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세요, 폭력의 현장 속 고통 받는 여성들을[책과 삶]

박송이 기자 2024. 4. 26.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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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자이너 모놀로그’ 작가 이브 엔슬러
45년간 써온 시·편지·에세이 묶어
비극의 땅에서 마주한 분노와 슬픔, 그리고 희망
동시대인의 ‘책임과 연대의 의미’에 대해
‘그들이 슬픔을 껴안을 수밖에’ 의 작가 이브 엔슬러. 이브 엔슬러 공식홈페이지

그들의 슬픔을 껴안을 수밖에

이브 엔슬러 지음|김은지 옮김|푸른숲|410쪽|1만8800원

콩고민주공화국 동부에 위치한 부카부에는 ‘기쁨의 도시(City of Joy)’라는 성폭력 피해 여성들의 회복 공동체가 있다. 내전이 장기화되고 분쟁 상황이 이어지면서 정부군, 반군, 민병대할 것 없이 여성들을 강간했다. 강간은 공동체를 파괴해 광산을 차지하려는 군대의 전쟁 전술이자 무기였다. 강간 피해를 입고 살아남은 여성들을 부카부 판지병원을 찾았다. 의사 드니 무퀘게는 헌신적으로 그들을 치료하고 지원했다. 헌신과 신뢰, 연대로 ‘기쁨의 도시’가 건설됐다. 무퀘게는 이 공로로 2018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2018년 제작된 다큐멘터리 <기쁨의 도시>는 전쟁 범죄 피해자인 콩고민주공화국 여성들이 끔찍한 기억을 딛고 일어나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세상에 맞서는 과정을 담은 작품이다. 다큐멘터리에는 절망의 폐허 속에서 생존 여성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고 자신 안에서 분출하는 힘을 발견하는 인상적인 장면들이 나온다. 거기에는 ‘한 걸음 나아가 공간을 장악하라’ ‘폭력이 끝나는 날까지 연설하라’ ‘최악의 상황을 겪은 여성들이 콩고를 위해 가장 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하자’며 그들을 돕는 극작가 이브 엔슬러가 등장한다. 이브 엔슬러는 생존 여성들에게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강간과 구타를 당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공유한 여성들은 서로 힘을 주고 받는다. 생존 여성인 제인은 말한다. “이브가 자기 이야기를 할 때 아주 주의 깊게 들었어요. 그런 끔찍한 일이 서양에서도 일어난다니 정말 놀랍죠. 그걸로 마음에 힘을 얻고 희망이 생겼어요.”

<버자이너 모놀로그>로 잘 알려진 극작가 이브 엔슬러가 45년 동안 써온 산문과 시, 편지, 에세이를 선정해 묶은 <그들의 슬픔을 껴안을 수밖에>가 출간됐다. 그의 글들은 레이거노믹스의 출현, 보스니아 내전, 콩고민주공화국 내전, ISIS의 발호, 코로나19 팬데믹 등 현대사를 관통하며 폭력적인 역사의 현장 속에서 고통받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분노와 슬픔, 그리고 희망이 뒤엉켜 있는 그의 글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책임과 연대의 의미를 환기시킨다.

이브 엔슬러는 2007년 8월 콩고민주공화국 부카부 판지병원을 방문해 전시 강간 생존 여성들과 의사 무퀘게를 취재한 후 ‘죽음에 내몰린 여자들과 그들을 돕는 남자’라는 글을 한 잡지에 기고한다. 그는 이 글에서 “여러분에게 이렇게 부탁한다. 내가 먼 부카부 판지병원에서 그랬듯 당신도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기를, 마음을 열어주기를, 함께 분노하고 구역질해 주기를”이라고 당부하며 “사람들은 다국적 기업의 대리인이자 광산 관리자인 민병대를 피해 달아난다. 식민주의와 자본주의, 인종차별주의가 얽혀 만든 죽음의 교차로가 이제는 여성의 몸을 관통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대량 강간이 일어나는 곳은 대부분이 광산이고 이들 광산에는 컴퓨터와 플레이스테이션, 휴대전화 들어가는 콜탄이 묻혀 있다. 그들이 겪어야 했던 끔찍한 고통과 자본주의에 잠식된 우리의 삶에는 분명한 연결고리가 있었고, 이브 엔슬러는 이를 상기시킨다.

뒤이은 그의 시 ‘세례’는 거대한 분노와 슬픔 속으로 독자를 집어넣으며 다시 한 번 어떤 책임을 촉구한다. 그는 이 시에서 부카부 판지병원에 가득한 소변냄새에 대해 말한다. 이는 강간 피해자들에게 생긴 누공 때문이다. 누공은 질과 방광 사이의 조직에 난 구멍을 의미하며 인권이 말살된 폭력적인 상황에 대해 말해준다. “너무 많은 남자들이 강제로 폭행한 여덟 살 소녀를/ 내 무릎 위에 앉혀 끌어안는다/ 소녀의 안에는 구멍이 하나 있다/ 아이의 오줌이 나도 모르게 나를 적셨을 때/ 나는 세례를 받았다/ 콩고는 끝나지 않았다/ 당신이 만지는, 하는 모든 것 안에 있다/ 혹은 하지 않는 것에.”

‘그들이 슬픔을 껴안을 수밖에’. 푸른숲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으로 달려가 피해 여성들의 증언을 듣고 이를 세상에 전달하는 일은 그에게는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예술가의 정체성이 앞서 혼란스러운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1994년 보스니아 내전 당시 크로아티아 난민캠프에서 여성들을 인터뷰하고 쓴 글 ‘레이철의 침대’는 그가 했던 고뇌의 과정을 보여준다. 그는 “(나는) 극작가 역할을 유지하느라 진을 뺐다. 나는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만들 드라마를 상상했고 여자들이 하는 말의 리듬과 속도를 가늠해 보았다. 이런 접근 방식으로 나는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는 매정하고 우월감에 젖은 사람이 되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전쟁 통의 잔악함 속에서 예술을 끌어내고자 했던 이 욕구는 나의 무능에서 기인했다”고 자인하며 이제는 이야기 밖에서 스스로를 보호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다음은 방어기제 없이 피해자들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그의 의지를 보여준다. “저를 앞세우지 않게 해주세요. 제가 집 잃은 사람이, 집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익명이 되게 해주세요. 그리하여 나의 차례, 나의 메시지, 나의 몫, 나의 작품, 나의 순간을 걱정하는 마음을 버리게 해주세요. 마침내 원 안에 앉을 준비가 되게 해주세요.”

친족 성폭력 및 가정폭력 생존자이기도 한 이브 엔슬러는 2018년 <아버지의 사과 편지>라는 책을 썼다. 그는 그를 성적으로 학대하고 폭행했던 아버지가 사과하기를 기다렸지만, 사과받지 못했다. 아버지가 죽고 31년이 지난 어느 날, 아버지에게 받아야 했던 사과를 직접 쓰겠다고 결심하고 이 책을 썼다. 그는 2021년에 쓴 글 ‘사과의 연금술’에서 “힘 있는 자들은 사과하지 않는 법을 익힌다. 그들은 스스로를 피해자로 만든다”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기 죄를 진실로 대면하는 성범죄 가해자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죄를 인정하고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기 범죄의 뿌리와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고난의 작업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어요…제 아버지는 어느 책에서 잘못을 시인하는 남자는 남자들의 적이라고 배웠습니다. 한 명이 자기 잘못을 인정해 버리고 나면 모든 서사가 무너지기 시작할 것이라고요.”

그는 이제 이브 엔슬러라는 이름 대신 V라는 이름으로 글을 쓴다. 가부장제, 자본주의, 식민주의의 기억들이 만들어낸 폭력의 서사, 혐오의 서사, 배제의 서사가 아닌 새로운 서사를 만든다는 의미에서다. 그는 통제하고 구분짓고 착취하는 이들의 대척점에 선 ‘V종족’에서 자신의 기원을 찾는다. 근거 없는 이상이라는 누군가의 비아냥에도 개의치 않는다. “어차피 세상은 누군가 만들어낸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힘을 가진 자들이 이야기의 등장인물과 시점, 형식을 전할 뿐. 나는 이름이 가진 힘을 믿는다. 성서가 되거나 찬사로 남거나 회상이 되거나 주문이 되거나. 기억처럼 보이는 것이 예언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달렸다. 우리 모두에게.”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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