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찰이 하룻밤 56명 광기의 살인…그 마을 모두 초상집 된 날[뉴스속오늘]

김소연 기자 2024. 4. 26.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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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기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우범곤 사진/출처=KBS '속보이는 TV 인사이드' 캡처

42년 전 오늘, 한밤중 평화롭던 시골 마을에 때아닌 총성이 여러 발 울려 퍼졌다. 동트기 전까지 발생한 사상자 숫자는 총 90여명, 사망한 주민도 56명에 달해 '광기의 살인'이었다. 일명 '우순경 사건'이라 불리는 경남 의령군 궁류면 총기 난사 사건이다.

이 사건은 공권력의 상징이자, 주민 안전에 최우선 책임이 있는 경찰이 살해범이었다는 점에서 충격을 안겼다.

작은 마을에서 하룻밤 사이 56명이 살해돼 최단 시간에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낸 사건으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국내뿐 아니라 총기가 허용돼있는 해외에서도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최악의 총기 난사 사건이다.

당시 이 사건은 범인인 우범곤 순경이 청와대에서 좌천된 인사였다는 점에서 서슬 퍼런 정권 아래 은폐됐다. 2022년에야 사건이 수면 위로 떠 오르면서 경남 의령군은 42년이 지난 올해에서야 희생자들의 넋을 기릴 수 있게 됐다.

경남 의령군 집마다 제삿날이 4월 26일인 이유... 잔인했던 그날의 기억

정확히 42년 전 이날인 1982년 4월 26일 밤, 경상남도 의령군 궁류면에서는 반상회가 열리고 있었다.

주민들이 한창 마을 운영방안을 논의 중일 때 갑자기 정체를 알 수 없는 총소리가 울려 퍼진다. 반상회 때문에 모여 있던 마을 주민들은 외부에서 들리는 소리에 순식간에 공포에 질렸다.

그때, 누군가 반상회 자리에 뛰어 들어와 주민 전 씨의 여동생이 사망했다고 알렸다. 전 씨의 여동생은 우체국 교환원이었다. 황급히 찾은 우체국에는 전 씨의 여동생을 비롯해 모든 우체국 직원이 숨져 있었다.

총소리는 이어졌다. 우범곤은 그날 밤 의령군 일대 4개 마을을 돌아다니며 광란의 살인을 자행했다. 반상회 때문에 모여있던 주민들도 결국 총을 맞았고, 반상회 때문에 잠들지 않고 있던 집들도 모조리 희생양이 됐다. 범인은 불을 켜 놓은 집마다 찾아다니며 살해했다.

우범곤 총기 난사사건이 보도된 경향신문 1982년 4월27일자/사진=경향신문 캡처

1명의 가해자에 마을 전체가 무방비로 당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우범곤의 직업이 경찰로, 마을 주민들도 이를 알고 있었던 탓이다. 우범곤은 사건 당시에도 근무복을 착용하고 있어 그가 소총과 수류탄을 들었어도 주민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그에게 문을 열어줬다.

그는 평촌리 상갓집에 들러 부의금 3000원(현재 약 4만원)을 내고 문상객들과 10여분간 어울려 술을 마시다가 상주 일가족 등 20여명을 사살하기도 했다. 특히 상갓집을 피바다로 만들고 떠나려다 뒤에서 갓난아기 울음소리가 들리자 되돌아가 아기 역시 사살하는 참극을 빚었다.

새벽 5시, 그는 마산시·진주시의 경찰기동대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평촌리 일가족을 찾아가 깨운 뒤 갖고 있던 수류탄 2발을 터뜨려 자폭했다.

화를 못 참던 우 순경, 동거녀와의 사소한 다툼이 화 불러

경찰이었던 그의 범행은 사소한 데서 비롯됐다. 우 순경은 1981년 12월 30일 궁류지서로 전근을 온 뒤 이듬해 2월 이웃집 전 씨와 사귀게 됐다. 그리고 그해 3월 전 양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 양의 집에 얹혀살며 동거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직전 101경비단 소속으로 청와대 경호를 맡았었다. 그러나 폭력 성향으로 인해 근무 부적격자 판정을 받고 경호에서 제외, 궁류지서로 좌천됐다. 가뜩이나 집안이 가난해 열등감이 있었던 우 순경의 폭력 성향은 더욱 짙어졌다.

문제의 그날, 동거녀인 전 씨는 집에서 자고 있던 우 순경 가슴에 앉은 파리를 잡으려고 가슴을 때렸다. 전 씨가 자신을 만만히 봤다고 생각한 우 순경은 소주 2병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 전 씨를 때렸고, 말리던 이웃 주민도 폭행했다.

이후 우 순경은 이성을 잃고 예비군 무기고에서 무기를 챙겨 우체국으로 가 3명을 사살하고 통신망을 차단했다. 이어 무차별 살인이 시작됐다. 범행 당시 그가 쏜 실탄은 총 135발이었다. 해병대 시절 특등사수로 유명했다던 우 순경이었다.

그의 무차별 살인 소식을 들은 동료 경찰들은 우 순경을 막기는커녕, 반대 방향으로 출동하는 등 도피행각을 벌여 화를 키웠다. 자정쯤 도착한 전투경찰들도 어두컴컴한 시골에서 피격을 우려해 숨어있어 피해가 커졌다. 우범곤은 해병대 시절 특등사수로 유명했다.

의령군 4.26 희생자 추모비/사진=뉴시스, 의령군
올해 42년 만에 첫 위령제...전두환 정권 보도 통제 탓
이 사건은 그러나 당시 서슬 퍼런 정권 탓에 은폐됐다. 전두환 정권은 이 사건이 알려지자 전국적으로 여론이 폭발, 내각 사퇴 압력에 직면했다.

민심을 달래려 전두환 정부는 빠르게 후속 조치를 취했다. 궁류지서장 등을 파면·구속 기소하고 관계자 수 명을 직위해제시키는 등 선 징계 후 조치했다. 피해자들에게는 사고 이틀 만에 위로금과 장례비를 지급하고 세금 감면, 자녀 학비 면제 등의 혜택도 줬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사건에 대한 언론 보도를 통제했고, 백서와 위령비도 만들지 않았다. 이에 사망자에 대한 정확한 통계가 없다. 추모제 역시 찾아보기 힘들었다.

쉬쉬했던 사건은 지난 2021년 김부겸 총리와의 면담 이후 위령제 추진위원회가 구성되면서 수면 위로 다시 올라왔다. 추모공원도 건립됐다.

이에 의령군은 올해 우 순경 사건 후 42년 만에 첫 추모 행사를 연다. 26일 의령 4·26추모공원에서 군 주관 '의령 4·26위령제' 및 추모식 행사가 진행된다.

김소연 기자 nicksy@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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