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론에도 변함없다…“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

한겨레 2024. 4. 26.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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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의 돌아보고 내다보고]

04 _뉴노멀된 팬덤정치

이번 선거에서 팬덤을 거느린 정치인은 성공했다. 이재명 대표를 비롯해 조국 대표와 이준석 전 대표가 선거승리의 주역이 됐다. 팬덤이 그들을 살렸다. 주목할 것은 한동훈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보여준 모습이다. 그는 선거 내내 깨알같이 야당을 조롱했고, 시종일관 야당에 대한 혐오와 적대를 추동하는 팬덤 플레이에 주력했다.

제22대 국회의원선거를 하루 앞둔 지난 9일 여야 각 당 대표와 후보자들이 마지막 집중 유세를 펼치고 있다. 연합뉴스

22대 총선의 유일한 키워드는 심판이었다. 정당 중심의 대의민주주의에서 선거는 일차적으로 보상과 처벌의 성격을 갖는다. 유권자는 투표를 통해 잘하면 상을 주고, 못하면 벌을 준다. 선거는 민주적 책임성을 묻는 기제인 것이다. 따라서 이번 총선이 윤석열 정부에 대한 심판으로 치러진 것은 우리 민주주의가 도도한 양극화의 흐름 속에서도 제법 건강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위안을 준다. ‘3년은 너무 길다’는 구호가 얻은 폭발적 반응에 비춰보면 여당이 탄핵 저지 의석을 얻은 건 약간 의외다. 그럼에도 우리 국민은 주권자로서 ‘해도 너무한 빌런’(윤 대통령)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했다.

민주당이 위성정당을 포함해 175석을 얻었고, 국민의힘은 108석을 얻었다. 4년 전 총선에서는 민주당이 180석,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이 103석을 획득했다. 지난번보다 격차가 줄어들었다. 지역구 득표율을 기준으로 보면, 두 당의 격차는 8.9%포인트(21대)에서 5.4%포인트(22대)로 줄었다. 정치적으로는 정부·여당의 완벽한 패배이지만 내용으로는 양당 간의 경합구도가 여전히 유지된다고 할 수 있다.

선거 결과는 선거 과정에서 드러난 여론과 흐름에 다소 어긋난다. 야권이 생각만큼 못 이겼다. 한국갤럽의 여론조사 3월 한 달 평균을 보면, 정부지원론보다는 정부견제론이 훨씬 높았다. 39% 대 50%. 실제 득표에서 국민의힘은 45.1%, 민주당은 50.5%를 얻었다. 여론조사에서의 11%포인트 격차가 투표에서는 절반으로 줄어든 것이다. 참고로, 3월25~28일의 문화방송(MBC) 패널조사에서는 35% 대 60%로 무려 24%포인트의 차이였다. 이유가 뭐든 국민의힘 지지층이 민주당 지지층보다 더 많이 투표에 나선 탓일 것이다. 지민비조(지역구 투표는 민주당, 비례대표 투표는 조국혁신당)의 방식으로 사실상 연대한 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이 비례대표 투표에서 얻는 득표율을 합하면 50.9%에 달한다. 민주당 지역구 득표율과 엇비슷하다. 이에 비해 국민의힘은 36.7%에 불과했다. 지역구 득표율에 비해 8.4%포인트 낮다. 두 당 간의 격차도 14.2%포인트에 달한다. 국민의힘에서 떨어져 나왔다고 볼 수 있는 개혁신당(3.6%), 보수성향의 자유통일당(2.3%)까지 더하면 42.5%다. 그래도 지역구 득표율에 못 미친다. 국민의힘이 선방, 즉 예상보다 덜 졌다는 얘기다.

선거 후에 실시된 전국지표조사(NBS)에서 야권이 예상보다 많은 의석을 얻었다는 응답이 40%였다. 한국갤럽 조사에서는 43%가 선거결과에 만족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야권 압승에 불만을 표한다는 건 이들이 여당을 지지했거나 또는 심판론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이 비율이 실제 투표에서 여권을 찍은 비율보다 낮다. 결국 여권 지지층이 상대적으로 더 적극적으로 투표장으로 나갔다는 얘기가 된다. 이는 역으로 심판론에 동의하는 유권자들을 야권이 온전히 투표로 유인해내지 못했다는 뜻이다.

큰 의석수 차이, 작은 지지율 차이. 요컨대, 문책은 이뤄졌으나 정서적 양극화 등으로 인해 심판정서의 온전한 발현이 저지된 선거였다. 선거 전의 각종 여론조사, ‘런종섭’이나 ‘대파 파동’ 등 언론이 주목한 이슈들의 성격들이나 그들의 논조 등을 감안할 때에도 양당 간의 5.4%포인트 격차는 예상보다 적다. 이런 점에서 ‘우리’에 대한 호감이나 지지보다 ‘그들’에 대한 반감이나 적대가 투표의 기준이 되는 부정적 열정이 제1 요인으로 작동한 것으로 보인다. 김민하의 표현대로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가 자리잡았다는 의미다. 걱정이다.

민주화 이후 선거에서 보수와 진보는 호각세를 보여왔다. 67석, 조국혁신당의 의석을 포함할 경우 79석의 의석수 격차가 주는 착시효과에도 불구하고 이번 선거에서도 그 흐름은 큰 틀에서 바뀌지 않았다. 19대와 20대 총선의 지역구 득표율을 보수와 진보로 대별해서 보면 양자의 격차는 각각 1.6%포인트, 0.3%포인트에 불과했다. 그때 비하면 5.4%포인트는 매우 크다. 허나 이 정도면 흔히 말하는 오차범위 안에 있는 수치다. 상황적 계기나 국면적 요인에 따라 성패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차이다. 게다가 이번 선거의 경우 심판론이란 메가 프레임 속에 치러졌으므로 이 격차는 할인해서 봐야 한다. 다만, 보수보다는 진보 쪽으로 트렌드가 움직이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이 트렌드가 계속 이어질지 다시 반전할지는 정치세력, 정치 엘리트들의 선택과 전략에 달려 있다.

특별히 선거과정에서, 그리고 선거결과를 통해 확인된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그 ‘사실’의 핵심은 팬덤정치다. 이번 선거에서 팬덤을 거느린 정치인은 성공했다. 이재명 대표를 비롯해 조국 대표와 이준석 전 대표가 선거승리의 주역이 됐다. 이재명 대표는 극심한 공천 파동을 이겨냈고, 조국 대표는 위선자 프레임을 이겨냈고, 이준석 전 대표는 소외의 설움을 이겨냈다. 그들은 대표적인 팬덤 정치인들이다. 팬덤이 그들을 살렸다. 반면에 팬덤이 옅거나 눈에 띄지 않는 이낙연 전 대표, 금태섭 전 의원, 박용진 의원은 낙선·낙천했다.

주목할 것은 한동훈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보여준 모습이다. “전략도 없고 메시지도 없고 오로지 철부지 정치 초년생 하나가 셀카나 찍으면서 나 홀로 대권 놀이나 한 거다.”(홍준표 대구시장) 맞다! 그런데 ‘셀카나 찍으면서 나홀로 대권놀이’ 한 게 의도적인 선택이라면? 그는 선거 내내 팬덤을 구축하는 데 힘을 쏟았다. 깨알같이 야당을 조롱했고, 시종일관 야당에 대한 혐오와 적대를 추동하는 팬덤 플레이에 주력했다. “팬덤정치의 본질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정치인이나 정치집단을 과도하게 혐오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좋아함(선호)보다 싫어함(혐오)에서 발원하는 것이 팬덤정치다.”(박상훈) 그는 대통령과의 차별화란 익숙한 문법 대신 팬덤정치란 새로운 문법을 취했고, 성공했다. 따라서 그의 팬덤은 선거 패배 후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국회로 배달된 한동훈 응원의 화환 행렬, 팬클럽 신규회원의 증가, 대선 후보와 당대표 후보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보이는 부동의 강세가 그 증거다.

“선거 민주주의는 작동하지만 정치는 없는 나라.”(이관후 교수) 협치를 불편해하고, 심지어 배신으로 간주하는 팬덤 대중의 인식과 압박으로 인해 대화와 타협의 정치가 다시 활성화될 가능성이 높지 않다. 팬덤정치가 우리 정치의 뉴노멀이 됐다. 팬덤 구축이 정치적 성공의 교리가 됐다. 포퓰리즘, 정서적 양극화, 팬덤정치는 패키지로 움직인다. 서로가 서로를 강화하고, 자극하고, 지원한다. 결과는 상대에 대한 혐오와 적대, 나아가 부정과 배제다. 이 위험한 ‘나쁜 정치 패키지’가 우리 정치를 짓누르고 있음이 이번 총선에서 확인됐다. 훗날 우리 정치의 분기점으로 기록될지도 모르겠다.

이번 총선은 한편으론 안도를, 다른 한편으론 우려를 던져주었다. 단호히 심판하면서도 다시 탄핵의 수렁에 빠지지 않도록 제어한 집단지성의 절묘함이 참 다행스럽다. 뭘 해도 옹호되고, 정치적·도덕적 흠결이 오히려 정치적 자산이 되는 팬덤정치, 상대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내 눈의 들보보다 남 눈의 티끌에 분노하는 정서적 양극화를 보면서 근심이 더 깊어졌다. 이대로 가면 정당들이 대중의 선호에 기반한 정책과 비전을 제시하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막말과 흠집 잡기로 이기는 데에만 혈안이 되는 정당, 스티브 베넨이 말하는 ‘탈정책’(post-policy) 정당으로 전락할 수 있다.

우리 정치를 옥죄면서 절벽으로 내몰고 있는 팬덤정치! 이 팬덤정치는 언제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떻게 작동하는 것일까?

이철희 | 방송에서 정치평론을 하다 정치에 나서 20대 국회의원, 문재인 정부 마지막 정무수석을 지냈다. 2020년 ‘대통령 탄핵 결정요인 분석: 노무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 탄핵 과정 비교’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인자를 만든 참모들’ ‘정치가 내 삶을 바꿀 수 있을까’ 등의 책을 냈고, ‘진보는 어떻게 다수파가 되는가’ 등의 역서가 있다. 우리 정치가 어쩌다 이렇게 나빠졌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해야 나아질 것인지 등에 대해 터놓고 얘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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