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레라가 전 세계 어디서 창궐하든, 결국 이 사람만 바라본다[데스크가 만난 사람]

김창덕 산업2부장 2024. 4. 25.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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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옥 유바이오로직스 대표
세계 유일의 콜레라 백신 업체… 설립 3년차에 찾아온 ‘데스밸리’
‘20만 원 우동’ 선물로 직원 챙겨… “선진국서 돈 벌어 후진국 지원”
백영옥 유바이오로직스 대표가 23일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 본사 집무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투자 유치 실패로 회사 문을 닫을 수도 있었던 시절을 회상하고 있다. 벤처 ‘데스밸리’를 이겨낸 유바이오로직스는 2015년 경구용 콜레라 백신 ‘유비콜’(오른쪽 사진) 수출 허가를 받았고, 이에 힘입어 2017년 1월 코스닥에도 상장했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Material Description: Euvichol, Inactivated Oral Cholera Vaccine
Order qty: 1,000,000
Price per unit: 1.70 USD’

2016년 10월 17일 밤. 유니세프로부터 납품요청서가 날아들었다. 불활성화 콜레라 백신 ‘유비콜’을 100만 도스(1도스는 1회 접종분) 주문한 것이었다. 카리브해 최빈국 아이티에 긴급하게 보낼 물량이라고 했다. 계약 금액은 170만 달러. 당시 환율로 약 19억3000만 원 수준이었다. 규모는 중요치 않았다. “공식 주문이 아직 한 건도 없는데 어떻게 믿나”라는 반대에 막혀 상장예비심사 통과 가능성이 거의 사라지던 무렵이었다. 극적으로 유니세프 주문서가 도착한 건 3차 전문가 회의를 불과 몇 시간 앞두고였다. 상장예비심사 승인 통보를 받은 그해 11월 7일 백영옥 유바이오로직스 대표(62)는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백신을 개발해 공급한다는 것은 어느 날 나에게 뚝 떨어진 운명 같았다. 멈추면 더 힘드니 달렸다. 그래서 오늘이 왔다.”

유바이오로직스는 이듬해 1월 코스닥 시장에 상장했다.》




● 한국에 있는 세계 유일의 콜레라 백신 생산기지
현재 세계에서 콜레라 백신을 생산하는 기업은 딱 한 곳, 한국의 유바이오로직스다. 샨타바이오테크닉스라는 인도 기업이 있었지만 지난해 말 생산을 중단했다. 콜레라처럼 저개발국에서 많이 발생하는 공공 백신의 경우 이른바 돈이 안 되기 때문에 생산업체를 찾는 것조차 힘들다.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콜레라가 다시 유행하자 한국 백신이 유일한 희망으로 떠오른 셈이다.

유니세프가 올해 유바이오로직스에 약속한 연간 주문량은 4933만 도스로 약 1240억 원어치에 해당한다. 2016∼2023년 8년간 누적 납품량 1억3000만 도스의 40%에 육박하는 규모다. 현재 콜레라 유행 심각성으로 볼 때 연간 매출액 첫 1000억 원 돌파는 거의 확정적인 셈이다. 백 대표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보니 납기나 품질을 더 철저히 맞춰야 한다는 책임감이 크다”더니 “그래도 대량 오더를 받은 직후엔 안도감부터 들었던 게 사실”이라며 웃었다.

유바이오로직스는 국제백신연구소(IVI)의 기술 이전을 받아 콜레라 백신을 생산할 목적으로 2010년 창업한 회사다. 한국에 본부를 둔 첫 국제기구인 IVI는 ‘가능하면’ 한국 기업이 샨타바이오테크닉스에 이은 제2의 백신 생산기지가 돼 주길 바랐다. 공동 창업자 3명이 그 기회를 잡았다. 백 대표는 전문경영인으로 회사 초기에 합류했다. 공동 창업자들이 말 그대로 삼고초려를 했다고 한다. 수의대 출신에 CJ제일제당 바이오제약본부에서 18년, 한국생산기술연구원 바이오공정실장으로 4년을 지낸 최고의 현장 전문가였기 때문이다.

그가 제안에 솔깃했던 이유는 이랬다.

“비록 스타트업이지만 개인과 국가를 넘어 공공의 이익에 기여한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게다가 ‘부를 가진 자’에게서 기부받은 돈으로 ‘부를 갖지 못한 자’에게 나누는 일이잖아요.”

백 대표는 지금도 임직원들에게 “우리는 좋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회사니까 보람을 가져도 된다”고 말한다고 한다. 또 주변 지인들이 유바이오로직스 주가 전망을 물어보면 “당신이 한 주 사면 아프리카 애들이 백신 한 번 더 맞을 수는 있다”고 답한다.

그는 “어릴 때 맞았던 백신들이 모두 해외 원조로 받은 것들이었는데, 이젠 한국 기업 유바이오로직스가 없으면 전 세계가 콜레라 백신을 맞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며 “유바이오로직스가 한국이 개발원조위원회(DAC) 회원국이 된 2010년 설립된 것이 우연이 아닌 것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고 했다.

● 월급 밀린 직원들 감동시킨 ‘20만 원짜리 우동’

스타트업이, 그것도 IVI라는 국제기구와 함께 처음 백신을 만들어 본다는 게 당연히 쉽진 않았다. 우선 투자 유치가 문제였다. 자본금은 3억 원으로 시작해 유상증자를 거듭하면서 20억 원까지 늘렸지만 연구개발(R&D) 비용을 대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국내 대기업이나 대표 제약사들의 문을 무작정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 관심을 보이는 곳들이 꽤 있었음에도 투자는 번번이 무산됐다. 백 대표는 “직접 가방을 싸 짊어지고 70∼80곳은 다녔다”며 “몇몇 회사는 투자를 약속하고 실사까지 했는데 마지막에 틀어지기도 했다”고 기억했다. 실제 한 회사는 공탁금 50억 원을 걸겠다는 적극성까지 보이다 중도에 포기했다. 다른 회사는 기업 오너의 투자 승인까지 받았는데, 주금을 납입해 주기로 한 날 결정을 뒤집었다.

창업자 중에서도 이탈자가 생겼다. 3년차에 접어들던 2012년 가을부터 직원 월급이 밀리기 시작했다. 스타트업들이 성공하려면 반드시 한 번은 건너가야 한다는 ‘데스밸리(죽음의 계곡)’였다. 그해 말 백 대표는 회계 담당 직원에게 통장에 남은 잔액이 얼마인지 물어봤다. 돌아온 대답은 400여만 원. 그는 전 직원 20명에게 20만 원씩을 이체하라고 했다. 그러곤 단체 메시지를 보냈다.

‘많지는 않지만 20만 원을 급여계좌에 이체했으니 크리스마스에 가족들과 따뜻한 우동이라도 사드세요. 밀린 급여는 곧 마련해 지급하겠습니다.’

백 대표에게도 그날의 일은 너무나 생생하다. 본인도 직장 생활 20여 년간 모아온 적금, 보험 가릴 것 없이 모두 깬 것도 모자라 빚까지 지면서 회사 자금으로 넣은 상태였다. 하지만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지 못한다는 게 가장 고통스러웠다. 그때 우동이 떠오르더란다.

“우리가 어릴 때 경부선 타고 다니면 대전역에서 2, 3분 정차할 때 꼭 우동을 먹었잖아요. 시골(백 대표 고향은 경남 거창군이다)이니 장날에 읍내에 나가 우동 한 그릇 먹고 오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거든요.”

백 대표의 진심은 직원들에게도 닿았다. 춘천 공장에 출장을 갔던 박영신 국제업무 담당 전무(53·당시 생산2본부장)는 서울행 ITX를 기다리는 기차역 플랫폼에서 그 문자를 받았다. 그는 2020년 발간한 창립 10주년 사사(社史)에 이렇게 썼다.

‘태연한 척 감정을 숨기고 지내왔던 기억들이 일순간에 스치며 눈물이 솟아올랐다. 가족들과 우동을 사 먹지는 않았지만, 20만 원짜리 근사한 우동을 먹은 것처럼 뿌듯했다.’

그해 ‘20만 원짜리 우동’ 선물을 받은 직원 대부분은 여전히 회사를 지키고 있다. 현재 320명까지 늘어난 임직원들 중 그때 이야기를 모르는 이는 없다. 백 대표는 “그 시절을 함께 겪어낸 이들이 지금까지도 회사에 남아 중추적인 역할을 해주고 있다는 게 이 사업을 하면서 가장 고마운 일”이라고 했다.

2013년 5월 드디어 첫 투자 유치의 결실이 맺어졌다. IVI와 오랜 협업 관계인 빌&멀린다게이츠재단의 지원 사격에 힘입어 서울시바이오펀드가 움직였고, 녹십자와 한국투자파트너스까지 참여하면서 50억 원이 통장으로 들어왔다. 이듬해 콜레라 백신 ‘유비콜’의 임상 3상과 공장 증설이 진행됐고, 2015년 12월 세계보건기구(WHO)로부터 사전적격성평가(PQ) 인증을 획득했다.

● 선진국에서 돈 벌어 개발도상국에 베푸는 게 목표

유바이오로직스는 추가적인 백신 개발에도 한창이다. 매년 20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있는 장티푸스 백신은 필리핀에서 임상 3상을 마치고 2026년 출시를 앞두고 있다.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이남 지역을 대상으로 한 수막구균염 백신도 국제보건기술연구기금(라이트펀드), 빌&멀린다게이츠재단과 3자 공동으로 개발 중이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공공 백신만 가지고 기업을 꾸려갈 수는 없다는 게 백 대표 생각이다. 공공 백신은 물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지만, 저개발 국가에 지원되는 용도이다 보니 가격대가 낮다. 기업의 지속 성장을 위해 다른 ‘캐시카우’를 찾아야 했다. 그래서 준비 중인 다음 스텝은 바이러스 백신이다. 콜레라, 장티푸스, 수막구균염 같은 세균 백신은 주로 공공 부문에서 수요가 많지만, 바이러스 백신은 주로 선진국 시장이 크다. 호흡기세포융합바이러스(RSV)나 수두-대상포진바이러스(VZV) 등이 대표적이다. 공공 백신이 한 번 접종에 1, 2달러라면 의무 접종이 아닌 ‘프라이빗 백신’은 200∼300달러를 내야 한다.

유바이오로직스는 이미 미국 팝바이오테크놀로지와 함께 ‘유팝라이프사이언스’라는 조인트벤처(JV)도 세웠다. 유바이오로직스가 62.5%, 팝바이오테크놀로지가 32.5% 지분을 갖는다. 이 JV는 지난주 세계 최대 바이오클러스터인 미 보스턴 케임브리지이노베이션센터(CIC)에 입주했다.

인터뷰 말미 백 대표는 “먹어 봐야 맛을 알고 산에 가야 범을 잡는다”면서 “백신을 하는 사람으로서 미국 같은 선진국에 우리가 개발한 백신을 등록하는 게 남은 꿈”이라고 했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공공과 프라이빗 비중을 딱 절반씩 가져가려 해요. 선진국에서 번 돈으로 아프리카 같은 저개발 국가에 백신을 계속 싸게 공급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진 일인가요.”

처음 유바이오로직스 대표로 부임할 때 들었다던 생각과 닮아 있었다.

김창덕 산업2부장 drake0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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