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에 한번씩 미술로 깨어나는 ‘물의 도시’ 베네치아

이향휘 선임기자(scent200@mk.co.kr) 2024. 4. 25.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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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엔 예루살렘 성지순례 출발지
18세기엔 지적 엘리트들의 ‘인생 여행’
21세기엔 전세계인이 몰리는 ‘미술 여행’
비안날레 열릴때면 거주민 5만명->16만명
작은 골목마다 갤러리, 섬 전체가 거대 미술관
아카데미아·페기구겐하임·푼타델라도가나
빌렘드쿠닝, 장콕토, 피에르 위그 전 인기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한 교회 외벽에 상처투성이 맨발을 묘사한 이탈리아 예술가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작품 ‘아버지’가 전시되고 있다. 오는 11월 24일까지 열리는 제60회 베네치아비엔날레 교황청 파빌리온 전시 작품이다. <EPA연합뉴스>
“베네치아는 십자군 운동이 시작되기 이전인 11세기부터 이미 서유럽에서 이름난 관광지였다. 16세기 중반까지 성지순례 여행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었다. 18세기에는 지적 엘리트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바다의 도시 이야기’에서 유럽인들이 1000년 넘게 열광한 도시가 바로 이탈리아 베네치아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중세엔 성지순례 코스로 인기를 끌었고, 18세기엔 괴테와 바이런, 스탕달 등 유명 문인이 찾았을 정도로 매혹적인 도시였다는 것이다.

21세기 베네치아는 흔한 관광 도시가 아니다. 시가를 가로지르는 Z형 대운하에 그물코처럼 얽힌 작은 운하들과 다리들. 한두명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비좁은 골목을 따라가다보면 아무리 길눈이 밝더라도 자주 방향을 잃게 된다. 미스테리나 액션 영화의 주무대가 되는 이유다.

■‘129년 역사’ 베네치아비엔날레, 섬 전체를 미술관으로

이 뿐만이 아니다. 우아하면서 비밀스러운 ‘물의 도시’는 2년에 한번씩 전세계 미술인들을 총집결시키는 거대한 미술관으로 깨어난다. 미술 여행의 끝판왕이 베네치아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비엔날레인 베네치아비엔날레가 그 계기가 됐다. 1895년 시작돼 129년이 지난 올해가 60회째다. 1·2차 세계대전과 팬데믹을 제외하면 2년마다 빠짐없이 비엔날레가 열린 셈이다. 올해 비엔날레는 지난 20일 개막해 오는 11월까지 장장 7개월간 열린다. 비엔날레 시즌을 겨냥한 병행 전시와 위성 전시는 수백개에 달하며 과거보다 더 풍성해진 느낌이다. 작은 골목을 끼고 돌면 이름모를 갤러리나 전시관이 눈에 들어온다.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라는 주제로 본전시를 선보인 총감독 브라질 큐레이터 아드리아노 페드로사는 “인구 5만명 도시인 베네치아는 비엔날레 성수기엔 하루에 16만5000명으로 폭증한다”고 말했다. 2년 전 열린 비엔날레 관람객은 총 80만명으로 집계됐다.

비엔날레의 주무대는 베네치아의 중심인 산마르코 광장에서 걸어서 30분 거리인 아르세날레와 자르디니 공원이다. 걸어가는 동안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연둣빛 아드리아해에 요트와 갤리선이 질주한다. 작가 330여명의 작품을 펼친 본전시의 대부분은 아르세날레에서 열린다. 과거 국영 조선소가 있던 자리다. 선박을 건조하는 장소였을 뿐 아니라 폭약과 대포를 갈무리하는 창고도 겸했다. 바다로 둘러싸인 베네치아는 성벽이 없지만 유독 이곳만은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무기가 가득했던 큰 창고는 이제 작가들의 야심찬 대형 설치물이 들어서는 공간이 됐다.

아르세날레에서 섬의 동쪽 끝으로 가면 녹음이 우거진 자르디니 공원이 나온다. 본전시 일부가 열리는 센트럴 파빌리온과 함께 미국과 독일, 영국, 스위스, 일본 등 국가관 29개가 있는 곳이다. 한국은 마지막 자투리 땅을 받아 1995년 29번째 국가관을 갖게 됐다. 자르디니 공원에 국가관을 갖게 된 건 1993년 독일관 대표 작가로 황금사자상을 거머쥔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의 노력이 컸다. 비엔날레 참가국이 총 88개국이니 나머지 59개국은 자르디니 공원이 아니라 베네치아 곳곳에 공간을 빌려 국가관 전시를 연다. 바티칸 파빌리온은 베네치아 여자 교도소 예배당에 있다. 지난해 리움미술관에서 기획전이 열렸던 이탈리아 설치 미술가 마우리치오 카텔란이 참여해 상처투성이 맨발이 그려진 ‘아버지’라는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카텔란은 지난 2001년 비엔날레에서 거대한 운석에 깔려 옆으로 누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실물 크기 밀랍인형을 전시해 논쟁을 불러일으킨 작가다. 미리 예약을 해야 전시를 볼 수 있다.

■베네치아 3대 미술관이 주목한 작가들

베네치아 미술 여행에 화룡점정을 찍는 곳이 3대 미술관으로 일컬어지는 아카데미아 미술관과 페기구겐하임 미술관, 푼타 델라 도가나다. 산마르코 광장에서 모두 서쪽에 몰려 있다. 아카데미아 다리를 건너자마자 아카데미아 벽에 걸린 빌렘 드 쿠닝(1904~1997) 기획전 ‘이탈리아’ 전시 포스터가 눈에 들어온다. 30분 정도 줄을 선 다음에야 표를 끊을 수 있었다. 아카데미아는 지오반니 벨리니의 ‘수태고지’ 등 성경과 관련한 명작들을 소장한 고전적인 미술관이다.

전시 제목처럼 추상 표현주의 대가인 드쿠닝이 이탈리아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를 처음으로 조명하는 전시다.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스물 둘의 나이에 미국으로 이민 간 드쿠닝은 미국관 작가로 베네치아비엔날레에 여러번 참가한 이력이 있다. 1959년과 1969년 두 차례 이탈리아를 방문해 고전주의 화풍을 연구하기도 했다. 전시장엔 흑백회화를 비롯해 총 75점의 작품이 엄선됐으며 이 가운데 13점은 놀랍게도 그가 빚은 청동 조각이다. 그는 로마에서 조각을 빚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각 역시 그림처럼 비틀리고 뭉개진 인물을 형상화했다. 과감하고 자유분방한 붓질은 베네치아 화가인 티치아노의 유려함을 이어받았다는 분석이다. 숱한 조각과 드로잉 습작을 통해 그가 얼마나 빛과 움직임에 천착했는지, 또 인체를 다양하게 해부하고 실험했는지를 느낄 수 있다. 전시는 9월 15일까지.

빌렘 드 쿠닝 1981년작 ‘해적 (무제 II)’
이탈리아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윌렘 드쿠닝 기획전. <이향휘 기자>
이탈리아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에서 미술 애호가들이 윌렘 드쿠닝 기획전을 관람하고 있다. <이향휘 기자>
아카데미아에서 10분쯤 걷다보면 아름다운 저택이 나온다. 20세기 전설적인 여성 컬렉터이자 예술 후원가 페기 구겐하임이 여생을 보낸 곳이다. 그가 교류하고 수집한 피카소와 몬드리안 뿐 아니라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작품도 상당수다. 르네 마그리트의 낮과 밤이 공존하는 ‘빛의 제국’은 대표 소장품이다. 상설전도 인기가 높지만 매번 수준 높은 기획전을 선보인다. 올해 주인공은 20세기 프랑스 미술계의 ‘악동’ 장 콕토(1889-1963)다. ‘저글러의 복수’라는 전시명처럼 그는 다양한 장르를 저글링하듯 옮겨다녔다. 시인이자 소설가, 극작가, 비평가이자 ‘미녀와 야수’를 만든 영화감독으로 맹활약했다. 물론 일각에선 다재다능한 그를 질투한 것인지 어떤 장르에서도 최고에 이르지 못했다는 조소를 보내기도 했다. 아편중독에 동성애, 나치 찬양이라는 어두운 면모도 갖고 있는 그다. 다양한 드로잉과 그래픽, 장신구, 영화 포스터, 사진 등 150여점의 작품이 그의 이름 앞에 ‘르네상스맨’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유를 납득시켜준다. 전시는 9월 16일까지.
1949년 뉴욕에서 장 콕토. ⓒ 필립 할스만·매그넘 포토
알렉산더 칼더 조각이 세워진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 <이향휘 기자>
베네치아가 옛 거장들의 발자취만 좇는 것은 아니다. 지금 가장 핫한 컨템포러리 작가의 전시를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대운하가 끝나는 지점의 삼각형 모양에 위치한 현대미술관 ‘푼타 델라 도가나’가 그곳이다. 한때 베네치아 상업 인프라의 핵심인 세관이 있던 자리였지만 무역이 쇠퇴하면서 미술애호가들이 찾는 예술공간으로 탈바꿈했다. 크리스티 경매를 소유한 프랑수아 피노 회장이 일본의 세계적 건축가 안도 다다오에게 리노베이션을 맡겨 2009년 닻을 올렸다. 배가 드나들던 곳이라 워낙 넓고 층고가 높다. 그래서 거대한 설치미술이나 미디어아트 작품을 전시하기에 제격이다. 지금은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매우 독특한 영상과 설치미술로 보여주는 피에르 위그 개인전 ‘리미널(Liminal)’ 전이 열리고 있다. 리미널은 경계 혹은 과도기적 상태를 뜻하며 신작 제목이기도 하다.
피에르 위그 신작 ‘리미널’
피에르 위그 기획전이 열리는 현대미술관 푼타 델라 도가나에 입장하기 위해 긴 줄이 늘어서 있다. <이향휘 기자>
전시장에 들어서면 거대한 영상의 크기에 놀라고, 영상 속 존재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혹은 사람인지 외계 생명체인지 낯설고 혼란스럽다. 작가는 뇌도, 얼굴도, 세계도 없는 속이 빈 인간의 형태를 제시한다.현실인지 가상의 세계인지도 아리송하다. 그가 지난 2016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선보인 ‘무제(인간 가면)’ 작품도 출품됐다. 동일본대지진 이후 폐허가 된 후쿠시마를 배경으로 사람 얼굴 모양의 가면을 쓴 원숭이 한 마리를 등장시켜 기묘한 분위기를 연출하던 그 작품이다. 이번 전시는 삼성 리움과 함께 준비한 기획전으로 내년 2월 서울 리움에서도 선보일 예정이다. 리움 공간에 거대 영상이 어떻게 담길 지 궁금하다. 베네치아/이향휘 선임기자
베네치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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