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날 10명 대신 죽으러 간다던 아버지…74년 만에 아들 품으로

고경태 기자 2024. 4. 25.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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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위 유해발굴 유전자 검사로 첫 신원확인
아산 학살 하수홍씨, 골령골 희생자 길아무개씨
신원이 확인된 대전 산내골령골 1지점의 A9칸 유해노출 모습이다. 약 4×2m 크기에서 집단유해 54구(일괄유해 43구, 단독개체 11구)가 발굴되었다. 진실화해위 제공

“너 조금도 서러워 마라. 열 사람 죽을 거 살리고 나 하나 죽는 게 현대의 혁명가다.”

1950년 추석날이었던 9월26일 아침 아들 하상춘(1931년생)을 불러 이런 말을 남긴 하수홍(1906년생)은 10월1일 집에서 경찰의 트럭에 실려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인민군에 점령된 충남 아산군 영인면 신운리 고향마을에서 종중 어른들 추대로 리 인민위원장을 맡았던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구해준 지주들이 부역자로 몰아

아버지는 악질지주를 내놓으라는 인민군 요구를 거절해 총살 위협까지 당했지만, 인민군이 물러난 뒤엔 자신이 구해준 지주들로부터 부역자로 몰렸다. 그 아버지가 74년 만에 돌아왔다. 지난해 3월 충남 아산시 배방읍 공수리 산110번지 성재산 교통호에서 발굴된 유해 62구 중 두 손이 등 쪽으로 꺾여 통신선에 결박된 채 나온 A10-3이 바로 아버지 하수홍이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25일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 사업을 통해 발굴한 유해의 유전자 감식결과 2위의 신원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1위는 하수홍씨이며, 또 다른 1위는 2022년 대전 골령골에서 발굴된 대전형무소 희생자인 1927년생 남성 길아무개씨로 밝혀졌다고 했다. 진실화해위 유해발굴 사업에서 신원이 확인된 건 1·2기 진실화해위 통틀어 이번이 처음이다.

충남 아산 배방급 공수리 유해발굴 현장에서 신원이 확인된 A10 3번 유해 모습이다. 진실화해위 제공
이번에 신원이 확인된 대전 산내 골령골 유해노출 전경 중 1지점 A9~A11칸 모습이다. 진실화해위 제공
신원이 확인된 대전 산내골령골 1지점의 A9칸 유해노출 모습이다. 약 4×2m 크기에서 집단유해 54구(일괄유해 43구, 단독개체 11구)가 발굴되었다. 진실화해위 제공

진실화해위는 그동안 한국전쟁기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 관련 실지조사 차원에서 유해발굴을 진행하면서, 발굴 유해에 대한 시범사업으로 ‘2023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발굴 유해·유가족 유전자 검사’를 진행해왔다. 발굴 뒤 세종 추모의 집에 안치된 신원 미확인 민간인 희생자 유해는 약 3700여구인데, 한정된 예산 탓에 이중 501구만 유전자 검사를 진행했다. 대조한 유가족은 119명이다.

조사 결과, 유해발굴 정황과 유해에 대한 육안 분석, 유전자 검사 결과가 모두 일치해 신원을 특정할 수 있는 유해는 이들 2위였다. 길씨는 54구가 여러층으로 포개져 나온 골령골 학살지 제1지점에서 양팔 부근이 전깃줄 등과 함께 발굴돼 희생 당시 손목이 결박됐을 것으로 추정됐다.

충남 아산 민간인 학살은 1950년 9월말부터 1951년 1월초까지 인민군 점령기에 부역했다는 혐의를 받은 주민들과 그 가족이 온양경찰서 소속 경찰과 치안대(대한청년단, 청년방위대 및 향토방위대, 태극동맹)에 의해 집단살해된 사건이다. 또한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 전국 각지 민간인들이 최소 3000여명 이상 처형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1950년 6월28일부터 7월17일까지 대전형무소(현 대전교도소) 재소자와 인근 지역 국민보도연맹원들이 미군 트럭에 실려와 헌병대와 경찰에 의해 학살당했다.

“아흔 넘어도 아버지가 애달파 눈물 난다면 믿겠습니까”

최종 유전자 분석 결과, 발굴된 유해와 유가족은 99.99% 부자(父子)관계가 일치하는 것으로 각각 확인됐다. 이는 유전자 검사 결과, 가족관계(Autosomal-STR) 23개 좌위(座位, loci)와 부자관계(Y-STR) 22개 좌위가 모두 일치했다는 뜻이다. STR이란 염기서열반복(Single tamdem repeat)을 이르는 것으로 유전자에 2~4개의 반복되는 염기가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진실화해위는 “이와 같은 성과가 얻어지기 위해서는 70여 년 전 발생한 사건의 희생자가 백골 상태로 발굴돼야 하며, 풍화 속도가 느려 해당 유해에서 신원을 특정할 수 있을 만큼의 유전정보를 충분히 추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또한 “유해에서 추출한 유전정보와 대조해 볼 수 있는 유가족이 생존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번에 신원이 확인된 충남 아산 민간인학살 희생자 하수홍씨의 아들 하상춘씨가 지난해 11월7일 한겨레와의 인터뷰에 응하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고경태 기자
지난해 3월 충남 아산시 배방읍 공수리 산110번지 성재산 교통호에서 나온 유해들. 총 62구의 유해 중 A10-3으로 분류된 유해의 신원이 확인됐다. 진실화해위 제공

이번에 발굴된 하수홍씨의 아들 하상춘(93)씨는 25일 한겨레와 통화에서 “늦게라도 기적적으로 아버지를 찾아 다행”이라며 “집 앞에 있는 어머니 묘소에 아버지 유해를 합장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하상춘씨는 지난해 12월 한겨레 인터뷰에서 아버지를 잃은 뒤 겪었던 인생의 우여곡절을 소개하며 “여러 사람 살리고 혼자 죽은 아버지 덕분에 지금 아흔 넘게 살고 있다. 이 나이에도 아버지가 애달파 눈물이 난다면 믿겠냐”고 말한 바 있다.

이번에 신원이 확인된 하수홍씨와 길아무개씨는 아직 진실화해위로부터 진실규명 결정을 받지 못했다. 진실화해위는 “현재 조사가 진행 중”이라고만 밝혔다. 또한 올해에도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희생자 발굴 유해·유가족 유전자 검사’ 용역 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라고 했다.

전미경 대전 산내사건 피학살자 유족회장은 25일 한겨레에 “유가족들이 한 분이라도 더 살아계실 때 희생자 신원을 확인할 수 있도록 예산을 추가로 확보해 계속 유전자 검사를 실시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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