기자에게 수장고를 소개하면서 “30점 정도를 더 그려서 100점을 완성하는 게 목표”라며 “아흔이 되면 완성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여성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사는 1025마리의 유기견

수장고에는 또 다른 특별한 가족이 있다. 바로 유기견들이다. 한두 마리가 아니다. 무려 1000마리가 넘는 유기견이 이곳에서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 작가의 또 다른 대표작 ‘1025 사람과 사람 없이’ 시리즈다. 작가는 2003년 신문에서 ‘유기견 1025마리를 혼자 돌보고 있는 이애신 할머니’의 기사를 읽은 후 1025 연작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는 “강아지를 버릴 정도로 이기적인 사람이 이 세상에 이렇게 많다는 사실과 그들을 홀로 돌볼 정도로 이타적인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며 “직접 이애신 할머니를 찾아갔는데 그 모습은 더욱 충격적이었다”고 전했다. 할머니는 낡은 컨테이너 건물에서 1025마리의 유기견과 생활하고 있었다. 작가는 이날부터 5년여간 신들린 듯 유기견을 만들었다. 나무를 다듬고 그 위에 먹으로 유기견의 모습을 그리는 작업을 어떤 날은 10점, 어떤 날은 3점씩 매일 했다. 작가는 기자에게 이 작품을 ‘조각이 아닌 회화’라고 소개했다. 그는 “조각은 나무를 실제로 깎고 다듬는 작업이 들어가야 하는데 자신의 작업은 그저 기계로 자르기만 하면 된다”는 것. 참으로 겸손한 설명이다.

여성 독립운동가의 초상 작품이 가득 차 있는 윤석남 작가의 수장고. 사진=서지혜 기자
여성 독립운동가의 초상 작품이 가득 차 있는 윤석남 작가의 수장고. 사진=서지혜 기자
작가의 대표작 ‘1025, 사람과 사람 없이’ 시리즈의 유기견 작품 모습. 사진=서지혜 기자
작가의 대표작 ‘1025, 사람과 사람 없이’ 시리즈의 유기견 작품 모습. 사진=서지혜 기자
대표작 ‘1025, 사람과 사람 없이’ 시리즈의 유기견 작품 속에서 작가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서지혜 기자
대표작 ‘1025, 사람과 사람 없이’ 시리즈의 유기견 작품 속에서 작가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서지혜 기자

미술을 전공한 일도 없는 늦깎이 작가이지만 그는 ‘대가’가 됐다. 영국의 테이트모던미술관, 대만 타이베이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등 전 세계 유수의 미술관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지난 해 제23회 이인성미술상을 수상한 후에는 더욱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올해는 학고재, 테오 갤러리 등 상업 갤러리에서 전시가 열릴 예정이며 하반기에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단체전에도 이름을 올린다. 화가가 되기 전에도, 화가가 된 후에도 작가의 시선은 언제나 타인과 이웃을 향해 있다. 그리고 그 시선 끝의 모습을 즐거워하며 그린다. 작가에게 그림이 어떤 의미일까. 작가는 “내가 살아 있는 이유”라고 했다. 또한 “사람이 태어나는 데는 목적이 없다. 살아가면서 내가 왜 사는지 ‘발견’이 아니라 ‘발명’을 해야 한다”며 “나에게는 그림이 발명인 셈”이라고 덧붙였다.

서지혜 기자 wise@sedaily.com

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