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륜 저지른 부모·자식에게도 유산 줘야 하는 한국식 유류분 ‘대수술’

이현승 기자 2024. 4. 25.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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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는 유류분 이제 못 받는다
부모·자식·배우자도 유류분 100% 보장 안 돼
“학대·방임 등 유류분 상실 사유 구체화 될 듯”
부양 잘해서 사전 증여 받은 재산, 유류분서 빠진다

고인의 뜻과 상관없이 부모와 배우자, 형제자매, 자녀 등에게 정해진 비율만큼 유산을 줘야 하는 한국식 유류분(遺留分) 제도가 수술대에 오른다. 이 제도는 수십 년간 교류가 없었거나 패륜을 저지른 가족에게도 상속권을 보장해 ‘불효자 양성법’으로 불리기도 했다. 유류분 제도는 1977년 도입 이후 큰 변화 없이 틀을 유지해 왔다. 25일 헌법재판소가 사회구조와 가족제도 변화를 근거로 유류분을 규정한 법 조항에 대해 위헌, 헌법불합치 결정을 처음으로 하면서 국내 상속 제도에 47년 만에 가장 큰 변화가 생길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유류분은 고인의 유언보다 우선해 가족들이 최소 한도로 받아 갈 수 있는 재산 몫이다. 우리 민법에선 자녀와 배우자에게 법정상속분의 절반을, 부모와 형제자매에겐 3분의1을 상속하도록 한다. 이 제도는 한국이 농경사회일 때 가족 구성원 전체가 재산 형성에 기여하는 만큼 모두에게 상속 권한이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됐다. 남아선호사상이 심해 가장이 장남에게 모든 재산을 남겨주고 딸은 한 푼도 못 받는 상황이 생기자 유족의 생존권을 보호하고 가족의 연대를 유지하고자 유류분이 도입됐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가족 구성원이 따로 생활하며 재산을 증식하는 등 사회상이 바뀌었고, 개인이 재산을 원하는 대로 처분할 권한을 지나치게 제약한다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헌재는 앞서 유류분 제도를 규정한 민법 조항들에 대해 2010년과 2013년 총 세 번에 걸쳐 합헌 결정을 내렸다. 이번에도 제도 자체에 대해 전면 위헌 결정을 내리지는 않더라도 시대 변화를 고려해 일부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또는 한정위헌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됐다.

이종석 헌법재판소장을 비롯한 헌법재판관들이 25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열린 민법 제1112조 등 유류분 제도에 대한 위헌법률심판 및 헌법소원 선고에 참석하고 있다. / 뉴스1

이날 헌재는 유류분 제도 자체는 여전히 존재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헌재는 “고령화를 넘어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현실에 비춰 볼 때 피상속인의 배우자나 직계비속도 상속개시 당시 이미 고령이어서 특별한 경제적 부양이 필요한 경우가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라며 “또 아직은 모든 세대와 지역에서 남녀평등이 완전히 실현됐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에서 유류분 제도가 상속인의 상속 재산에 대한 기대를 일정 부분 보장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고 했다.

다만 유류분을 규정한 몇 가지 민법 조항은 불합리하다며 위헌, 헌법불합치 결정을 했다. 당장 고인의 형제자매는 사전 증여를 약속받지 않는 이상 유류분을 주장할 수 없게 됐다. 조웅규(사법연수원 41기)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는 “유류분 제도가 있는 일본, 독일, 프랑스, 스위스 등 대부분 국가에서 형제자매는 유류분 권리자로 인정하지 않고 2021년 법무부가 입법 예고한 민법 개정안에서도 유류분 권리자에서 형제자매가 삭제됐다”라며 “현재 가족관계를 고려할 때 형제자매는 다른 유류분 권리자에 비해 헌법이 보장하고자 하는 혼인과 가족생활이라는 제도와 다소 거리가 있다는 점에서 적절한 판단이었다”고 말했다.

법조계에서 주목하는 부분은 부모와 배우자, 자녀의 유류분 상실 사유를 규정하지 않은 것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한 것이다.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진 민법 조항들은 내년 12월 31일 이후로 효력을 잃기 때문에 그전까지 법 개정이 이뤄져야 한다. 어떤 경우에 유류분을 받을 권리가 상실되는지 법무부가 입법 과정에서 구체화할 전망이다.

그동안 법조계에선 가족을 전혀 돌보지 않거나 학대한 사람에 대해서도 유류분을 박탈하지 않는 것은 문제라는 지적이 나왔다. 박재현 법무법인 주원 변호사는 “상속법에선 피상속인에 대한 부양의무의 중대한 위반, 중대한 범죄행위나 학대 등을 저지르면 상속권을 상실하도록 하지만 유류분엔 이런 규정이 없었다”라며 “그간 패륜을 일삼아도 유류분이 인정됐는데 이제는 상실 사유를 결정하라고 헌재가 정한 만큼 입법부가 정리를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몇 년 사이 사회적으로 논란이 된 유류분 사례로 2019년 생을 마감한 아이돌그룹 카라의 구하라씨 케이스가 있다. 구씨 친오빠에 따르면, 구씨가 9살 때 집을 나갔던 친모가 딸이 사망한 사실을 알고 20년 만에 찾아와 재산을 달라고 요구했다. 현행법에 따르면 딸을 20년간 돌보지 않았어도 친모는 구씨 재산 절반을 가져갈 수 있다. 자식과 배우자 없이 사망한 자녀의 경우 친부모가 유일한 상속권자다.

구씨 친오빠 측은 소송을 제기해 친모 상속분을 40%로 낮췄다. 김동일 법무법인 태승 변호사는 “지금은 패륜적인 행위를 해도 유류분 청구가 가능했는데 그동안 형사사건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유류분 청구를 제한해야 한다는 논의도 있었다”라고 말했다.

유류분을 계산할 때 기여분을 반영하도록 하는 법 개정도 이뤄질 전망이다. 헌재는 유류분을 계산할 때 공동상속인의 기여분을 인정하지 않는 민법 제1118조에 대해서도 헌법불합치 결정을 했다. 현재 우리 상속법에선 피상속인을 특별히 부양하거나 재산 유지·증가에 기여한 공동상속인에 대한 기여분을 인정하도록 하고 있다. 전체 상속재산에서 기여분을 뺀 나머지로 각자 상속분을 계산한 후 기여분을 더하는 식으로 계산한다. 그런데 이렇게 기여분으로 인정받은 재산에 대해서도 다른 상속인이 유류분 반환 청구를 하면 나눠야 했다.

헌재는 “기여 상속인과 비기여 상속인 간 실질적 형평과 연대가 무너지고, 기여 상속인에게 보상을 하려고 했던 피상속인의 의사가 부정되는 불합리한 결과를 초래한다”고 했다. 이에 앞서 기여분으로 인정된 재산은 유류분 산정 기초재산에서 제외하는 방향으로 법 개정이 이뤄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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