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넘게 줬더니…방위비분담금이 권리인 줄 알아요

권혁철 기자 2024. 4. 26.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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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철의 안 보이는 안보]
지난 2월14일(현지시각)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이자 전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노스찰스턴에서 진행된 공화당 대선 예비선거에서 유세 중 손짓을 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

영화 ‘부당거래’에서 배우 류승범이 했던 유명한 대사다. 사회 생활하다 보면, 좋은 뜻으로 형편이 어려운 상대를 도왔더니 나중에는 상대가 당연한 권리처럼 요구하는 황당한 경우를 가끔 겪는다. 개인 관계뿐만 아니라 국가 관계에서도 이런 상황이 생긴다. 한국과 미국이 주고받는 주한미군 방위비분담금이 그렇다.

주한미군 주둔 비용의 일부를 한국 정부가 나눠 내는 돈이 방위비분담금이다. 방위비분담금은 주한미군 내 한국인 노동자 인건비, 군사건설비, 군수지원비에 쓰인다.

제12차 한·미 방위비분담특별협정 체결을 위한 첫 회의가 지난 23~25일(현지시각)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렸다. 외교부는 “주한미군의 안정적 주둔 여건 마련과 한-미 연합방위태세의 강화를 위한 우리의 방위비 분담이 합리적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미국은 방위비분담금이 “한-미 동맹에 대한 강력한 투자”라고 주장하며 분담금 증액을 압박하고 있다. 그동안 방위비분담금 협상 때마다 미국은 돈을 더 달라고 했고 우리는 덜 주려고 맞섰다.

지난 2021년 3월 미국 워싱턴에서 정은보 외교부 한미 방위비분담금 협상대사(왼쪽)와 도나 웰튼 미국 국무부 방위비분담 협상대표가 제11차 한·미 방위비분담특별협정(SMA) 체결을 위한 9차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외교부 제공

한국은 1991년부터 방위비분담금을 미국에 주고 있다. 한국이 30년 넘게 방위비분담금을 내다보니 마땅히 줘야 할 돈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원래 방위비분담금은 우리가 낼 필요가 없는 돈이다. 주한미군의 법적 지위는 1966년 체결된 한-미 주둔군지위협정(소파)에 규정돼 있다. 소파 5조에 명시된 주한미군 경비 부담 원칙의 뼈대는 “한국이 주한미군에 시설과 부지를 무상 제공하고, 미국은 주한미군 운영 유지비 모두를 책임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국이 부동산을 공짜로 제공하고, 그 외 주한미군 운영과 유지에 필요한 모든 돈은 미국이 낸다.

소파 규정에 따라 1980년대까지는 미국이 주한미군 주둔 경비를 모두 부담했다. 1980년대 미국이 무역·재정적자로 경제 형편이 어려워지자 미국은 “한국도 이제부터는 주한미군 운영유지비를 분담하라”는 요구를 했다. 하지만 미국이 운영유지비를 전액 부담하기로 된 소파 규정을 건너뛰고 한국이 주한미군에 돈을 지급할 법적 근거가 없었다. 이때문에 한국과 미국은 1991년 방위비분담특별협정(SMA·Special Measures Agreement)을 맺었다.

이 협정에 ‘특별’(Special)이란 단어가 들어간 이유는 소파 5조(미국이 주한미군 운영유지비 전액 부담) 적용을 이 협정 유효기간 동안 임시 중단시키는 특별한 조처이기 때문이다. 이 협정은 원래 미국이 모두 내야할 주한미군 운영유지비의 일부를 한국에 떠넘긴다는 의미에서 특별하다. 방위비분담특별협정은 한국에겐 ‘특별한’ 부담이고 미국에겐 ‘특별한’ 이익이다.

지난 3월20일 경기 연천 임진강에서 한국과 미국이 한미연합 도하훈련을 하고 있다. 육군 제공

지난 23일부터 한국과 미국은 제11차 방위비분담금특별협정이 종료되기까지 1년8개월이 남은 상황(2025년까지 효력)에서 2026년부터 적용될 12차 협상에 나섰다. 그동안 협상 기간이 1년가량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현행 협정이 1년8개월 남은 상태에서 다음 협상을 개시하는 것은 이례적으로 빠르다. 양국이 공식적으로 인정하진 않지만, 오는 11월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다시 집권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서둘러 협상을 시작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한국은 트럼프가 재집권하면 방위비분담금을 둘러싼 양국 갈등 재연을 걱정해 바이든 임기 내 새 협정을 맺으려 하고, 미국은 한국의 이런 다급한 처지를 활용해 더 많은 방위비분담을 받아내려고 조기 협상에 응했다는 것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주한미군 철수와 방위비분담 대폭 증액을 연계해 한국을 압박했다. 그는 당시 매년 1조389억원(2019년)이던 방위비분담금을 5배가량 올려 5조8천억원을 요구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한국은 우리에게 삼성 텔레비전을 파는데, 우리는 그들을 보호해준다. 이는 맞지 않는다”며 한국이 미국의 안보 지원에 무임승차한다고 주장했다.

사업가 출신인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재임 때 동맹의 가치보다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우선했다. 문재인 정부 외교·안보 당국자는 당시 미국의 방위비분담금 증액 요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존보다 대폭 증액된 금액도 놀라웠지만, 미국이 제시한 인상 근거도 충격적이었다. 예컨대 주한미군 정찰기 1회당 정찰 비행에 드는 세부 비용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등 주한미군의 각종 비용을 조목조목 명시하고, 이를 분담해 달라고 한국에 요구했다. 마치 상거래 때 주고받는 비용 상세내역서나 대금청구서를 보는 느낌이었다.”

2014년 이후 방위비분담금 현황. e-나라지표

도널드 전 대통령의 터무니없는 인상 요구로 2020년 3월 타결됐어야 할 11차 방위비분담금 협상이 장기 표류했고, 한국은 트럼프 전 대통령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는 것보다 그해 11월 미국 대선 이후로 협상을 미뤘다. 결국 11차 협상은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하고 대통령에 취임하고 한달 뒤인 지난 2021년 3월 타결됐다. 한국은 2021년 방위비분담금으로 1조1833억원을 내고 앞으로 4년간은 전년도 국방비 증가율만큼 매해 올려주기로 미국과 합의했다. 지난해 방위비분담금은 1조2896억원이었다.

민간 경제활동에서는 돈거래를 할 때 돈을 주는 사람은 앉아있고 돈을 받는 사람이 일어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방위비분담금의 경우는 반대다. 돈을 내는 한국이 서서 주고 미국은 앉아서 돈을 받는 모양새다. 원래는 안 줘도 되는 돈을 한국이 특별히 주는데도, 미국은 응당 받아야 할 빚을 받아내는 빚쟁이처럼 채근했다. 나의 호의가 상대의 권리가 된 전형적인 경우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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