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Love Myself의 함정과 한계를 넘어

경기일보 2024. 4. 26.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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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두영 천주교 수원교구 신부

‘Love Myself·나를 사랑하기.’ 현대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말이다. 그러나 영적식별에서 보면 한계가 분명한 말이다. ‘내가 나를 사랑한다’는 건 유한한 자신에게서 사랑의 원천을 둔다는 것이고 심지어 그 종착지마저 자기라는 것이다. 즉, 자기 안에 맴도는 것이다. 한데 사랑은 물과 같은 것이다. 아무리 순환 펌프를 돌려도 새 물을 갈아주지 않는 수조는 금방 때가 끼고 죽은 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럼 천주교인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나?’ 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천주교인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인해 자신도 사랑한다. 그래서 그 사랑을 전하길 우선한다.” 원천이 자기가 아닌 것이며 그 종착지도 자신이 아닌 것이다. 물을 가둔 수조가 아니라 ‘통로’로 산다는 것이다.

비종교인도 예수의 가르침은 대강 안다. 원수 사랑으로 대표되는 극단적 사랑과 용서다. 한데 이렇게만 알면 오히려 예수의 가르침을 모르는 것에 가깝다. 사실 예수는 단 한 번도 “네가 네 힘으로 누구를 용서하고, 자신을 사랑하고, 형제를 섬기고, 원수도 사랑해라. 그리고 나한테 검사 받아라. 그래서 통과되면 천국 보내줄게. 복 줄게”라고 한 적이 없다. 오히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니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어찌 열매를 맺을 수 있겠느냐. 너희는 먼저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라고 했다. 가지가 제 힘으로 열매 맺는 게 아니듯 사랑의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마르지 않는 진짜 사랑의 원천에 연결돼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그마한 내 사랑으로 뭘 하려 하지 말고 당신의 무한한 사랑의 힘을 입으라는 것이다.

가톨릭 격언에 ‘자신의 부족함과도 화해하지 못한 이가 어찌 다른 이의 부족함에 너그러울 수 있겠는가’라는 말이 있다. 한데 자신의 전존재와 화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보다 더 큰 사랑에 뒤덮이는 것뿐이다. 그때에만 비로소 자기 연민, 합리화, 나르시시즘에 빠지지 않고 참된 화해가 일어난다. 그때는 ‘이런 나라도 이토록 사랑해 주시다니 너무나 감사하다. 부정하고 싶었던 내 모습들조차 이미 품에 안고 계셨구나. 그분 마음을 아프지 않게 해드리기 위해서라도 나를 돌봐야겠다. 이렇게 큰 용서와 사랑을 받았는데 내가 누구를 심판하겠나. 아, 그렇다면 저 사람들도 이처럼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였겠구나. 그토록 귀한 존재였구나. 너무나 기쁘고 감사하다. 이 사랑에 조금이라도 응답하고 싶다. 나도 이 사랑을 전할 수 있다면’ 하게 된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되면서도 합리화하지 않고 겸손하게 되고 타인을 향한 마음이 커지며 사랑의 계명을 짐이 아니라 초대로 느끼게 된다. ‘사랑의 통로’가 된다.

그러나 ‘내가 나를 사랑한다’에 심취하는 사람들 중엔 자기합리화, 나르시시스트, 소시오패스로 빠지는 경우가 꽤 있다. 그런 이는 남을 도울 때조차 정말로 타인을 귀하게 여겨서가 아니라 자신을 사랑해서, 즉 자기만족을 위해 그리한다. 나쁘다고 할 것은 없어도 진실한 사랑은 아닌 것이고 그만큼 참된 기쁨도 없을 수밖에. 참 기쁨은 ‘Love Myself’가 아니라 무한한 사랑에 나를 열고 사랑의 통로가 되는 삶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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