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에는 색깔이 없다 [전범선의 풀무질]

한겨레 2024. 4. 25.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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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생명평화공원에 있는 ‘김철호의 집’. 한겨레 자료사진

전범선 | 가수·밴드 ‘양반들’ 리더

영화 ‘파묘’를 봤다. 일제가 조선 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해 쇠말뚝을 박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영화에서도 무덤을 파보니 쇠말뚝은 나오지 않고 ‘험한 것’, 일본 귀신이 나온다. 쇠말뚝과 그것을 지키는 다이묘가 하나되어 진화한 정령이다. 오랜만에 ‘천만 영화’를 보면서 나는 조선 민족이 크게 한풀이를 하고 있음을 느꼈다. 영화 자체가 굿이다. 집단적 무의식 속에 깊이 박혀 있는 식민주의의 말뚝을 뽑고 있다.

“여우가 범의 허리를 끊었다.” 파묘의 명대사다. 영화의 배경인 강원도 고성군은 세계 유일의 분단도, 분단군이다. 한반도의 허리인 그곳에는 분명 쇠말뚝이 있다. 238㎞에 달하는 휴전선 철조망이 전부 쇠말뚝이다. 생명의 흐름을 막고 마음을 곪게 만드는 쇠말뚝이다. 70여년간 한반도 뭇 생명과 공진화하며 분단과 분열의 정령이 되었다. 조선의 범은 예수의 가시관 같은 허리띠를 벗지 못해 속이 체했다. 말 그대로 기가 막힌 형국이다.

지난주 목요일 지리산 자락 구례군 봉서리에 있는 한겨레생명평화공원을 찾았다.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식구들과 함께였다. 재단은 고 김철호 선생의 뜻으로 1997년 설립되었다. 김 선생은 한국전쟁 전후 지리산 일대에서 죽임을 당한 이들의 유골을 누구도 수습하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뼈에는 색깔이 없다”면서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공원을 직접 조성했다. 1995년 간암 투병 중 그는 한겨레에 땅 1만2천평과 현금 5억원을 기증했다. 분단 이후 민족 갈등으로 숨진 이들의 진혼, 위령 사업에 써달라고 당부했다.

공원 한가운데 김철호의 집이 있다. 그가 말년에 살던 움막 자리에 같은 크기로 지은 하얀 집이다. 그곳에는 한국 자생 풍수의 대가 고 최창조 선생의 글이 걸려 있다. 공원 터가 화해와 상생을 위한 완벽한 복록을 갖춘 땅이라고 한다. 학이 되어 하늘로 간 사람들이 후세의 풍요와 평화를 보장하는 명당이라는 것이다. 최 선생에 따르면 한국 풍수의 본질은 땅의 결함을 보완하는 비보(裨補) 풍수다. “우리 풍수는 좋은 땅을 찾자는 게 아니라 병든 곳을 찾아 침을 놓고 뜸을 뜨자는 것”이다. 명당을 만드는 것은 땅을 모시는 사람의 마음이다.

김철호의 집 바로 옆에는 주인 모를 묘가 있다. ‘통정대부돈령부도정이공사두지묘’라고 쓰여 있다. 10여년 전까지는 후손이 가꾸었으나 지금은 잡초가 무성하다. 김철호 선생이 1990년대 땅을 샀을 때 이미 그 자리에 있었다. 왜 선생이 그 넓은 땅에서 굳이 묘 바로 옆에 집을 지었을지 의문이다. 반대편에는 민족분단희생자위령탑 3기가 우뚝 서 있다. 지리산 산돌로 5m 넘게 쌓아 올렸다. 묘한 광경이다. 최창조 선생은 이곳이 해원의 굿당이 될 거라 했다. “좌우 원귀들 원한 풀고 산 자의 화해 모색”, “뼈와 땅에는 색깔이 없느니”. 주인 모를 묘는 모두의 묘 같았다.

바로 그때 누군가 말했다. “홍세화 선배가 돌아가셨다네.” 아나키스트 아버지가 지어준 ‘세계 평화’라는 이름. 1950년 세살배기 세화가 겪은 새지기 학살 사건. 나중에 사건의 전모를 듣고 남민전에 가담한 그는 20여년간 망명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관용을 강조했던 그는 마지막 한겨레 칼럼에서 “소유에서 관계로, 성장에서 성숙으로” 나아갈 것을 당부했다. 김철호의 집 앞에서 되새기는 홍세화의 말은 비통했다.

공원 일부는 청년 활동가들이 여성해방 마고숲밭으로 가꾸고 있다. 비거니즘과 에코페미니즘에 기반하여 생태적 삶의 방식을 모색하는 공유지다. 휴전선 철조망은 한반도 뭇 생명을 나누고 가두는 우리이기도 하다. 좌우와 남북의 분단은 여성과 남성, 자연과 인간의 분열과 같다. 하나인 생명을 인간의 이념으로 나눈 것이다. 동물해방, 여성해방, 민족해방 등 모든 진보는 결국 통일, 하나됨에로 나아가는 길이다.

뼈에는 사실 색깔이 있다. 김철호의 집처럼 하얀색이다. 이념뿐만 아니라 민족, 인종, 성별, 종과 상관없이 모두 같은 색이다. 죽음 앞에 모든 삶은 똑같다. 하나의 님이다. 하나됨에로 나아가는 첫걸음은 뭇 생명을 차별 없이 하나님으로 모시는 일이다. 김철호 선생의 뜻을 받들 때가 왔다. “통일에 앞서 남쪽에서부터라도 죽은 자와 산 자가 서로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일을 진행해야 합니다.” 휴전선 쇠말뚝을 뽑기 전에 지리산에서 해원 상생의 굿부터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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