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흙·썩은 과일·인디언…보이나요, 이방인의 흔적들이 [제60회 베네치아 비엔날레]

안시욱 2024. 4. 25.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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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엔 ‘비백인 여성’ 다뤘다면…올해는 ‘이방인’ 조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

지난 20일 개막한 제60회 베네치아비엔날레 미술전의 주제다. 2년 전 행사가 ‘비(非)백인 여성’을 조명했다면 올해 베네치아는 골목마다 ‘이방인’에 대한 질문으로 가득하다. 팬데믹과 전쟁, 정치·사회적 혼란으로 사람들 사이 관계가 멀어진 상황. 세계 미술인들은 그동안 소외됐던 이방인의 삶에서 무너진 공동체를 재건하기 위한 해답을 찾았다. 외국인 노동자부터 원주민, 소수 민족, 피란민까지. 각 나라가 해석한 이방인의 모습은 각양각색이다. 그중 올해 미술전의 메시지를 가장 잘 전달하며 공감을 불러일으킨 국가관 전시를 모아봤다.

미국관 94년 만에 인디언계 단독
'인디언·동성애' 정체성에 대한 고민

미국관 대표 작가 제프리 깁슨의 ‘I want to be free’. /베네치아비엔날레 제공


이탈리아 베네치아 자르디니정원. 지난 18일 알록달록한 드레스를 차려입은 한 무리가 이곳을 가로질렀다. 화려한 구슬 장식으로 치장한 이들은 북미 26개 원주민 부족에서 모인 무용가그룹. 미국관 앞에서 이들은 오지브웨 부족의 전통춤 ‘징글 댄스’를 선보이며 제60회 베네치아비엔날레 미국관 개막을 알렸다.

미국관은 아메리칸 원주민 예술로 붉게 물들었다. 고고한 대리석 빛깔을 뽐내던 외벽은 새빨갛게 칠해졌고, 입구엔 원주민 부족 깃발 8개가 걸렸다. 전시장 내부는 인디언 출신 작가 제프리 깁슨(52)의 회화와 조각, 섬유 공예 등 31점이 가득 채웠다. 미국관이 인디언계 작가를 단독 대표 작가로 내세운 건 1930년 개관 이후 94년 만에 처음이다.

깁슨은 현대 미국 인디언 미술을 대표하는 아티스트다. 전통적인 북미 원주민의 소재와 양식을 서양 현대미술과 결합한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형성했다고 평가받는다. ‘나를 둘 공간’이란 제목이 붙은 올해 미국관 전시 곳곳에는 이방인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인디언 속담이나 법조문에서 발췌한 문구를 여러 색조의 알파벳으로 새겨넣은 작품이다. ‘우리는 자유를 원한다’ ‘평화롭게 집회할 권리’ 등 텍스트를 노골적으로 표출한다. 전통적으로 ‘여성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뜨개질과 비즈아트 등 직물 공예를 전면에 부각한 점도 돋보인다. 퀴어 작가의 내면을 반영했다.

독일관 입구에 쌓인 무너진 듯 흙
튀르키예계 독일인이 느낀 '문턱' 표현

< 들어갈 수 없도록 표현한 독일관 ‘문턱’ > 베네치아비엔날레 본전시장인 자르디니정원 독일관 입구에 흙과 돌무더기가 쌓여 있다. 독일관 대표 작가 에르산 몬드타그가 조부의 고향인 튀르키예 아나톨리아의 흙을 퍼와 연출했다. /베네치아비엔날레 제공


지난 16일 이탈리아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중심 행사장인 자르디니정원. 주요 국가관이 모여 있는 이곳에 때아닌 ‘새똥 주의보’가 발령됐다. 공식 개막 5일 전 사전 공개 기간부터 연일 오픈런을 기록 중인 독일관 앞. 야외에서 1시간, 내부 설치물을 보기 위해 또 1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하늘에서 떨어지는 ‘봉변’에 당하는 방문객이 속출한 것. 독일관은 이런 기다림과 위험마저 감수할 만한 전시다. 건축가이자 큐레이터 카글라 일크(47)가 예술감독을 맡아 기획한 독일관 제목은 ‘문턱(Thresholds)’. 지난해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한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의 소설 <타임 셸터>에서 영감을 얻은 제목이다.

전시 제목이 암시하듯, 올해 독일관은 입구 문턱부터 화제였다. 정문이 있던 자리는 무너진 듯 흙과 돌무더기가 쌓였다. 관객은 마치 불청객처럼 건물 오른쪽에 난 쪽문으로 입장해야 한다. 공사 현장은 튀르키예계 독일 작가 에르산 몬드타그(36)가 ‘일부러’ 연출한 작품이다. 흙과 돌무더기는 작가 조부의 고향인 튀르키예 아나톨리아에서 퍼왔다. 작가는 “이제 독일관은 영원히 튀르키예 이방인들의 토양을 품게 됐다”고 했다. 전시장 내부엔 3층 규모 가건물 설치작품 ‘이름 없는 이를 위한 기념비’가 들어섰다. 가난한 이민자 가족의 삶의 터전을 묘사한 이곳에 다섯 명의 배우가 작가의 조부와 부모, 작가 자신을 연기한다. 몬드타그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독일관의 역사를 아는 게 좋다. 파시즘 체제를 선전하려던 나치 독일은 1938년 독일관을 화려하게 리모델링했다. 2022년 독일관 대표작가로 참가한 마리아 아이크혼이 나치의 잔상을 지운다며 건물 바닥을 뜯어냈다. 상처로 얼룩진 채 남아있던 독일관 바닥이 올해 이방인의 토양으로 채워진 것이다.

독일관에 함께 작품을 건 야엘 바르타나(53)의 존재감도 작지 않다. 유대인 작가인 그는 이스라엘 전통 개념 ‘티쿤 올람’(히브리어로 세상을 개선한다는 뜻)을 주제로 ‘국가의 빛’을 선보였다. 거대한 우주선을 연상케 하는 대형 구조물과 여기 탑승해 지구를 떠나는 인류를 담은 영상 작품이다. 영상 속 인류가 떠난 자리에 남은 동식물이 살아가는 모습은 오히려 유토피아에 가깝게 묘사된다. ‘세상을 개선한다’는 대의(大義)에 인간이 낄 자리가 없다는 의미일까.

일본관 썩어 문드러지는 과일·채소
부패후 다른 생명 위한 비료로 '순환' 의미

일본관 대표작가 모리 유코의 ‘부패’. /안시욱 기자


“세상에 물보다 부드럽고 여린 것이 없다. 하지만 굳고 강한 것을 공격하는 데는 물을 이길 수 있는 것이 없다.” 중국의 사상가 노자(老子)가 남긴 말이다. 개별 존재로서의 힘은 미미하지만 수만 개의 물방울이 두들기면 제아무리 단단한 돌이라도 뚫리기 마련. 마음 어딘가에 역사적 앙금이 단단히 자리 잡은 한·중·일 3국의 관계에서도 통할 말이다. 올해 베네치아비엔날레 일본관 전시는 이렇듯 수많은 물방울을 통해 단절의 극복, 나아가 동아시아의 화해를 노래한다. 이방인들이 머리를 맞댄 결과다. 일본관 역사상 최초의 외국인 예술감독인 이숙경 영국 휘트워스미술관장(55)과 일본 작가 모리 유코(43)가 중국의 노자 사상을 바탕으로 마련한 전시다. 제목은 ‘함께 구성한다’는 뜻의 컴포즈(compose).

일본관은 모리의 대표작인 ‘누수’와 ‘부패’ 연작을 걸었다. ‘부패’ 연작은 과일과 채소가 썩어 문드러지는 시간 자체를 담는다. 사과와 바나나, 수박 등에 연결된 전선이 전등 빛을 밝히고 배경음악이 흘러나오는 스피커를 작동시킨다. 작품에 사용된 과일엔 곰팡이가 슬고 진물이 나오는 모양새다. 과일이 완전히 부패하면 다시 베네치아의 다른 생명을 위한 비료로 돌아간다.

영국관을 수놓은 LG전자 OLED
가나 탈출한 소년, 세계적 영화감독으로

영국관에 전시된 존 아캄프라의 미디어아트. /LG전자 제공


올해 영국관 대표 작가는 세계적인 영화감독이자 예술가 존 아캄프라(66)였다. 1982년 이민자 예술가단체 ‘블랙 오디오 필름 콜렉티브(BLFC)’를 설립하며 흑인 영상 예술을 개척한 인물이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와 뉴욕대, 프린스턴대 등에서 강단에 섰고 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영국 왕실의 기사 작위를 받았다.

가나에서 태어난 그는 포스트식민주의 시대의 풍파를 맞았다. 1966년부터 다섯 차례 연달아 벌어진 쿠데타 과정에서 아버지가 사망했고 어머니의 안전마저 위협받았다. 목숨을 건져 영국으로 건너간 게 그의 나이 여덟 살. 전시는 8개 공간에 걸친 미디어아트로 피란민과 이민자의 삶을 조명한다. ‘밤새 빗소리를 듣다(Listening All Night to the Rain)’란 전시 제목은 북송의 시인 소동파(1037~1101)의 시구에서 따왔다. 죽기 직전까지 유배 다닌 소동파의 말년처럼 아캄프라는 빗물과 빗소리에서 착안한 영상으로 현대 사회의 ‘떠돌이’들을 돌아본다. 영상 속 화면은 세계 미디어에서 보도한 자료나 국제 아카이브 컬렉션, 도서관 등에서 찾은 이미지에 기반한다. 공간마다 소년병 옆에서 잠든 남성, 1980년대 방글라데시의 대홍수 등 역사와 환경에 관련된 영상을 배치했다. 좋은 작품이 재료라면 이를 맛있게 요리해내는 건 전시 기획자와 후원사의 몫이었다.

베네치아=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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