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소송, 상대를 굴복시키려 하면 모두가 '지옥행'

류하경 변호사 2024. 4. 26. 05:0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류하경의 불온한 사건첩] 나를 바꾸려는 노력이 없다면…이혼하기 쉬운 나라가 행복한 나라

결혼은 행복인가

변호사 일을 시작하고 꿈이 하나 생겼다. 제주도에 내려가 자전거 타고 낚시 하고 서핑을 즐기며 유유자적 사는 꿈이다. 함께 할 짝이 있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도 한 적이 있다. 그래도 결혼 제도에 편입되는 인생 계획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혼 사건을 진행하면서 안 좋은 모습들을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이가 마흔 가까이 되면서 주위에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을 다수 목격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혼하려고 재판까지 오는 분들은 협의 이혼에 실패한 사람들이다. 구체적으로는, 재산분할이나 자녀양육권에서 의견 조율이 안 돼서다. 또는 한 사람이 어떤 범죄행위나 불륜행위의 가해자, 한 사람은 피해자가 되는 경우인데, 이때는 단순히 재산, 자녀양육 문제보다 사건이 '축축하게' 진행된다. 당사자에게는 눈물, 대리인에게는 땀이 난다는 말이다.

"행복한 가정은 다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이유가 다르다." 톨스토이의 작품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이다. 마찬가지로 결혼은 한 가지 모습이지만, 이혼의 모습은 제각각이다. 제각각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사례를 일일이 다 소개하기는 어렵다.

외도는 죄인가

한번은 젊은 남성이 찾아왔다. 부인의 외도로 이혼소송을 원했다. 재판이 진행되자 부인 측은 외도를 인정했다. 그런데 그 전에 남편의 지속적인 폭행이 있었음이 드러났다. 나는 생각했다. '마음이 떠난 후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심지어 남편이 때리기까지 했으면 외도를 안 하는 게 더 희한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결혼이 종료되기 전에 누군가 외도를 하면 도덕적으로 비난하고 법적 책임까지 묻는다. 몇 해 전 까지는 간통죄로 형사 처벌하기도 했다. 그런데 연애를 할 때는 애인에게 두들겨 맞은 여성이 다른 상대와 교제하더라도 욕하지 않는다. 오히려 잘했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결혼이라는 제도가 삶을 참 부자연스럽고 이상하게 만드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혼재판을 해보면 느끼게 된다. 배우자에게 폭행을 당한 피해자라도 그가 외도를 했다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법원이 혼인 파탄의 책임에 있어서 일정 부분 책임을 따진다. 정상참작은 해주더라도 법원은 외도 자체를 아무 문제없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리고 판결과는 별개로, 외도를 한 자는 상대방과 변호사로부터 말과 글로 공격 받는다. 이게 정당하고 공정한 절차일까? 잘 모르겠다.

소송은 스트레스가 심하고 느리기 때문에 형벌 그 자체다. 결혼이라는 제도 때문에 불공정한 책임을 뒤집어쓰게 되고, 결혼이라는 제도에서 빠져나오는 과정 자체가 고통스러운 벌이다. 조직폭력배가 조직에서 탈퇴하기 위해 자기 신체를 훼손해야만 하는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폭행당한 후에 가해자 배우자를 향한 사랑이 사라져서 외도를 한 상대방 배우자가 재판에서 가해자와 판사에게 이혼을 구걸해야하고, 재판이 끝날 때까지 무간지옥(無間地獄)의 고통에 시달리는 게 옳을까. 나는 폭행 가해자의 대리인이었으나 서면에서나마 폭행을 합리화하지 않고 반성했다. 상대방의 외도에 대한 지적은 최소한으로 하고 표현에 예의를 갖추었다. 그녀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법정에서는 재판을 조속히 종결하기 위해 양측을 설득해 조정을 신청했다. 첫 번째 조정기일에 조정이 성립됐다. 재산을 반 정도로 나누고 위자료는 묻지 않는 대신에 아이는 나의 의뢰인이 양육하기로 했다. 결과만 보면 불필요한 진흙탕 싸움을 한 뒤 얻게 될 판결과 대동소이하거나 오히려 더 나았다. 말과 글로 할퀴고 다투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누구도 헤어 나올 수 없는 질식의 늪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 한 시민이 웨딩드레스 가게 앞을 지나고 있다. ⓒ연합뉴스

이혼하기 쉬운 나라가 행복한 나라

우리 헌법과 민법은 결혼을 너무 신성시한다. 동아시아 유교문화 특성도 있겠고, 20세기 해방 이후 개발·성장 중심, 국가에 의한 중앙집중식 자본주의를 급격히 진행하면서 국가가 '복지'는 사사로운 것,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면서도 그 필요성은 무시할 수가 없기에 복지 또는 일상적인 복리후생의 책임을 결혼에 의한 가정의 울타리 안으로 다 밀어넣는 식으로 나라를 설계한 탓이다. 그래서 결혼을 통한 가족구성은 국민의 신성한 필수 의무인 양 되어 왔다. 이는 곧 이혼을 죄악시 하고 반사회적 행동, 반국가적 이기주의로 여기는 풍토로 자연스레 연결된다. 참으로 무서운 역사, 숨 막히는 사회 분위기다. 한편 우리가 몽매(蒙昧)한 탓도 있다. 남들 눈을 의식하고 남들과 똑같이 사는 것을 안전하게 생각하며 그렇지 않게 사는 것에 대해 공포를 느끼는 한국 사회 특유의 변질된 집단주의. 이 독특한 집단의식은 위 설명한 국가의 기조를 무비판적으로 떠받치는 절대적 요소가 된다.

서류 업무만 봐도 부부관계를 만드는 절차는 간단한데 그 관계를 깨는 절차는 대단히 복잡하고 어렵게 해 놨다. 법률상 이혼청구 자격 및 이혼사유를 봐도 그렇다. 미국, 유럽을 비롯한 다른 많은 나라들은 이혼사유로 '파탄주의'를 택한다. 즉 객관적으로 볼 때 혼인이 더 이상 유지되기가 어려운 '파탄'상태임이 입증되면 법원에서 이혼이 가능하다. 그 이혼청구와 입증은 부부 중 누구라도 하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유책주의'라고 해서 혼인 파탄에 책임이 있는 자는 이혼을 청구할 수 없도록 해놨다. 외도를 한 당사자가 이혼청구를 하면 그 부부관계가 아무리 처참한 파탄 상태여도 소송은 바로 기각이 된다. 이게 타당한가. 반대의 목소리가 높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혼을 하기가 까다로운 그런 제도적 상태에 있다.

민법상 이혼사유 법률규정도 열거식으로 만들어놨고 단 6개에 불과하다. 민법 제840조는 △ 배우자에 부정한 행위가 있었을 때 △ 배우자가 악의로 다른 일방을 유기한 때 △ 배우자나 그 직계존속으로부터 심히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 자기의 직계존속이 배우자로부터 심히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 배우자의 생사가 3년 이상 분명하지 아니한 때 △ 기타 혼인을 계속하기 어려운 중대한 사유가 있을 때 등 6가지 사유를 재판상 이혼의 원인으로 정하고 있다. 물론 위 6개 사유 중 '기타' 부분을 넓게 해석하는 방법으로 법원이 운영의 묘를 부리고는 있으나 그래도 그 외 5개 구체적인 사유가 보여주는 중대성 수준만큼 '기타'사유가 인정되어야 이혼사유로 포섭될 수 있기 때문에 어렵긴 어렵다. 즉 '파탄주의'를 기반으로 한 외국처럼 당사자 의사에 의한 자유로운 재판상 이혼은 대단히 어려운 상황이다.

그래서 이혼을 안 해주고 버티는 일이 부지기수로 일어난다. 잘못을 저지른 배우자의 상대방 배우자는 분노에 휩싸이기 마련이고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복수는 이혼을 안 해주는 것이다. 유책 배우자는 속이 터질 지경이다. 피해자 배우자도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그래도 이혼을 안 해준다. '누구 좋으라고?'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이 대사는 현실에서는 더 자주 등장한다. 내가 괴롭더라도 상대방을 괴롭히는 형국이다. 국가가 '유책주의', 이혼사유 열거주의를 택함으로써 이런 비극상태를 조장하는 셈이다. 부부관계가 파탄난 게 분명한데, 이 가정이 유지되면 될수록 모두의 불행만 커질 게 뻔한데 국가가 이혼을 강제로 막는 형국이다. 이혼하기 어려운 나라는 불행한 나라다. 이혼하기 쉬운 나라가 행복한 나라다.

모두의 패배

험난하게 끝까지 간 이혼소송 있었다. 부부간에 큰 사고가 있진 않았지만 돈과 자존심 문제가 뒤섞여 10년 이상 꼬인 사례였다. 이쪽에서 A를 말하면 저쪽에서 B를 말하고, 다시 이 쪽에서 반박하면서 C를 말하는 식으로 재판이 진행됐다. 결혼생활 동안 묵혀둔 자잘한 에피소드들이 대하드라마처럼 쏟아졌다. 양측은 서로가 지쳐가는 모습을 관찰하고 있었다. 내가 다치더라도 상대방에게 한 방이라도 더 먹이려고 이성을 잃은 사람들처럼 보였다. 쌍방 변호사들은 당사자들의 원초적인 분노와 충동이라는 강물에서 제 한 몸 빠져나오기도 어려웠다. 판사도 여러 번 조정을 시도했으나 당사자들의 강한 거부로 번번이 결렬되었고, 어쩔 수 없이 상호 주장·반박이 끝날 때까지 재판만 열어주고 있었다.

그렇게 2년이 지나갔다. 어느 날 재판 직후 상대방 어머니가 법원 복도에서 내 팔을 붙잡고 면전에 소리쳤다. "우리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야 이 XX년아!" 그 순간 '저는 남자인데요'라고 대답할 뻔했다. 그 어머니는 가족들의 만류로 멀어져가면서도 나를 향해 '년'이 들어가는 욕을 몇 번 더 했다. 가만히 복기해보니 그 어머니는 내게 욕을 한 게 아니라 나를 며느리로 간주하고 화를 쏟아낸 것이 아닐까 싶었다. 며느리인 내 의뢰인도 바로 앞에 있었는데 왜 그랬을까. 아마도 차마 옛정이 떠올라서, 어떤 복잡한 마음이 들어서 당사자가 아닌 내게 욕설을 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 것이다.

얼마 후 나온 1심 판결은 양측 모두의 마음에 차지 않았다. 애초 상대의 완전한 굴복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런 성격의 판결이 나올 가능성은 일반적으로 희박하다. 의뢰인은 나를 쌀쌀맞게 대했다. 나는 대리인으로서 실패했다. 2심은 맡지 않겠다고 했다.

▲ 임영일 통계청 인구동향과장이 16일 오전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2022년 혼인·이혼 통계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함께하는 삶이란 무엇인가

한참의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오후였다. 백발의 노부부가 사무실로 찾아왔다. 앉자마자 남편은 "변호사님, 이 사람이 이혼을 하자고 합니다. 부디 제가 잘못한 게 없다는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할아버지, 판결 내리는 사람은 판사고요, 저는 변호사여서 말씀만 들어 드릴게요." 그러자 부인이 조곤조곤 남편에 대해 얘기한다. 과수원 낙엽 청소를 안 하고, 양치 후 거품을 욕조에 뱉고, 강아지에게 소리를 지른다는 등의 '혐의'​였다. 부인 얘기로 한 시간 정도가 지났다. 내가 말을 할 차례인 것 같았다.

"할아버지, 이제 할머니 이야기대로 잘 해주세요." 남편은 반박 주장이 없었고 부인이 일어나자 따라 나섰다. 창밖을 보니 두 사람이 나란히 맞은 편 백반집으로 들어간다. 백반집 옆에는 초록 잎을 품은 나무가 서 있었다. 그 너머 보이지 않는 뒤편, 내 상상 속의 제주도 바닷가에서 누군가의 손을 잡고 있는 나의 모습과 혼자 서있는 나의 모습을 번갈아가면서 상상해봤다.​ 함께하는 삶이란 어떤 의미일까. 함께 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결혼 계약서에 도장만 찍으면 되는 일인가. 고민이 밀려온다.

이혼 축하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려면 결혼이라는 제도, 어떤 계약, 형식적인 약조가 중요한 게 아니라 계속하여 상대방을 배려하고 상대방에게 매력 있는 사람이 되도록 자신을 변화시키는 '노오력'이 필수라고 생각한다. 배우자가 나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지, 애를 써야지, 그저 '우리는 결혼한 부부야', '아이들 때문에 기어이 가정을 유지해야해', '우리 결혼식에 온 사람들한테 쪽팔려서 이혼은 안돼' 이런 이유로 결혼관계를 이어나가는 것은 서로의 인생을 부패시키는 일이다.

노력을 하기 싫거나 도저히 사랑의 감정이 살아나지 않으면 깔끔하게 이별하고 각자 행복한 삶을 찾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직 결혼을 안 해봐서 하는 말이라 여길지는 모르겠으나, 결혼을 안 해본 입장에서 기혼자들의 분쟁을 보면 나 역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다. 사회에서 '정상'적인 인생 경로로 인정하는 '정상' 부부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맹목에서 비롯되는 집착과 허위의식 때문에 지옥 같은 결혼생활을 놓지 못하는 이들을 볼 때 그렇다. 길게 보면 그런 억지 결혼생활이야말로 자아와 심신의 건강을 파멸시켜서 '정상' 범주에서 자신을 점점 멀어지게 만드는 길이고, 결혼식 때 왔던 하객들을 포함하여 본인을 사랑하는 주변 사람들이 원하는 길이 절대 아니며, 자녀들에게도 성장 시기에 치명적인 상처만 주는 길이다.

우리는 인터넷으로 몇만 원짜리 물건을 살 때도 여기 저기 상점들을 접속해서 비교하고, 구매자 리뷰를 읽어보고, 성분과 원산지를 조사하는 등 계획적이고 상당히 꼼꼼한 행위를 한다. 그런데 인륜지대사라고 하는 결혼을 할 때는 대단히 심하게 그렇지 않은 듯하다. 인간으로서의 상대를 너무 겪어보지 않은 채, 정말 잘 모른 채 쉽게 믿고, 혼기(婚期)라고 하는 이상한 사회기준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특정 나이 시점을 기한으로 두고 조급함 속에서 경솔하게 결혼을 결정해버린다. 상대방의 직업, 경제력, 학벌, 가족의 사회적 배경 등 껍데기의 속물적 조건이 어느 정도 만족이 되면 결혼 참 잘했다고 자타(自他)가 평가한다.

나는 특별하게 친한 사람 외에는 웬만해선 결혼식장에 가지 않는다. 진심으로 축하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경솔하게 결혼 상대를 구한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구심에 더하여, 대형 웨딩홀에서 자판기처럼 20분 단위로 커플들이 교대하면서 이어지는 컨베이어 공장식 예식, 그 곳에서 낭비되는 것으로 보이는 장식들과 복장, 지나친 음식들, 그리고 웨딩 관련 업자들에게 상당 부분 넘어가는 사람들의 축의금과 혼인 당사자들의 지출을 생각하면 이것이 과연 '정상'인지 어지러워지는 지경에 이르러서 그렇다. 그래서 좀처럼 결혼식장으로 가기가 어렵다.

반면, 생전 처음 만나 서로 아무런 애정도 친밀함도 없는 이혼사건 의뢰인의 이혼이 법원에서 성공에 이르면 가슴 깊은 곳에서 진심어린 축하가 나온다.

[류하경 변호사(salixshine@naver.com)]

Copyright © 프레시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