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한 사람이 있는가?[요즘 어른의 관계맺기](16)

2024. 4. 26.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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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사람들은 누구나 내게 행운과 불운을 함께 선사했다. 행운만을 안겨준 사람도, 불운만 겪게 한 사람도 없다. 늘 행운과 불운, 두 얼굴로 내 앞에 나타났다.

17년간의 회사생활 가운데 나의 가장 찬란했던 시기를 꼽으라면 김우중 회장을 모시던 기간이다. 선망해왔던 분을 가까이서 모시고 배울 기회라니. 그것도 과장 초임 시절 젊디젊은 나이에 말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그때 나는 그분의 연설을 쓸 만큼 충분히 준비돼 있지 않았다. 한마디로 실력이 부족했다. 그 부족분을 메워주는 사람이 있었으니, 나의 부서장이었다.

위기서 건져주고 인생 지도 바꾼 부서장

그는 나보다 고작 두 살 위였지만, 실력은 천 길 차이였다. 내가 쓰는 모든 글은 그 앞에서 쓰레기였다. 나에게 이것 추가하고 저것 고치라며 지시하고 주문하다가 성에 차지 않았는지 결국은 자기가 쓰는 게 다반사였다. 그가 쓴 글을 보면 언제나 맞았고, 완벽했다. 나는 하루하루 자신감을 잃어갔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을 해야 하나 불안했고, 그것을 잘할 수 있을지 두려웠다. 급기야 우울증 뒤로 숨어들어, 회사에 사표를 냈다.

아내에게 저간의 사정을 말할 수 없었다. 그저 사업을 하겠다고 둘러댔다. 그렇게 회사 일도 감당하지 못해 도망 나온 처지에 사업이라니. 걸음마도 못 하는 아이가 뛰어가겠다는 격이었다. 몇 달 고민했지만 도저히 길이 보이지 않았고, 서른 중반에 삶이 통째로 거꾸러질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회사 안이 전쟁터라면 밖은 지옥이라더니 정말 그랬다. 그렇게 초조한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나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그 부서장은 다시 돌아오라고 제안했고, 나는 못 이기는 척 회사에 복귀했다. 하지만 복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회장 비서실이 문을 닫았다.

다시 위기의 시간이 왔고, 거기서 나를 건져준 사람도 바로 그 부서장이다. 자기에게 들어온 청와대에서 근무할 기회를 나에게 넘겨준 것이다. 그는 청와대에 들어와 김대중 대통령 경제 부문 연설을 써달라는 제안을 받고, 자기는 힘들지만 쓸 만한 사람이 있다며 나를 추천했다. 당시 그는 회사가 문을 닫자, 독립해서 출판사를 차린 상태였다. 결과적으로 그는 나를 수렁에서 두 번이나 건져줬을 뿐 아니라 내 인생 지도를 바꿔놓았다.

지난해 말까지 KBS1 라디오 <강원국의 지금 이 사람>을 진행했다. 그때 만난 사람들 곁에는 늘 자신의 운명을 바꾼 한 사람이 있었다. 최재천 선생은 서울의대를 두 번이나 떨어지고 낙담하고 있을 때 서울대에서 동물학과에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가 빈칸으로 놔뒀던 2지망 란에 고3 담임 선생님이 ‘동물학과’를 써넣은 것이었다. 마음에도 없는 학과에 들어가자 공부는 늘 뒷전이었다. 그렇게 대학 시절 3년을 허송세월하다 졸업반을 맞은 최 선생은 이때 그를 찾아온 한 사람을 만났다. 한국의 하루살이를 채집하러 온 미국인 교수 조지 에드먼즈다.

최 선생은 에드먼즈 교수의 조수로 일하며 일주일 동안 전국의 개울물을 뒤지고 다녔고, 그와의 인연을 계기로 유학길에 오르며 오늘날의 세계적인 통섭학자 ‘최재천’이 탄생했다. 한 미국인 교수가 그에게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만들어준 것이다. 그렇다면 에드먼즈 교수는 어떻게 최재천 선생을 찾게 됐는가. 최 선생이 대학 3년 동안 공부와 담쌓고 살면서도 딱 한 과목 열심히 들은 강의가 있었는데, 그 강의를 했던 교수님이 미국에 교환교수로 가서 한국에 연구하러 가는 미국인 교수에게 ‘최재천 학생’을 추천한 것이다.

세계적인 교육 공학자인 미국 스탠퍼드대 부학장 폴 김 교수도 한 사람을 만나 인생이 바뀐 사례다. 그는 인천에서 고등학교에 다닐 때까지 하위 1%를 벗어나지 못했다. 반원 60명 가운데 그는 늘 58등을 도맡았다. 59등, 60등 하는 친구들은 운동선수였으니, 그는 꼴찌나 다름없었다. 우리나라에선 더 이상 희망이 없었던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부모님을 졸라 미국행 비행기 표를 끊었다. 미국에서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지만, 서툰 영어 탓에 유학 생활도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첫 학기 첫 수강 과목에서 좋은 점수를 받으며 그의 인생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클래식 음악에 관한 에세이를 써오라는 과제를 제대로 제출하지 못한 폴 김에게 담당 교수는 “이 수업은 너의 영어 실력이 아닌 감수성을 평가하는 과목”이라며 한글로 감상문을 써올 것을 요구했다. 그렇게 폴 김이 써온 한글 에세이를 놓고, 한영사전과 씨름하며 그 내용을 파악한 그 담당 교수는 ‘곡 분석력이 뛰어나다’며 그에게 최고점을 줬고, 폴 김은 말할 수 없는 희열을 경험한다. 이는 폴 김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인정받은 순간이었다. 이런 성취감은 그가 교육에서 일방적인 티칭(가르침)이 아닌 코칭(조언이나 지도)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 계기가 됐다.

나태주 선생도 실연당한 순간 시인 돼

‘풀꽃 시인’ 나태주 선생도 예외가 아니다. 그의 나이 스물네 살,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던 그는 같은 학교 동료 선생님을 짝사랑한다. 사랑하는 감정이 마구 부풀어 올라 심장이 터질 것 같아 구애를 했지만 단칼에 거절당한다. 실연의 상처가 너무 깊었다. 상심의 나날을 보내며 그 마음을 시로 옮겼다. 그렇게 쓴 시가 1971년 신춘문예에 당선된 ‘대숲 아래서’다. “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 쓰고/ 어젯밤 꿈엔 너를 만나 쓰러져 울었다/ 자고 나니 눈두덩엔 메마른 눈물자죽/ 문을 여니 산골엔 실비단 안개”라는 내용이다. 이후 그는 한 여자로부터 버림받는 순간 시인이 됐다고 술회한다.

43년 3개월간 초등학교 선생님을 할 때도 그랬다. 교단에 서야 하는데, 말을 듣지 않는 어린 제자들이 미워서 어떻게든 예쁘게 보려고 쓴 시가 그 유명한 ‘풀꽃’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풀꽃 3’도 마찬가지다. 선생께서는 일찍이 며느리를 잃었는데, 엄마 없이 살아갈 손주들이 가여워서 쓴 시가 바로 이 시다. “기죽지 말고 살아봐/ 꽃 피워봐/ 참 좋아” 시인은 살기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시를 썼다고 하지만, 시를 쓰게 하고, 그를 시인으로 만든 건 결국 사람이었다.

앞서 부서장 추천으로 청와대에 들어가 8년을 지내고 나와 나는 작가의 길을 걷고 있다. 그와 한솥밥을 먹다 헤어진 지 25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분은 그새 열정적으로 출판 일을 해왔고 일가를 이루었다. 그리고 최근 나는 그의 출판사에서 <강원국의 인생 공부>란 책을 냈다. 이제는 출판사 대표와 저자라는 관계로 다시 만난 것이다.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난다. 오늘 만나는 그 사람이 당신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 당신에겐 그 한 사람이 있는가. 그건 누구인가.

강원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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