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김대중] “통합과 화해의 정치” - 임채정 전 국회의장 ①

백미선 2024. 4. 26.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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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광주총국은 김대중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
연중기획 DJ탄생 100년「다시 만난 김대중」을 월 1회 제작,
'뉴스7광주전남'과 '광주전남9시뉴스'에 선보입니다.
디지털 기사는 기획물 제작을 위해 이뤄진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KBS광주 연중기획 DJ 탄생 100년 다시 만난 김대중


"참 대단한 정치인이었다. 그리고 인간적으로도 너무 깊었다. 아깝다. 안타깝다."
'김대중' 세 글자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임채정 전 국회의장은 "현대사에서 그만한 정치인은 없었다" 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4월 중순, 14대부터 17대까지 4선 국회의원이자 17대 후반기 국회의장을 지낸 임채정 전 의장(현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을 만났습니다. 해직기자에서 재야 민주화 운동가로 활동하다 정계에 입문해 내리 4선을 했던 임 전 의장은 정책·전략 전문가로 통합니다. 1997년 대통령 선거 당시 김대중 후보의 국민회의의 정세분석위원장으로 활동하며, 김대중과 함께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뤄냈습니다. 참여정부가 탄생한 2002년 대선 당시에는 민주당 정책선거특별본부장으로 활약했습니다. 이후 노무현 정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국정 운영과 경제·외교 안보 분야의 정책을 설계한 인물입니다.

■ '비판적 지지' 를 표명하며 제도 정치에 입문

1975년 동아일보 해직이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에서 활동하던 임채정 전 의장은 1988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끄는 평화민주당에 입당하면서 정계에 입문했습니다. 직선제 개헌과 함께 치러진 1987년 13대 대통령 선거, 야권 단일화 난항 끝에 평화민주당(평민당)을 창당해 출마했던 김대중 당시 평화민주당 총재는 낙선 후유증을 겪고 있었습니다.

야권 단일화 실패에 대한 비난이 들끓는 가운데 김대중 총재가 이끄는 평민당은 야권 통합이라는 명분으로 흡수·해체될 위기에 놓였습니다. 하지만 선거 이듬해인 1988년 2월, 재야 인사 91명이 평민당에 대거 입당하는 '정치적 사건'이 일어납니다. 김대중의 몰락을 지켜만 볼 수 없었던 재야 세력이 제도 정치에 발을 들였던 겁니다. 가까스로 회생한 평민당은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70석을 차지, 제1야당으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인터뷰 중인 임채정 전 국회의장. 2024년 4월.

"김대중 대통령… 그때는 총재지. 총재도 참 암담한 상황이었고…. 그래서 제도권과 운동권이 말하자면 민중 세력이 결합해야 한다. 힘을 합쳐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한 끝에 그럼 누구를 중심으로 결합을 해야 하느냐. 그래서 DJ다. 지금 우리 한국 정치인들 중에서 군사정권과의 대립에 있어서 가장 분명한 사람은 김대중입니다. 김대중 하나다. 과감하게 말하면 그렇게 생각하면서 김대중과 힘을 합쳐야겠다. 그래서 입당을 했던 거라고.
… 민중혁명이든 시민혁명이든 간에 그런 민중의 힘만으로 실제 권력을 뒤집어 엎을 수가 있는가 그것이 어렵겠다라는 생각을 난 했어요. "

■ "김대중은 역사를 새로 시작한 인물"

임 전 의장은 대통령으로서 김대중을 "역사를 새로 시작한" 인물이자 어떤 면에서는 "신기하기까지 한" 지도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실제로 그 분이 아니었으면 오늘날의 한국 민주주의는 아직 열리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흔히 인동초의 세월이니 어쩌니 이런 표현을 쓰는데 그것은 감상적인 표현이고…죽음의 세월 아니에요. 그것을 넘고 극복하면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고, 형식적 민주주의에서 실질적인 민주주의로 전환하는 다리를 그분이 만든 거죠.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정도의 제도와 정치도 그분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적어도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 한 일들을 보면 그것이 전부 한국 역사에서는 실질적으로는 처음에 가까운 것들이 많아요. 이를테면 현상적으로는 IMF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그렇게 짧은 시간 내에 이런 큰 빚을 국가가 해결한 예가 없어요. 무슨 '금 모으기' 같은 참 기발한 아이디어를 통해서 국민을 단합시키고, 해외에 여러 나라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그러면서 그것이 결과적으로 IMF라고하는 한국 초유의 그런 참…. 6 25 이후 처음 겪는 재앙이라고 하는 그런 국난을 극복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 이런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인터넷 광역망 설치 이것이 말하자면 새로운 4차 산업혁명을 이끌어가는 한국의 어떤 기초를 마련하지 않았어요? "

"복지 정책에 있어서도 기초생활수급 문제는 실질적인 한국의 복지 정책을 실현시킨 최초의 케이스라고 할 수 있는거거든. 실제로 복지 정책을 현실화했단 말이지. 그것이 만족한 것은 아니었지만 복지학 같은 것을 공부하는 분들 얘기를 들으면 우리나라가 실질적으로 복지국가의 개념을 도입하는 첫 케이스라고해도 된다, 뭐 이런 얘기를 하거든. 그러니까 그런 복지 정책의 현실화. "

"무엇보다도 남북 문제에 있어서의 개성공단을 비롯해서 북한 지도자와의 회담. 이것은 정말 상상하기 힘들었고, 실제로 그것을 실현을 시켜 나갑니다. 말하자면 한국 문제로서 막혀 있던 둑을 열어 제끼고 역사를 새로 시작했다. 근데 그런 점에 있어서는 우리로서는 고맙기도 하고 참 어떨 때 보면은 신기하기까지 한 그런 대통령이고 정치적 지도자였다라고 하는 것이 나의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소회입니다."


■ '용서와 화해'… 국민통합의 길

군부독재 탄압으로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겪어야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 자신 뿐 아니라 가족과 친척, 측근들까지도 구속과 고문 등 고초를 겪어야했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에 당선된 뒤, 아니 투옥돼 있으면서조차 화해와 관용의 메시지를 보냈던 김대중은 집권 이후에도 정치적 보복이 아닌 용서를 통한 국민통합의 길을 추구했습니다.

전두환, 김영삼, 최규하, 노태우 전 대통령 부부를 청와대로 초청해 만찬 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 1998년 7월.


"현해탄 한 가운데에서 한밤에 수장을 하려고 했는데 그 꼴을 겪고 누가 정치를 또 하려고 그러겠어요. 그래도 그분은 끝까지 한단 말이에요. 옳다고 믿고 자기 갈 길이라고 믿었으니까. 그런 점에 있어서는 정치나 철학적인 측면이 아니라 인간적인 측면에서도 탁월한 어떤 특징을 갖고 있다고 그럴까. 탁월한 인성을 갖고 있는 분이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어떻게 그 두 사람, 또 특히 그 한 사람을 용서하는 것까지는 모르는데 같이 식사하면서 국사를 논한단 말이냐. 어떻게 이렇게 쉽게 용서할 수 있느냐. 또는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사실 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걸 받아들였단 말이지. 그리고 그걸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씩 국정에 어떤 상담자로서 대접을 한단 말이에요. 이게 보통 사람으로 가능한 일입니까? 그것은 우선 정치인 이전에 인간적으로 우선 그것은 힘들었을 거예요. 근데 그분은 해냈단 말이지. 그렇게 그걸 위선이라고 할 수 있나요? 또는 그것을 거짓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어떤 경우라 하더라도 그분의 어떤 철학 또는 어떤 태도 이런 것의 발로란 말이지 그래서 또 한 번 참 대단한 분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돼요."

■ 선비 정신과 상인의 방법

"정치는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 감각을 함께 갖춰서 하는 것"

"전두환 노태우를 용서한 것, 용서했다고 그럴까 수용했다고 그럴까. 그런 것도 서생적인 원칙 민주주의 또는 국가 안전 또는 국가 통합을 위해서는 그 원칙을 가지고 이렇게 나가되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를 정말 해치려고 했던 그런 힘과도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는 상인적 계산 태도 이런 것이 없었으면 그런 철학이 유지가 됐겠어요?"

"북한에 대해서도 손잡고 평화적으로 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 안보는 튼튼히 하겠 다. 그런 자세,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감각 그러니까 원칙은 원칙대로만 주장하면 딸깍발이가 되는 것이고, 이 무슨 방법만 찾아가면 뭐 일종의 양아치처럼 되는 거란 말이지. 그러니까 원칙은 단단히 있되 그걸 실현하는 방법은 … 현실이라는 것도 복잡하고 여러 가지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데니까. 이건 어떤 한쪽 이야기 또는 하나의 논리만 가지고 해결할 수는 없는 거란 말이지. 그러니까 세상을 특히 정치를 그런 태도로 해야 한다. 원칙이 없으면 방향을 잃는 것이고 타협이나 그런 상인적인 방법이 없으면 길이 안 생기는 거란 말이지. 효과가 없어. 그러니까는 그 두 개를 합치려고 했던 그런 정치적 자세야말로 정치를 많이 고민하면서 깊이 살폈던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입니다. "

"내부적으로 안보는 튼튼히 한다. 안보는 튼튼하게 하고, 그러니까 왜냐하면 만일 남북 간에 대화를 촉진하고 확대한다. 특히 그래서 개성공단 같은 걸 만든다. 그러면 남쪽에서 또 이쪽 내부에서 또 얼마나 또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을 수 있잖아요. 그걸 일종의 차단하는 것이기도 하지. 우리가 접근하되 과감하게 접근하되 우리의 안보는 튼튼히 하겠다. 걱정하지 말아라 그러면서 그런 우려와 기대를 양쪽을 다 접합시키고 있는 거란 말이지. 그래서 훌륭한 태도였어요. 그건 자칫 잘못하면 개혁적인 분들 또 남북 문제에 있어서 진보적인 분들은 그 나아갈 방향 또는 그 진보성에 대해서만 집착한 나머지 그냥 막 밀고 나갈 수가 있는 거거든. 그랬을 때 오는 후폭풍 또는 반동 이런 것을 계산하고 거기에 대한 우려도 해소해 주는… 양쪽을 다 끌고 나가는 결과적으로 이런 자세를 취한 거 이것도 선비 정신과 상인의 방법 한 표현이죠. "

■ '야권 통합' 메시지는?

대중의 지지와 민주화 열망에도 3번의 대통령 선거에서 고배를 마셨던 김대중 전 대통령. 지역 감정과 더불어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야권 후보 단일화 문제였습니다.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 후보 단일화 합의를 이뤄낸 1997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정권교체를 이뤄낼 수 있었습니다. 역사적 정권교체의 중심에 있었던 임 전 의장에게 DJ가 강조했던 '야권 통합' 이 현실정치에서 갖는 의미를 물었습니다.

임 전 의장은 당시 야권 세력이 감당해야했던 왜곡된 정치 상황이 지금의 정치 현실과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 부분은 조금 복잡한 함의들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 당시 우리 야권 정치라는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우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봐요. 그 당시 우리 야권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여권 ·권력· 공작 세력들에 의해서 말하자면 조작되고, 또는 왜곡된 그런 정치 상황을 감당해야 했던 것이 야권이라고 봅니다. 정치를 순수하게 정치인들 또는 국민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필요에 따라서 야권을 조종하고, 공작하고 때로는 참 역사도 끌어들이고 별짓을 다 했어. 이를테면 지역 감정 조장한 거 또는, 개발과 발전에 있어서 차별하는 거, 그리고 모든 정치적 잘못을 국회에다가 떠미는 거, 그리고 재벌 위주로 경제를 끌어나가는 거… 이런 모든 것에 의해서 또 야권을 공작하는 거. 그래서 야권이 제대로 조직되고 제대로 자기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발전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니었어요. 인위적으로 분열됐다는 거란 말이지. 또 그것을 가지고 이용을 했고. 그런 것을 우려하면서….

…그런 정치적인 공작 상황이라고 그럴까. 그런 것을 벗어나자, 그러면서 정말 국민 위주 또는 어떤 원칙 지향성 이런 것을 중심으로 해서 지역 감정이라든지 또는 도농 문제라든가 또는 계층 문제라든가 이런 것들을 모두 떠나서 정말 올바른 정치 세력으로 합쳐 나가자, 그래야만 폭력적인 공작 그리고 공작적인 당시에 여당 세력에 대항해서 제대로 싸울 수 있지 않느냐, 저들의 계속되는 분열 정책, 공작 정책 가지고는 안 된다. 그래서 그러한 정치를 펴나가야만 비로소 제대로 된 정치를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 이런 뜻이었을 거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 여전한 갈등의 뿌리…책임 정치의 '부재'

하지만 근본적인 측면에서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갈등이 남아있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저 밑에 뿌리로 가면은 그런 게 있어요. 이를테면 그 당시도 마찬가지인데 남북 문제를 정치에 이용하는거. 그리고 특히 남북 문제에 있어서 북풍 공작 같은 거 그렇게 해왔잖아요. 또 지역 불균형 발전, 그것도 지금 뿌리는 여전히 남아 있거든 해소 안 돼 있단 말이지. "

("이념 전쟁 같은 것들도...?")

"그것도 다 연결이 돼 있어. 그러니까 남북 문제·지역 불균형 발전·재벌 중심의 경제, 그리고 정치의 모든 책임을 국회로 돌리는 그런 무책임한 행동. 사실은 정치에 많은 부분이 대통령이 책임을 져야 하는 거거든. 근데 우리는 모든 잘못을 국회로 돌려왔어요, 그동안에. 국민들도 그렇게 오염이 됐고 세뇌가 됐어요, 국민들도. 그런 생각들을 고쳐나가야 해요. 근데 아직도 우리 세대 역시 그 부분이 전부 해소됐다고 보지 않고 있고 뿌리가 깊게 또는 아직도 얕게 남아 있어요." ("통합과 화해의 정치" - 임채정 전 국회의장 ②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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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난 김대중] “통합과 화해의 정치” - 임채정 전 국회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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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난 김대중] “인동초의 삶” - 김택근 김대중 자서전 집필자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7924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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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미선 기자 (bee@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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