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을 연기하지 않는 여성, ‘레즈비언’…“우리가 안 보이나요?”

오세진 기자 2024. 4. 26.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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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대생이면 나중에 좋은 남자 만나 시집가야지."

해마다 4월26일은 건과 같은 레즈비언(여성에게 정서적·성적 끌림을 느끼고 친밀한 관계를 맺는 여성)의 삶을 드러내고 이들이 겪는 차별을 알리는 '레즈비언 가시화의 날'이다.

레즈비언은 성소수자를 배제하는 사회에서 오랫동안 굳어진 성 역할 고정관념도 맞닥뜨린다.

현행법이 부부로 인정하지 않음에도, 국내 첫 임신 동성 부부가 된 김규진·김세연씨처럼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는 레즈비언은 또 다른 레즈비언이 세상에 맞설 용기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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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6일 레즈비언 가시화의 날
건(가명)이 평소 가방에 걸고 다니는 열쇠고리. 버섯 모양의 캐릭터가 무지개색 모자를 쓰고 한 손에 퀴어를 상징하는 무지개색 깃발을 들고 있다. 건 제공

“여대생이면 나중에 좋은 남자 만나 시집가야지.”

대학생 3학년인 건(가명·22)이 명절마다 듣는 친척 어른들의 잔소리다. “대학에 갔으니 남자친구가 있겠네?” “살 좀 빼라.” 선 넘는 참견도 쏟아진다. 이는 성차별적 발언이나 날씬한 몸에 대한 강요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건이 ‘여자니까 남자를 좋아할 것’이라는 전제는 그의 존재 자체를 지운다.

해마다 4월26일은 건과 같은 레즈비언(여성에게 정서적·성적 끌림을 느끼고 친밀한 관계를 맺는 여성)의 삶을 드러내고 이들이 겪는 차별을 알리는 ‘레즈비언 가시화의 날’이다. 레즈비언은 성소수자를 배제하는 사회에서 오랫동안 굳어진 성 역할 고정관념도 맞닥뜨린다. 한겨레가 ‘레즈비언 가시화의 날’을 앞두고 만난 20대 레즈비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으며 해방감을 느꼈고, 자긍심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일상 속 차별을 피하기 어렵고, 여성이자 성소수자로서 삶의 선택지가 좁은 탓에 미래에 대한 불안도 컸다.

건(가명)이 휴대전화 케이스에 붙이고 다니는 얇은 종이 재질의 테이프. 퀴어를 상징하는 무지개색 물방울과 ‘우리는 존재 자체로 가치 있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오세진 기자 5sjin@hani.co.kr

대학원생인 혜성(27·가명)은 대학교 2학년 때인 2016년 자신을 레즈비언으로 정체화하며 해방감을 느꼈다. “(더는) 남성과 연애하면서 여성스럽게 보이기 위해 나를 억지로 꾸미고 연기하지 않아도 돼요. 물론 제가 원하면 화장도 하고, 치마를 입을 수도 있지만 ‘남성 연애 상대로서의 여성’을 연기하고 싶진 않아요.”

기독교인인 건은 한때 여성에게 끌리는 자신을 부정하기도 했다. “성소수자란 사실을 인정하면 지옥에 갈 것 같고 ‘창조 섭리’에 어긋나는 죄인이 될 것 같았어요.” 고1 때 시작된 혼란은 대학 입학 전 정체성을 찾으면서 잦아들었다. “(정체성을 찾자) 답답함이 확 풀렸어요. 그전까진 나 자신을 되게 이상한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나와 비슷한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안심이 됐죠.”

가족에게마저 성소수자임을 드러내기 어려운 사회는 레즈비언의 삶도 위축시킨다. 성차별 관행이 있는 일터에선 살아남기 쉽지 않고, 성소수자를 배제하는 가족·공동체에 속하지 못한 채 홀로 안전하게 살 수 있는지 불안도 크다. 건과 혜성 역시 가족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말하지 못했다.

건은 “동호회에 가입해도 ‘있는 그대로 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지’ 의문을 갖게 된다”며 “직장에선 의도치 않게 정체성이 밝혀지면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고 걱정했다. 혼자 쓸쓸히 늙어갈 생각을 하면 앞이 캄캄하다.

다양성을 향한 지속가능한 움직임 ‘다움’에서 2021년 발표한 ‘청년 성소수자 사회적 욕구 및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응답자 3911명, 평균 연령 25.1살), 레즈비언 응답자들은 가장 중요한 성소수자 정책(복수응답)으로 ‘동성 커플에 대한 법적 결혼 인정’을 1순위로 꼽았다. 다른 성소수자 그룹이 ‘포괄적 차별금지법·평등법 제정’을 중요한 정책 1순위로 꼽은 것과 차이가 나는 대목이다.

현재 동성 애인과 한집에서 함께 사는 혜성(가명)이 애인과 처음 동거할 때 친구가 집들이 선물로 준 곰 인형 한 쌍. 혜성 제공

동성 애인과 4년째 함께 사는 혜성은 결혼을 꿈꾼다. 그러나 현행 법제도는 동성 부부의 법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혜성은 “살기 어렵고 힘든 세상을 함께 헤쳐나갈 수 있는 여러 방법 중 하나가 결혼이지만 우리에겐 그런 선택지가 차단돼 있다”고 답답해했다.

현행법이 부부로 인정하지 않음에도, 국내 첫 임신 동성 부부가 된 김규진·김세연씨처럼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는 레즈비언은 또 다른 레즈비언이 세상에 맞설 용기를 준다.

“그동안 나 같은 사람은 숨어 살아야 하나,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들(김규진·김세연씨) 덕분에 나도 남들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 수 있단 걸 깨달았습니다.” 건이 말했다. 레즈비언의 존재 드러내기가 우리 사회에 더 필요한 까닭이다.

오세진 기자 5sj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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