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밥상] 제철 맞은 정어리 한쌈, 고소한 봄이 입안 가득

김보경 기자 2024. 4. 26.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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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밥상] (51) 전남 순천 ‘정어리쌈밥’
일부 지역에서 큰 멸치 ‘정어리’라 불러
3월 중순~5월 지방 많아 육질 부드러워
양념한 햇고사리 넣고 끓이면 맛 ‘일품’
무로 달큼함 추가…방아잎 비린 맛 잡아
멸치조림 위에 방아잎을 올려 끓여보자. 매콤·달콤한 양념맛 끝에 향긋함이 맴돈다. 순천=김도웅 프리랜서 기자

 

지역마다 봄을 알리는 음식이 있다. 전남 순천 ‘정어리쌈밥’이 그렇다. 정어리쌈밥은 멸치조림을 쌈 채소에 싸 먹는 음식으로, 멸치가 많이 잡히는 남해 근처 순천·여수·광양 일대에서 먹는다.

멸치조림을 싸 먹는 데 정어리쌈밥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정어리와 멸치가 닮아서다. 정어리와 멸치는 모두 청어목 생선에 속하고 튀어나온 입과 은색 비늘을 가진 생김새가 비슷하다. 하지만 크기는 확연히 다르다. 정어리는 25㎝ 정도고 멸치는 아무리 커도 15㎝를 넘지 않아 크기로 구별할 수 있지만 아직 덜 자란 어린 정어리와 멸치는 혼동하기 쉽다. 그런 탓에 전남 일부에서는 크기가 큰 멸치를 정어리라 부르게 됐고, 지금의 정어리쌈밥으로 굳어졌다는 게 정설이다.

정어리쌈. 상추 위에 밥, 고사리, 정어리(멸치)를 소담하게 쌓아 올렸다. 상추 사이로 조림 국물이 흐르지 않게 잘 싸서 입에 넣어야 한다. 순천=김도웅 프리랜서 기자

정어리쌈밥을 봄의 음식이라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어리와 햇고사리는 봄이 제철이라 이때 먹어야 가장 맛있다. 3월 중순에서 5월까지 남해안에서 잡히는 정어리(멸치)는 지방이 풍부해 부드러운 육질과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멸치는 크기가 작은 순으로 세멸·소멸·중멸·대멸이라고 하는데 정어리쌈밥에 들어가는 건 대멸이다. 같은 시기에 나오는 햇고사리는 식감이 연하고 특유의 향을 잘 느낄 수 있다. 고사리는 씹는 맛이 좋아 고소한 정어리와 잘 어울린다.

순천에선 여행객이 많이 오가는 순천역 주변에 정어리쌈밥을 파는 백반집이 대여섯군데 있다. 연향동 골목에 있는 ‘루디아 쌈밥’은 소문난 정어리쌈밥 맛집이다. 정어리쌈밥을 찾는 손님이 많아 오후 2시가 넘으면 재료가 소진돼 맛보기조차 힘들 정도다. 식당 주인인 엄정자씨(63)는 손님상에 나갈 멸치를 손질하는 게 가장 큰일이란다. 가까운 바닷가 여수에서 정어리가 들어오면 머리와 내장을 일일이 떼어 손질한다. 말린 멸치가 아니라 생멸치로 만드는 요리라는 점에서 독보적이다.

머리와 내장을 손질한 정어리.

“생멸치가 들어오는 날엔 손질하느라 시간을 다 써요. 한번에 10kg 정도 들어오는데 손질만 3시간이 훌쩍 넘지요. 손이 많이 가도 손님들이 봄이 되면 꼭 찾는 메뉴라 매년 내놓죠. 3∼5월 제철에 먹어야 뼈가 안 뻐시고(‘뻣뻣하고 억세다’의 전라도 방언) 맛있어요.”

정성스레 손질한 정어리가 준비되면 다음은 햇고사리를 양념할 차례다. 봄에 나온 햇고사리를 재래식 된장, 고춧가루, 마늘을 넣고 양념이 잘 배어들도록 재워둔다. 밥상에 올리기 전에 양념 된 고사리 위에 정어리를 한움큼 올리고 물을 부어 보글보글 끓인다. 엄 사장은 옛날 어머니가 해주셨던 방식대로 미리 조려둔 큼지막한 무를 같이 넣고 끓인다.

“무를 넣으면 소화도 잘되고 채소의 달큼한 맛이 올라와 맛이 더 깊어져요. 정어리쌈밥엔 기본적으로 정어리랑 고사리가 들어가는데, 고사리 대신 우거지를 넣기도 하고 생선의 비린 맛을 잡는다고 제피(초피)가루나 후추를 넣기도 해요.”

정어리쌈밥 한 상이 차려지자마자 익숙한 생선조림 냄새가 난다. 정어리쌈밥이라 하면 비릴 것 같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스치지만 신선한 정어리에 ‘방아잎’을 더하면 등푸른생선 특유의 비린 맛이 깔끔하게 잡힌다. 한국의 고수라고도 부르는 방아잎은 깻잎과 비슷한 모양이고 박하와 깻잎이 섞인 색다른 향이 난다. 중독성 있는 방아잎 맛을 아는 사람은 맛있게 끓는 조림 위에 정어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한가득 올려 먹는다.

숨이 죽은 방아잎과 잔뜩 양념을 머금은 고사리, 그리고 통통하게 살이 오른 정어리를 보니 군침이 돈다. 일단 밥에 올려 한입 먹어본다. 크기는 작지만 식감과 맛이 풍부하다. 잘 익은 고사리는 씹을 때마다 감칠맛이 느껴진다. 밥상은 ‘남도밥상’이라고 했던가.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반찬이 푸짐하게 나오지만 쌈을 싸기도 바쁘다. 상추 위에 고사리 한줄기, 정어리 세마리, 밥 한 숟갈과 방아잎·마늘까지 넣으면 큼지막한 한 쌈 완성이다. 입 안 가득 고소한 정어리와 육즙이 뿜어져 나오는 듯한 햇고사리를 음미해보자. 한동안 말이 없어도 괜찮다. 밥에 정어리조림을 한술 떠 비벼 먹는 것도 좋다.

국물만 우리고 버리던 정어리의 새로운 발견이 궁금하다면 이번 주말 순천에 들러 정어리쌈밥을 맛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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