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과학과 종교가 서로 충돌했다는 환상

한겨레 2024. 4. 26.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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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부터 인공지능까지
과학·종교 얽히고설킨 2천년 역사
서로 배타적이라는 인식과 달리
복잡한 상호작용 아래에 발전해와
그리스도인 군중이 이교도 수학자 히파티아를 처형하려고 끌고 가고 있는 모습. 계몽주의 시대에 히파티아는 소위 과학과 종교의 충돌에 희생당한 초기 순교자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폭동이 끊이지 않던 도시 알렉산드리아의 추잡한 권력 다툼이 빚어낸 결과였다. 책과함께 제공

마지스테리아
과학과 종교, 그 얽히고설킨 2천년 이야기
니컬러스 스펜서 지음, 전경훈 옮김 l 책과함께 l 4만3000원

과학과 종교, 종교와 과학. 사실 오랫동안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다. 아니 긴 세월 과학은 종교(혹은 권력)의 발아래 있어야만 했다. 물론 권력지형이 조금 바뀌었다. 최근에는 그간 종교의 역할이라고만 생각했던 인간 존재의 근원을 찾는 데 과학이 적잖은 역할을 하고 있다. “종교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영국의 싱크탱크 테오스의 선임 연구원 니컬러스 스펜서는 ‘마지스테리아’에서 과학과 종교는 역사적으로 배타적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상호보완하며 서로의 영역을 발전시켜 나갔다고 주장한다. 지은이는 서론에서 “과학과 종교의 실제 역사는 훨씬 더 복잡하고 흥미롭다”면서 두 영역은 앞으로도 “인간 존재 및 그 본성과 미래에 관한 활기찬 대화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고 명토 박는다.

‘마지스테리아’(Magisteria)는 교도권(敎導權)을 뜻하는 라틴어 마지스테리움(Magisterium)의 복수형으로 “가톨릭교회에서 복음 선포와 관련된 교황을 비롯한 주교들의 권위 있는 가르침이나 가르치는 권한”을 의미한다. 신학자의 교리 해석, 나아가 진리를 탐구하는 과학자들의 영역 역시 교회 권한이라는 오랜 천명이 바로 마지스테리아인 셈이다.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는 이 개념을 가져와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정립”하고자 노력했는데 바로 NOMA(Non-overlapping, Magisteria), 즉 “겹치지 않는 마지스테리아”다. 굴드는 “과학과 종교가 서로 충돌해서도 안 되고, 충돌할 필요도 없이 양립할 수 있다”고 보았다. 지은이는 굴드 주장에 동의하면서도 “겹치지 않는”이라는 대목에 이의를 제기한다. 역사적으로 과학과 종교는 대립한 듯 보이지만, 어떤 지점에서는 어깨를 겯고 서로 입지를 다져나갔기 때문이다.

‘스코프스 원숭이 재판’이 절정에 이른 마지막 날에 미국 테네시주 데이턴의 법원 잔디밭에서 클래런스 대로(오른쪽 서 있는 인물)가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맞은편에 앉아 있는 인물)을 반대 심문하고 있는 모습. 책과함께 제공

415년 3월 로마의 철학자이자 천문학자, 수학자 히파티아는 일단의 그리스도인 무리에게 피격을 받았다. 기록에 따르면 광신도들은 히파티아를 고문했고 끝내 시신을 불태웠다. 이 이야기는 “광신적인 그리스도교 세계의 히스테리에 비해 냉정하고 이성적인 고전 세계의 논리가 얼마나 우월”한가를 보여주는 만만한 소재였고, 어떤 이들에게는 “가톨릭교회의 사악함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사건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히파티아는 종교의 피해자도, 과학의 순교자도 아닌 “오랜 세월 지속된 알렉산드리아 사회의 흉포한 권력 다툼에 따른 희생자”일 뿐이다. 숱한 작가들에 의해 재가공된 이야기들이 과학과 종교의 틈을 적잖이 벌려 놓은 셈이다.

과학과 종교가 대립각은 고사하고 한 몸처럼 움직인 때도 있었다. 9세기 이후 특히 “바그다드에 근거지를 둔 아바스 칼리파국에 국한되지 않는 이슬람의 영토에서는 고전 세계의 무엇과 비교해도 대등한 과학적 사고와 성취를 자랑”했다. 하지만 “근대성, 권력, 식민주의, 문명 충돌” 관점에서만 이슬람을 읽어낸 서구의 시각 탓에 “이슬람 과학”은 간과되거나 아예 무시되었다. 흥미로운 건 이슬람 과학이 이슬람 신앙의 실천에 적잖은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이슬람의 발흥과 더불어 시작된 메카를 향한 기도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동서로 8000킬로미터가 넘는 지역에 펼쳐진 이슬람 제국 안에서” 어느 방향에 메카가 있는지 단박에 알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방향을 더 정확히 측정하려는 노력”이 계속 이어졌고, 결과적으로 이는 “이슬람의 천문학, 기하학, 삼각법 발전의 촉매”가 되었다.

감옥에 갇힌 갈릴레이 갈릴레오의 모습. 갈릴레오는 논쟁에서 지느니 친구를 잃는 편을 택할 정도로 자신의 생각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조차 격렬한 충돌로 바꾸어 놓는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책과함께 제공

과학과 종교의 대립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출처를 알 수 없는 갈릴레오의 말 “그래도 지구는 돈다”일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촌극은 1925년 여름, 미국 테네시주 데이턴에서 벌어졌다. ‘원숭이 재판’으로 더 잘 알려진 이 재판에서, 과학교사 존 스코프스는 공립학교 내에서 진화론을 가르치지 못하도록 한 테네시주 법률을 어겼다는 이유로 벌금형에 처해졌다. 재판 과정은 당시 미국 전역의 초미의 관심사였는데, 200명이 넘는 기자와 사진사, 라디오 기술자, 영상 촬영팀이 재판정을 메웠다. “근본주의와 반(反)진화론 지지”가 급격히 늘어났지만, 이후 미국 전역에서 전개된 상황은 또 달랐다. 진화론 교육을 금지한 반진화론 법안이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헌법에 어긋난다는 인식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종교와 과학은 서로의 승리를 주장했지만, 지은이는 세부 내용을 보면 “다들 전쟁이라고 부르는 상황에 희생”되었을 뿐이라고 강조한다. 지은이가 과학과 종교가 때론 화합하고 때론 반목하는 상황들을 교차해서 보여주는 이유는 두 영역이 서로의 역사를 가진, 즉 (그것이 어디든) 어느 일방의 힘이 작용한 역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2000여년 동안 과학과 종교가 얽히고설킨 이야기를 세밀하게 파고든 이유는 두 가지 질문, 즉 “인간이란 무엇(혹은 누구)인가?”, “누가(혹은 무엇이) 그걸 말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다. 신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어떤 방식으로든 그 자리를 지킬 것이고, 과학은 날로 발전하여 새로운 세계를 열어줄 것이다. 결국 과학과 종교는 인간의 삶에, 지난 2000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또 얽히고설킬 것이다. 물론 과학과 종교만이 인간 삶을 좌지우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현대 과학이 낳은 ‘인공지능’은 오랫동안 과학과 종교가 천착한 두 가지 질문을 고스란히 반영할 수밖에 없다. 지은이는 현상은 암울해 보이지만, 인공지능을 두고 과학과 종교는 새로운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과학과 종교의 수많은 상호작용의 중심에 인간이라는 동물의 다층적이고 다양한 본성이 놓여 있다면, 인공지능의 시대는 인공지능 옹호론에 직면해 대화를 중단하기보다 강화할 공간을 열어젖힐 수 있을 것이다.” ‘마지스테리아’는 과학과 종교 2000년의 역사를 통해 인간 본질에 대한 오랜 탐구의 여정, 과학과 종교에 대한 인류의 관심이 새로운 관점에서 촉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장동석 출판문화도시재단 사무처장, 출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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