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들이 원전에 ‘김’ 던진 까닭은?

서윤덕 2024. 4. 26.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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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전에 '김' 던진 농민들

지난 22일 오후 전남 영광군 한빛원전.

굳게 닫힌 정문을 사이에 두고 농민 10여 명과 청원경찰들이 대치합니다. 농민들이 상자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정문으로 던집니다. 한 농민은 "다시 가져가라"며 큰소리도 칩니다.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김' 몇 장이 바람에 날립니다.


밥상에 올라야 할 김이 뜬금없이 원전에 나타난 이유, 그보다 한 주 전인 지난 16일 전북 고창군의 한 마을회관에서 있었던 일 때문입니다.

한국수력원자력(이하 한수원) 한빛본부 직원들은 그날 오전 마을회관에서 주민 10여 명에게 한빛원전 1, 2호기를 10년 더 가동하는 이른바 '수명연장' 필요성을 1시간가량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김, 키친타올이 들어 있는 상자와 장바구니를 주민들에게 줬습니다. 상자에는 '한빛 1, 2호기가 10년 더 함께합니다'라는 문구의 스티커가 붙어 있었습니다.

사진제공 : 고창군농민회


또 참석한 주민들에게 원전을 추가 가동했을 때 주변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방사선환경영향평가서 초안'을 열람했다는 서명도 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민이 반대하자, 열람부 서류를 찢어 버리고는 도로 가져가기도 했습니다.

사진제공 : 고창군농민회


이후 전북 고창군농민회와 전남 영광군농민회 등은 한빛원전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한수원을 규탄했습니다. 원전에 김을 던진 바로 그날입니다.

농민회는 적어도 고창군 10여 개 마을에서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며, 한수원이 원전 수명연장에 대한 찬성을 유도하려고 주민들에게 '선물 공세'를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절차 위반 등도 제기했습니다.

그리고 선물을 다시 가져가라며 한빛원전으로 걸어갔습니다. 청원경찰들이 급하게 정문을 닫으면서 대치가 시작됩니다.

농민들이 원전에 '김'을 던진 까닭입니다.

■ 농민회 "문제는 선물만이 아니다…원칙 위반"

사실 농민회가 한수원을 규탄한 배경, 단순히 '선물 공세'라는 단어만으로 정리할 수 없습니다.

지난 16일 당시 고창군에서는 원전 수명연장 절차인 '방사선환경영향평가서 초안 공람'이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수명연장에 대한 원전 인근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겁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칩니다.

1. 한수원이 한빛원전 1, 2호기를 10년 더 운영할 때 주변 환경 등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해 방사선환경영향평가서 초안을 작성하고 원전 인근 지자체에 제출합니다.

2. 지자체는 주민들이 초안을 볼 수 있게 주민센터 등을 공람 장소로 공고합니다.

3. 주민들은 공람 장소나 한수원 누리집에서 초안을 보고, 원하면 열람했다는 서명을 한 뒤 그에 대한 의견을 지자체에 낼 수 있습니다.

4. 지자체는 이 의견을 모아 한수원에 전달합니다.

원전 수명연장과 관련해 주민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는 초안 공람과 공청회뿐입니다. 기술적으로 안전을 검증하는 절차만큼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수원이 지자체에 제출한 초안은 300쪽이 넘고 전문용어가 많습니다. 이런 이유 등으로 전북 고창과 부안을 비롯한 원전 인근 지자체들은 공람을 보류하고 한수원에 보완을 요청했습니다. 주민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초안을 더 쉽게 정리해달라는 겁니다.

한수원이 답변서를 보냈지만, 지자체들은 보완이 안 됐다며 재보완을 요청했습니다. 몇 차례 서류가 오가면서 한수원은 공람을 보류한 지자체에 행정소송을 제기하려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줄다리가 이어지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여차저차 공람은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갈등의 불씨를 안고 있었고 '김' 선물 논란이 불거졌습니다.

농민회는 지난 22일 기자회견에서 "법적으로 지자체가 공람을 진행하게 돼 있는 데도 한수원 직원들이 마을을 돌면서 선물을 주며 열람부에 서명을 종용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전북 고창군이 공고한 초안 열람장소는 군청과 13개 주민센터인데 마을회관에서 열람한 점도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

■ 한수원 "사전 협의하고 방문…김은 '홍보 물품'일 뿐"

한수원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반박했습니다. 거동이 불편한 주민 등을 위해 '찾아가는 공람장'을 진행했다는 겁니다.

한수원 한빛본부 측은 "보다 많은 주민에게 초안 내용을 알리기 위해 고창군과 사전 협의해 운영한 것이며, 이장들에게도 따로 연락해 허락한 경우에만 방문했다"고 밝혔습니다.

또 "열람부에 서명을 강요한 사례는 없고 김이 든 상자는 1만 원 상당으로 공람과는 무관한 단순 홍보 물품"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고창군도 "한빛본부와 협의한 게 맞다."라며 "초안 열람을 주민 몇 명 이상이 해야 한다는 규정도 없어 열람률을 높여야 할 이유도 없어 보인다"고 설명했습니다.

한빛원전


하지만 갈등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농민회는 "한수원이 주민 이해를 돕기 위해 찾아갔다고 하는데 공람 전 내용을 더 쉽게 해달라는 지자체 보완 요청에는 왜 무성의하게 대응했느냐"며 "엉터리 공람을 용납할 수 없다"고 강력 투쟁을 예고했습니다. 환경단체도 "절차적으로 문제 소지가 있어 법률 검토를 거쳐 감사원 감사를 청구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앞으로는 한수원이 한빛원전 1, 2호기 수명연장에 대한 주민 의견을 직접 듣는 공청회도 열립니다. 타오르기 시작한 갈등의 불씨는 쉽게 꺼지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연관 기사] 한국수력원자력 김 세트 제공…“선심성 선물”-“홍보 물품”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7945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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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윤덕 기자 (duck@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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