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건축물서 전시회 연 일본 화가 “전쟁·기후위기···위로를 주고 싶다”

이영경 기자 2024. 4. 25.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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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헤레디움 레이코 이케무라 ‘수평선 위의 빛’ 전시
‘수탈 상징’ 동양척식회사 있던 곳
“환대와 포용 느껴 감사한 마음”
자연·인간, 동서양 경계 허물어
“만물에 영혼, 내 종교는 애니미즘
여성 대한 고정관념 탈피하려 해”
지난 3일 대전 헤레디움에서 국내 첫 미술관 전시인 ‘수평선 위의 빛’을 열고 있는 현대미술가 레이코 이케무라를 만났다. 이영경 기자

레이코 이케무라(73)는 일본 미에현의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났다. 작은 시골마을에서 그릴 수 있는 미래는 넓지 않았다. “반골 기질이 있던” 어린 여자아이에게, 시골마을 여성에게 주어진 자리는 작은 다다미방과 같이 좁게만 느껴졌다. 바다를 바라보며 이케무라는 넓은 세계와 미래를 꿈꿨다. 오사카의 외국어대학교에 진학해 스페인어를 공부했다. 스페인어의 음률이 마음에 들었고 그 언어로 쓰인 문학도 좋았다. 대학을 다니다 스페인으로 훌쩍 떠났고, 그 뒤로 돌아오지 않았다. 스페인에서 스위스, 독일로 기반을 옮기며 1979년 첫 개인전을 연 이후 29개국에서 500회 이상 전시를 연 성공적인 현대미술가가 됐다. 45년은 현대미술가로 성공적 커리어를 쌓아온 시간이기도 하지만, 유럽에 이주한 아시아 여성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한 시간이기도 했다.

“동양인 여성으로서, 외국인으로서 어려움을 겪었죠. 하지만 동시에 아시아인으로서, 여성으로서 나의 근원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고, 그것이 나의 유산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됐습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자연과 인간 등 이질적 요소들의 경계를 허물고 통합하는 이케무라의 작품세계는 이런 배경 속에 탄생했다. 토끼귀를 한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듯 두 손을 모은 모습의 대형 조각상 ‘우사기 카논’(사진)이 이를 잘 보여준다. 토끼와 인간, 관음상과 성모마리아상이 섞인 듯한 ‘우사키 카논’은 인간과 동물, 불교와 기독교의 세계가 융합된 새로운 세계관을 보여준다. ‘우사기 카논’은 스페인 발렌시아, 스위스 바젤시립미술관 등 세계 곳곳의 공공기관과 장소에 설치됐으며, 독일 뒤셀도르프에 설치한 작품은 4m가 넘는다.

대전 헤레디움에 전시된 레오코 이케무라의 전시 전경. 가운데 토끼와 인간의 형상을 한 대형 조각물 ‘우나기 카논’이 설치돼 있다. 헤레디움 제공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방사능 유출로 선천적 결함을 갖고 태어난 토끼를 보고 영감을 받아 작품을 만들었어요. ‘우사기 카논’은 평화의 매개체이자 메신저, 보호와 용서, 자비와 같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조각상인 동시에 건축물이기도 하죠. 조각상의 치마 안으로 들어가면 새로운 시각으로 외부를 바라볼 수 있어요. 동시에 피난처와 같은 공간이 되기도 합니다.”

지난 3일 대전 헤레디움에서 이케무라를 만났다. 헤레디움에서는 이케무라의 국내 첫 미술관 전시인 ‘수평선 위의 빛(Lights on the Horizon)’이 열리고 있다. 대표작 ‘우사기 카논’부터 땅과 하늘이 만나 경계를 허무는 수평선을 그린 회화, 인간과 동물이 융합된 모습의 유리조각상 등 이케무라의 작품세계를 보여주는 31점의 회화와 조각 등을 볼 수 있다.

1층 전시공간에는 3m가 넘는 ‘우사기 카논’을 중심으로 자연의 풍경이 인간과 동물로 표현된 산수화 등이 전시됐다. ‘봄의 신호(Sinus Spring)’ 연작은 산과 땅, 강의 윤곽이 사람이나 동물의 형상과 우연적이고 은근하게 뒤섞인 풍경을 그려냈다. 2층 공간은 어둠 속에 희붐하게 빛을 발하는 ‘수평선’ 그림들, 인간과 고양이 등 동물이 뒤섞인 모습의 색색깔 유리조각들이 신비로우면서도 명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전시장 전체에서 인간과 자연, 인간과 비인간 동물의 경계가 흐려지고 관람객은 만물이 하나로 연결된 듯한 느낌에 녹아들게 된다.

“나의 종교는 애니미즘이에요. 서양에선 유일신 개념이 강하지만 동양에선 나무와 바람, 돌 등 모든 것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애니미즘 사상이 있죠. 종교라고 표현은 했지만 제게는 애니미즘이 환상적으로 다가오기도 해요.”

레이코 이케무라 ‘Horizon’(2016), Tempera on Canvas, 100 x 120 cm 헤레디움 제공
레이코 이케무라 ‘Sinus Spring’(2018), Tempera on Jute , 190 x 290 cm 헤레디움 제공

‘우사기 카논’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을 계기로 만들어졌지만, 자연의 문제가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는 기후위기를 직면한 현재에도 간절히 와닿는다.

“세계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느낄 수 없어요. 코로나19 팬데믹이 있었고, 전쟁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죠. 나와 다른 존재와 싸우는 게 아니라 포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사기 카논’이 흘리는 눈물은 깊은 사랑에서 나오는 울림이라고 생각해요. 눈물의 가치를 통해 우리가 위로받고 회복하고 하나 되는 세상이 되길 바랍니다.”

전시에선 이케무라가 1990년대부터 그려온 ‘소녀’ 그림도 볼 수 있다. 온순하고 무력하면서도 성적인 대상으로 묘사해온 고정관념에 반기를 들고 소녀의 다양한 모습을 그림 속에 담아 왔다. “예술의 역사는 남성들에 의해 만들어졌죠. 저는 새로운 의문점과 시야를 던져주고 싶었어요. 여성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여성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모습을 표현해보고 싶었습니다. 소녀라면 여려야 해, 여성이라면 관능적이어야 해, 이런 고정관념에서 탈피하고 싶었죠.”

대전 헤레디움에 전시된 레이코 이케무라의 유리조각. 사람과 고양이가 뒤섞인 모습이다. 이영경 기자
대전 헤레디움 2층에 전시된 레이코 이케무라의 유리조각들. 헤레디움 제공

헤레디움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복원해 복합문화공간으로 꾸몄다. 지난해 개관하며 첫 전시로 독일의 거장 안젤름 키퍼의 작품을 선보인 데 이어 두 번째 전시로 이케무라를 선택했다. 식민지 수탈의 상징적인 장소가 문화공간으로 변화하고, 일본 출신 작가가 전시를 연다는 것은 역사와 예술 등에 대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이케무라는 “아픈 역사를 간직한 근대 유산을 문화적 풍성함을 나누는 공간으로 만든 헤레디움의 비전에 감명을 받았다. 전시를 열며 일본인인 저에 대한 큰 환대와 포용을 느껴 감사했다. 헤레디움의 비전과 같이 전시 주제를 ‘수평선’으로 잡았다. 수평선은 경계를 넘어설 수 있는 선이며, 수평선의 빛은 희망”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8월4일까지. 1만5000원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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