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했던 기억 불행했던 기억 [내 아이 상담법]

유혜진 소장, 홍승주 기자 2024. 4. 26.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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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혜진의 내 아이 상담법
누구나 갖고 있는 행복한 기억
현재 힘든 현실 견디는 힘이 돼
어른들이 행복한 기억 선물해야

"과거의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려 보세요." 누구나 하나쯤 갖고 있을 법한 행복의 기억. 하지만 청소년 상담을 하다 보면 "행복했던 기억이 없다"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 행복을 떠올리려 할수록 나쁜 기억이 더 많이 떠오른다고 하소연하는 아이들도 있다. 이런 아이들에게 영화 '시네마천국'의 주인공 토토에게 행복한 기억을 남겨준 영사기사 '알프레도' 같은 어른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건강한 어른으로 자라기 위해선 행복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필요하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청소년 상담에선 과거의 경험을 다룰 때가 많다. 우리가 과거에 주목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과거의 경험이 현재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고, 반대로 과거의 경험이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는 '내적자원'이 될 수도 있어서다. 과거의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리는 게 힘든 현실을 견디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거다. 안타까운 점은 이런 내적자원을 갖지 못한 청소년들도 적지 않다는 점이다.

20여년 전 필자가 수련 2년차쯤 됐을 때 일이 떠오른다. 당시 필자는 주로 부모나 친구와의 갈등, 학업이나 진로 문제로 고민하는 아이들을 상담했다. 비행이나 일탈 문제를 겪는 아이들과의 상담 경험은 부족했는데, 공교롭게도 그때 '소년보호관찰' 대상 청소년들과의 집단상담을 맡았다.

소년보호관찰이란 비행이나 범죄를 저지른 청소년을 교도소ㆍ소년원에 구금하는 대신, 가정ㆍ학교ㆍ직장 등에서 정상적으로 생활하게 하는 형사정책이다.

단, 보호관찰관의 지도와 감독하에 사회봉사명령 또는 수강명령을 준수하고, 범죄성을 개선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이런 소년보호관찰을 받는 아이들의 숫자는 적지 않다. 법무부에 따르면 소년보호관찰 접수 건수는 2020년 1만3489건, 2021년 1만1853건, 2022년 1만2507건 등으로 매년 1만건을 웃돈다.

필자는 이 아이들의 특성을 숙지하고 관련 연구 자료를 검토해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하지만 정작 아이들을 만나고 나니 당혹스러웠다. 우리가 준비한 프로그램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쉽사리 마음을 열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참여동기가 부족했다. 부모나 가족이 집단상담을 의뢰한 것도 아니고 법원 명령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참여한 것이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한가지 의외였던 건 보호관찰 청소년이라는 선입견과 달리 필자의 눈에 비친 아이들이 전혀 충동적이거나 반항적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잔뜩 위축되고 지쳐 있었다. 그래서 자신을 버리고 아무렇게나 아무데나 휩쓸리는 듯했다.

그래서 집단상담의 주제를 바꾸기로 했다. 당초 상담 주제는 '분노조절'이었는데 상담 참여 의지가 없는 아이들에겐 적합한 프로그램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보단 그들이 문제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파악하고, 어둡고 힘든 시간을 견딜 수 있는 그들만의 내적자원 찾기에 집중하기로 했다. 과거의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그 속에서 행복의 순간을 찾아보자는 거다.

물론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행복했던 과거의 경험을 떠올려 보라"는 주문에 아이들 대부분은 "없다"고 답했기 때문이다. 꽤 오랜 시간 일탈행위로 가족ㆍ학교에서 갈등을 겪어 왔으니 '행복'보다 '문제'에 익숙했던 거다. 아이들은 마치 행복이란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처럼 이야기했다.

행복뿐만이 아니었다. 긍정, 자원, 장점 등 긍정적인 단어조차 낯설어했다. 코웃음을 치며 "살면서 사랑받은 기억이 하나도 없다" "나는 행복과 거리가 멀다"는 아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줄기 희망은 있었다. 처음엔 행복이란 단어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점차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어린시절 부모님과 놀이동산에 가서 좋았는데, 제가 더 놀자고 떼쓰는 바람에 부모님이 싸워서 힘들었어요"와 같은 이야기들을 털어놓았다.

아이들이 행복한 기억이 없다고 단언했던 건 어쩌면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리려고 하면 할수록 과거의 불행한 기억이 함께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놀이동산에 함께 갔던 부모님의 마음' '눈치 보지 않고 더 놀자고 말했던 어린시절의 나'를 떠올리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실제로 집단상담을 끝낸 아이들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저한테도 그런 때가 있었다는 걸 잊고 있었어요" "저는 언제 어디서나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도 괜찮은 아이였을 때가 있었네요" "왜 이렇게 됐을까요"…. 분노조절이란 부정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행복했던 기억이란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한 게 주효했던 셈이다. 아이들이 마음을 터놓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절반의 성공이었다.

만약 내 아이가 어두운 터널 속에 갇혀 있다면 먼저 손을 내밀어보자.[사진=게티이미지뱅크]

최근 심리학에서도 문제의 근원을 추적하기보단 개인의 행복이나 강점에 집중하는 '긍정심리학'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물론 지금 겪는 고통이 너무 클 때엔 행복했던 기억마저 우울한 기억으로 재해석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른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만약 내 아이가 문제행동을 일으킨다면, 그로 인한 깊은 갈등으로 어두운 터널 속에 갇혀 있다면 먼저 손을 내밀어보자.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뭐가 문제야"라며 문제행동의 원인을 따지고 들기보단 아이가 스스로 긍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자.

먼 훗날 과거가 될 지금을 행복한 기억으로 만들어주는 게 어른들의 역할이다. 아이가 성인이 됐을 때 꺼내볼 수 있는 내적자원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거다. 영화 '시네마천국(1988년)'의 주인공 '토토'에겐 어린 시절 행복한 기억을 남겨준 영사기사 '알프레도'가 있었다. 모든 아이에겐 알프레도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그 역할을 우리가 해주면 어떨까.

유혜진 서울시청소년상담복지센터 소장

홍승주 더스쿠프 기자
hongsam@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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