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영리 조직을 스타트업처럼 키운다

김시원 객원기자 2024. 4. 25.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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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큐베이팅(Incubating)’은 극초기 단계의 스타트업을 발굴해 육성하는 것을 가리키는 투자 용어다. 영리 업계에서 통용되던 이 용어가 ‘비영리’ 업계에서도 쓰이고 있다. 사회문제에 대한 혁신적인 솔루션을 가진 작은 비영리 조직을 선발해 체계적으로 성장시키는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이 최근 몇 년 새 국내 재단에서 생겨나고 있다.

다음세대재단은 ‘비영리스타트업’의 비전과 미션을 수립하고 기초를 다지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아산나눔재단은 비영리스타트업이 프로젝트를 직접 실행해 보면서 솔루션을 검증할 수 있게 지원한다. 루트임팩트는 최대 3년이라는 장기 지원을 통해 비영리 조직의 역량을 강화한다. 브라이언임팩트는 가능성과 효과성이 입증된 비영리에 대규모 지원금을 제공해 스케일업을 돕는다.

일러스트=나소연

재단의 프로그램들이 서로 맞물리고 연결되면서 비영리 지원의 ‘파이프라인’을 구축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스타트업이 시드 투자, 시리즈 A, B, C 투자를 받으면서 성장하듯이 비영리 조직들도 ‘다-아-루-브’ 파이프라인을 따라 조직을 키운다. 다음세대재단에서 조직화를 하고 아산나눔재단에 가서 솔루션을 검증한 뒤 루트임팩트에서 역량을 강화하고 브라이언임팩트에 가서 대규모 지원금을 받는 식이다.

◇한국에 없던 방식

스타트업들은 전통적인 기업들이 포착하지 못한 시장의 기회를 찾아 이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성장해 왔다. 비영리스타트업도 마찬가지다. 전통적인 비영리단체들이 커버하지 못하는 새로운 사회문제를 발굴하고 솔루션을 제공하면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해외에는 아이디어를 가진 소규모 비영리 조직에 대한 지원 프로그램이 체계적으로 갖춰져 있다. 기술기반 비영리스타트업을 전문적으로 육성하는 ‘패스트포워드(Fast Forward)’와 실리콘밸리의 ‘와이컴비네이터(Y Combinator)’가 진행하는 프로그램들이 대표적이다. 반면 한국에서는 비영리에 대한 지원이 대개 특정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한 사업비 지원 형태로만 이뤄져 왔다. 조직 자체를 키우거나 구성원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은 국내 비영리 생태계에 없는 방식이었다.

2017년과 2019년, 서울시NPO지원센터와 다음세대재단이 각각 ‘비영리스타트업 인큐베이팅’ 사업을 진행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2021년에는 아산나눔재단이, 2022년에는 루트임팩트와 브라이언임팩트가 비영리 조직에 대한 지원 프로그램을 내놓으면서 한국에도 비영리 조직의 탄생과 성장을 지원하는 시스템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허재형 루트임팩트 대표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나 상황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간접비보다는 사업비에 지원금이 쓰이는 게 당연하다는 분위기였지만, 최근 들어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조직의 열악함 때문에 사람이 떠나고 조직이 망가지는 일이 벌어지면서 조직 자체를 지원하는 게 병행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고 했다. 그는 “조직이 있어야 임팩트도 있다”면서 “비영리 조직의 역량을 키우고 솔루션을 정교하게 다듬는 방식의 지원이 점점 중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사회문제에 대한 시민들의 의식과 수준이 높아진 것도 변화의 원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비영리 조직들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고 있는지, 솔루션을 가졌는지 시민들이 들여다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나민수 아산나눔재단 선임매니저는 “기후위기, 지방소멸, 장애인 인권 등 웬만한 사회문제에 대해서는 시민들이 더 잘 알고 있다”면서 “시민들은 단순히 인식을 높여주는 차원을 넘어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비영리 조직을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유연하고 제한 없는 기부금

비영리 조직 지원 시스템을 가속한 건 ‘벤처 필란트로피스트(Venture Philanthropist)’라고 불리는 새로운 기부자들의 등장이다. 벤처 필란트로피는 벤처 투자의 기법을 기부에 활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원 조직과 장기적으로 관계를 맺고, 재무적인 지원과 비재무적인 지원을 함께 진행하면서 조직의 역량을 키운다.

국내 벤처 필란트로피스트는 대개 기업을 일군 창업가 출신 펀더(Funder)들이다. 이들이 비영리에 자금을 내놓을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실제로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가’이다. 당장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것이 아닌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원한다. 한국에서 좀처럼 뿌리내리지 못했던 비영리 조직 지원 프로그램을 이들이 견인한 것은 이 방식이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직접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사회문제 해결 전문가(비영리 조직)를 지원하는 것이 성공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생각한다.

브라이언임팩트는 김범수 카카오 창업자의 재산 기부로 설립된 재단이다. 2022년 초기 비영리 조직을 지원하는 ‘임팩트 씨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2025년까지 총 84개 조직에 45억 원을 지원한다는 목표다. 같은 해 ‘임팩트 그라운드’ 사업도 시작했다. 성공의 경험을 가진 조직들이 문제 해결 단계까지 나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시작한 사업이다. 조직의 성장과 지속가능성을 돕는 대규모 기부금을 지원하는데, 조직마다 최소 2억 원에서 최대 50억 원까지 총 250억 원을 지원한다.

조상욱 브라이언임팩트 디렉터는 “임팩트그라운드 사업의 지원금은 인건비나 임대료로 사용하는 등 운영비 지출이 가능하고 공간 마련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루트임팩트는 2022년 ‘IP1 기금’을 조성해 잠재력 있는 소규모 비영리 조직의 성장과 임팩트 창출을 지원한다. 한 조직에 연간 5000만 원부터 1억 원까지 최장 3년간 지원금을 준다. IP1 기금은 김강석 블루홀(현 크래프톤) 공동 창업자가 총 36억 원을 출연해 조성했다.

허재형 루트임팩트 대표는 “비영리에 사업비를 지원하는 전통적인 방식은 ‘로 리스크-로 임팩트’라고 생각한다”면서 “위험성도 낮지만 임팩트도 크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솔루션을 가진 비영리 조직들을 성장시키는 것은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며 “벤처 필란트로피스트는 실패할 수도 있지만 성공하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하이 리스크-하이 임팩트’를 방식을 더 선호한다”고 말했다.

브라이언임팩트와 루트임팩트의 지원금에는 ‘신뢰를 바탕으로 한 유연하고 제한 없는 기부금’이라는 설명이 붙는다. 용도가 정해져 있지 않아 조직들이 지원금의 사용 방식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조상욱 브라이언임팩트 디렉터는 “임팩트그라운드 사업의 지원금은 인건비나 임대료로 사용할 수도 있고 노트북을 사거나 심지어 건물을 살 수도 있다”고 말했다.

임팩트그라운드 지원을 받는 ‘핸드스피크’는 홍대 앞에 농인 아티스트 전용 연습 공간을 마련했다. 배리어프리 연습 공간으로서는 최초이자, 세계적으로도 의미 있는 시도다. 연습 공간이 생긴 덕에 콘텐츠가 늘고 퍼포먼스도 좋아졌다. 조상욱 디렉터는 “핵심에 부합하는 비용이라면 언제든 열려있다”면서 “이런 시도가 늘어나면 좋겠다”고 말했다.

◇비재무적 지원과 커뮤니티조성

다음세대재단은 극초기 단계 비영리 조직의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프로그램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단체의 미션과 비전을 설립하고 조직화하는 일이다. 방대욱 다음세대재단 대표는 “비영리 활동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왜 이 일을 하는지, 우리 사회가 왜 이 일을 필요로 하는지를 명확히 하는 것”이라며 “이게 잘 돼야 다음 단계에서 드라이브를 걸 수 있게 된다”고 했다.

다음세대재단은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의 지원금으로 아동·청소년 분야 비영리스타트업 인큐베이팅 사업을 진행 중이다. 아동·청소년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아이디어와 역량을 가진 초기 비영리 조직을 육성하는 사업이다. 국내 대형 NGO가 작은 비영리를 지원하는 최초의 사례다. 금융산업공익재단과도 교육분야 비영리스타트업 인큐베이팅 사업을 진행한다.

다음세대재단 프로그램에는 임의단체들도 다수 참여한다. 재단의 전 직원이 달라붙어서 단체 설립까지 진행해 주는 경우가 많다. 전문가 멘토링, 직무 교육 등 비재무적인 지원도 병행한다. 여러 전문 조직과 MOU를 맺고 법률, 회계, 마케팅, 피칭, 글쓰기 등 백오피스를 지원한다.

아산나눔재단은 2015년 국내 최초의 벤처 필란트로피 프로그램인 ‘파트너십온’을 운영했다. 나민수 아산나눔재단 매니저는 “아산 정주영 회장의 기업가 정신을 비영리 생태계에 적용하기 위한 시도였다”면서 “영리의 공식을 비영리에 도입한 셈”이라고 말했다. 2021년부터 진행 중인 ‘아산 비영리스타트업’ 프로그램에도 벤처 필란트로피 요소가 녹아있다. 기업, 스타트업 전문가들을 비영리 조직의 멘토로 연결해 준다. 마루180, 마루 360 등의 사무공간도 지원한다.

벤처 필란트로피가 재무적 지원과 함께 비재무적 지원을 하는 것은 ‘리스크’를 줄이는 방법이기도 하다. 다음세대재단, 아산나눔재단, 루트임팩트, 브라이언임팩트의 비영리 지원 프로그램들이 모두 비재무적 지원을 강조하고 있다. 방대욱 대표는 “아이를 키우는 것을 생각해 보면 된다”고 말했다. 그는 “아이가 안전하게 잘 자랄 수 있도록 보호자가 주변의 위험 요소를 감소시켜 주듯 비영리 조직을 육성할 때도 다양한 비재무적 방식을 통해 리스크를 줄여주고 이를 통해 조직의 혁신적인 방식이 성공을 거두게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비영리 조직 간에 커뮤니티를 조성해 주는 것도 중요하다. 다음세대재단은 크고 작은 커뮤니티를 만들어 비영리스타트업들끼리 서로 고민을 들어주고 협업할 수 있게 돕는다. 아산나눔재단은 프로그램이 종료되는 시점에 ‘비영리스타트업콘퍼런스(비스콘)’를 연다. 스타트업 프로그램의 경우 데모데이를 열어 서로 경쟁하며 우승자를 가리지만 비스콘에서는 경쟁적 요소를 배제하고 서로 무엇을 배웠는지 공유하는 시간을 가진다. 나민수 선임 매니저는 “비영리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협력과 성장”이라고 말했다.

◇다양성을 향해

▲신뢰 기반의 유연한 지원금 ▲다양한 비재무적 지원 ▲동료 커뮤니티 조성 등은 ‘다음세대재단-아산나눔재단-루트임팩트-브라이언임팩트’가 운영하는 지원 프로그램들의 공통점이다. ‘다-아-루-브’ 파이프라인을 따라 단계별로 성장하고 있는 조직들도 나오고 있다.

‘다시입다연구소’는 패션 산업이 환경에 끼치는 악영향을 알리고 의류 폐기물을 줄이기 위해 2020년 시작된 비영리스타트업이다. 서울시NPO지원센터(2020), 다음세대재단(2021), 루트임팩트(2022), 아산나눔재단(2023)의 지원을 받았다. 정주연 다시입다연구소 대표는 “다음세대재단에서 인큐베이팅을 받으며 미션을 수립하고 법인도 설립했다”면서 “아산나눔재단에서는 사업적인 전략과 스타트업의 마인드를 배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위기가정의 임신과 자립을 돕는 ‘비투비(BtoB)’는 아산나눔재단(2022), 브라이언임팩트의 임팩트그라운드(2022), 루트임팩트의 IP1 기금(2023) 지원을 받았다. 방대욱 다음세대재단 대표는 “재단들이 각각 강점과 전문성이 다르기 때문에 지원 내용도 전혀 다르다”면서 “각 프로그램의 특징들이 조합되면서 정말 좋은 조직으로 커가는 형태”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그간 비영리 생태계가 건강하지 못했다”고 했다. 황신애 한국모금가협회 상임이사는 “비영리가 사회문제를 잘 해결하려면 작고 다양한 조직들이 등장해 다각도로 사회문제를 살펴야 하는데 다양성이 부족했다”면서 “다양한 이슈를 포괄할 수 있는 ‘포용적 필란트로피’를 확산하기 위해서는 기부 관련 법제도를 개선할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

조상욱 브라이언임팩트 디렉터는 “젊은 창업가들이 비영리에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면서 “영리와 비영리를 경계 없이 오가면서 전체 생태계를 확장하는 무브먼트가 생겨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나민수 아산나눔재단 선임 매니저는 “빌게이츠재단, 발렌베리재단, 록펠러재단 등은 비영리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인내자본으로 가장 밑단에서 우리 사회를 짊어지고 있다”면서 “김강석 창업자가 루트임팩트에 기부해 기금을 만든 것처럼 비영리를 돕는 인내자본이 우리 사회에 많이 생겨나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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