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 순경 총기 난사’ 후 42년간 슬펐던 의령의 봄...첫 위령제로 혼 달래

김준호 기자 2024. 4. 26.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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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사실 저 고향 궁류에 오는 게 무서웠어요. 엄마와의 추억이 많았던 이곳에 오게 되면 내가 무너질까 봐, 살아갈 힘이 없어질까 봐, 너무 무서워서 와 보지도 못했어요. 돌이켜 보면 부모 없는 세상에서 기댈 곳 없이 먹고 살기 바빠서 엄마를 마음껏 그리워하지도 못했던 것 같아요.”

26일 오전 10시 경남 의령군 궁류면 평촌리 ‘의령 4·26 추모공원’. 의령 출신 전도연(62)씨가 42년 전 벌어졌던 ‘우 순경 총기 난사 사건’ 때 잃은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비교적 차분했던 현장은 금세 눈물바다가 됐다.

26일 오전 경남 의령군 궁류면 평촌리 의령4·26추모공원에서 열린 일명 '우순경 총기 사건' 위령제에서 추모편지를 낭독한 전도연(62)씨가 위령탑 비문을 만지며 숨진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있다. /의령군

전씨를 비롯한 의령군 주민에게는 이날은 슬프면서도 의미가 큰 날이었다. 42년 전 발생한 ‘우 순경 총기 사건’ 희생자의 한을 달래는 위령제가 처음으로 열렸기 때문이다. 당시 스무살이던 전씨도 그날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었다.

“엄마, 42년 동안 벚꽃 피는 4월은 저에게 슬픈 봄이었는데, 이제는 4월이 기다려질 것 같아요. 엄마, 내년 4월에도 보러올게요. 여기 따뜻한 곳에서 엄마 좋아하시는 꽃 보며 편히 쉬고 계세요.”

사랑하는 가족을 억울하게 잃고도 가슴 깊이 묻어둬야 했던 가족들은 42년 만에야 마음껏 울고 한탄했다.

26일 오전 경남 의령군 궁류면 평촌리 의령4·26추모공원에서 열린 일명 '우순경 총기 사건'의 위령제에서 오태완 군수를 비롯한 내빈, 주민들이 눈물을 훔치고 있다. /의령군

◇우 순경 8시간 광기에 죄 없는 주민 56명 희생

1982년 4월 26일 봄기운으로 가득했던 밤. 의령군 서북부 산간 궁류면 일대는 이튿날 새벽까지 총성이 울려 퍼졌다. 의령경찰서 궁류지서 소속 순경 우범곤(27)이 당시 근무하던 궁류지서 무기고에서 총과 수류탄을 들고 나와 마을 주민을 향해 무차별 난사하면서다. 8시간 동안 이어진 우씨의 광기에 죄 없는 주민 56명이 숨지고, 34명이 다쳤다. 우범곤 역시 수류탄으로 자폭해 현장에서 사망했다. 우씨의 범행 동기는 우씨 가슴에 앉은 파리를 잡기 위해 동거녀가 가슴을 때리면서 발생한 다툼 때문으로 전해진다. 우씨에 의해 총상을 입은 동거녀가 이튿날 숨지기 전까지 이 같은 내용을 진술했다. 이날 사건은 단시간 최다 살인으로 기네스북에도 올랐다. 하지만, 주민 수십명이 희생된 이 사건은 당시 정권이 보도를 통제하면서 알려지지 않았다. 의령 안에서도 사건을 입 밖으로 내뱉는 걸 금기시했다. “한 마을 이웃집마다 제사 올리는 날이 같아요. 그냥 조용히 제사 지내는 게 전부였습니다.” 희생자 유족들이 한숨과 함께 지난 세월을 돌이키며 한탄했다.

◇“볕 잘 들고 사람 많은 곳에 꽃 한 송이 올렸으면...”

26일 오전 경남 의령군 궁류면 평촌리 의령4·26추모공원에서 열린 일명 '우순경 총기 사건'의 위령제에서 희생자 가족과 주민들이 위령탑에 헌화하고 묵념하고 있다. /의령=김준호 기자

우범곤에 의해 당시 19살의 아들을 잃고 유가족이 된 전병태씨는 지난 2018년 희생자들의 억울한 죽음을 알리고 슬픔을 나눌 수 있는 추모비(위령비) 건립을 위해 나섰다. 주민 3500여 명의 동의를 받아 경남도에 민원을 넣는 등 희생자를 추모해야 한다는 분위기를 지역에 확산시켰다. 그러다 2021년 의령군수로 취임한 오태완 의령군수가 당시 김부겸 국무총리를 만나 추모공원 건립을 직접 건의하면서 전환점을 맞는다. 오 군수는 “김부겸 총리와는 ‘형, 동생’하는 인연이 있었다”면서 “총리에게 ‘경찰은 공권력의 상징인데 그런 경찰이 벌인 만행인 만큼 국가가 책임이 있다. 그래서 국비로 이들의 넋을 위로해야 한다’고 말했다. 거기에 공감해준 것 같다”고 말했다.

이듬해 행정안전부는 특별교부세 7억원을 지원했다. 의령군은 여기에 도비와 군비 등을 더해 총 30억원을 들여 추모공원과 위령탑 조성에 나섰다. 의령군은 추모공원 장소부터 위령탑 디자인까지 희생자 유족들이 선택할 수 있게 했다. 유족들이 원한 것은 단순했다고 한다. “볕 잘 들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면 됩니다.”

현재 공사가 한창인 추모공원은 사건이 발생한 날을 기억하고자 ‘의령 4·26 추모공원’으로 부르기로 했다. 위령탑은 석재 벽으로 둘러싸인 모양에 하얀 새를 두 손으로 날려 보내는 형상으로 조성됐다. ‘하얀 새’는 희생자들의 넋을 좋은 곳으로 날려 보낸다는 의미이고, ‘두 손’은 희생자들의 넋을 승화시키고자 하는 유족들의 간절함을 표현했다. 위령탑 비문에는 희생자 이름과 사건의 경위, 건립취지문을 새겼다.

◇42년 만 첫 위령제...“특별법 제정 등 명예 회복 위한 지원 계속”

오태완 의령군수 등이 26일 오전 경남 의령군 궁류면 평촌리 의령4·26추모공원에서 열린 일명 '우순경 총기 사건'의 위령제에서 묵념하고 있다. /연합뉴스

42년 만의 첫 위령제는 유족의 뜻을 받들어 완공된 위령탑 앞에서 열렸다. 희생자 가족을 비롯해 의령군민 등 1500여 명이 모여 엄숙하게 진행됐다.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제례를 지내고, 헌화의 시간도 가졌다.

소리꾼 장사익 선생의 추모공연도 마련됐다. 마지막 곡인 ‘아리랑’을 다 같이 따라 부를 때는 마치 한을 토해내는 듯한 모습이었다. 42년 전 우범곤에 의해 남편을 잃고, 자신도 총상을 입었던 배병순(92) 할머니는 다친 몸으로 7명의 자녀를 홀로 키워야 했다고 한다. 배 할머니는 “그간의 서러움을 말로 다 못한다. 지금 쌓인 한이 내가 눈을 감으면 잊힐까, 쉽게 잊히지 않을 것 같다”면서 “볕 잘 들고 많은 사람이 보고 갈 수 있는 자리에 꽃 한 송이 놓을 곳 마련해달라는 청이 이제야 이뤄졌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오태완 의령군수는 “억장 무너지는 긴 세월을 참아온 유족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지난날의 아픈 역사를 이제 매듭짓고, 아픔과 그리움을 넘어 희망을 이야기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며 “억울하게 고통받은 분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명예를 회복해주기 위해 특별법 제정 등 지원을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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