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화가 번역한 ‘청년에게 고함’ [책&생각]

한겨레 2024. 4. 26.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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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길을 잃은 듯 황량한 기분이 들 때 가끔 찾아 읽게 되는 책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홍세화 선생이 "오늘 나는 청년에게 말을 건네려고 합니다. 마음과 정신이 이미 늙어 버린 나이 든 분은 이 소책자를 읽으며 눈을 피로하게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분들에게는 제가 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청년에게 고함'을 번역한 것도 우연일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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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원의 길 위의 독서

청년에게 고함
130여 년 전 한 아나키스트의 외침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 지음, 홍세화 옮김 l 낮은산(2014)

마음이 길을 잃은 듯 황량한 기분이 들 때 가끔 찾아 읽게 되는 책이 있다.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이 쓰고, 홍세화 선생이 옮긴 ‘청년에게 고함’이다. 크로포트킨은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3곳의 영지에 1천2백여 명의 농노를 소유하고 있는 귀족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 4살에 일찌감치 어머니를 잃은 그는 여느 귀족 자제들처럼 가정교사의 최고급 교육을 받으며 유년기를 보냈다.

15살에 귀족들만 입학 가능한, 황제의 궁정근위로 임명되어 출세가 보장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근위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사관학교를 수석 졸업한 그는 황제를 호위하는 근위시종무관으로 일하던 중 악명 높은 유형지였던 시베리아 근무를 자청한다. 크로포트킨은 미개척지를 탐험하며 지리학과 동물의 생태 환경 등을 연구하는 한편, 빙하에 대한 지질학 논문을 작성하는 등 과학자로 명성을 얻었다. 군에서 퇴역한 뒤 지리학회에 정식회원으로 선출되었으나 그는 사랑하는 과학자의 길을 버리고 혁명가의 길을 선택했다.

남부러울 것 하나 없는 부유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그였지만, 주변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전제정치의 공포와 빈곤 속에서 신음하는 것을 목격한 뒤 자신의 삶을 고통 받는 민중을 위해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아나키스트가 된 크로포트킨은 러시아로 돌아와 노동자들과 함께 소모임 활동을 하다가 비밀경찰에 적발당해 3년여 동안 감옥에 투옥된다. 감옥에서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던 그는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극적인 탈옥에 성공한다. 이후 30여년에 걸친 망명생활 동안 그는 당시 서구 제국주의를 떠받치고 있는 ‘우승열패’의 사회진화론에 맞서 ‘만물은 서로 돕는다’는 상호부조론을 내세우며 아나키즘 운동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부유한 귀족으로 태어났지만, 가난한 망명자가 되었고, 혁명가의 삶을 살았지만, 타인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평생을 스스로 희생하면서도 이를 명예로 여기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홍세화 선생이 “오늘 나는 청년에게 말을 건네려고 합니다. 마음과 정신이 이미 늙어 버린 나이 든 분은 이 소책자를 읽으며 눈을 피로하게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분들에게는 제가 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청년에게 고함’을 번역한 것도 우연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모두가 선망하는 대학에 입학했으나 학생운동에 투신했다가 제적되는 등 순탄할 수 없는 시대에 태어난 탓에 세속적인 출세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크로포트킨과 마찬가지로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20여년간 파리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택시운전사로 일했다. 그가 귀국 이후 걸었던 삶의 행보 역시 그러하다.

이 책에서 크로포트킨은 “그동안 쌓아 올린 지성이나 능력과 학식을 활용하여 오늘날 비참과 무지의 나락에 떨어져 신음하는 사람들을 도울 날을 꿈”꾼다면, 먼지 가득한 창문으로 햇빛 한 줌도 통과할 수 없는 ‘파우스트의 서재’를 벗어나 실천하라고 말한다. 홍세화 선생은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곳마다 그가 있었다. 그는 이름을, 시간을, 마음을, 피와 땀을 아낌없이 내어주었다. 언젠가 홍세화 선생은 바츨라프 하벨의 시를 인용해 “일단 내가 시작해야 하리, 해보아야 하리. 여기서 지금, 바로 내가 있는 곳에서, 다른 어디서라면 일이 더 쉬웠을 거라고 자신에게 핑계 대지 않으면서”라고 말했다. 말하는 것과 사는 일은 서로 다른 법이지만, 그는 정말 드물게도 이 둘을 일치시킨 삶을 살았다.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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