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프레소] 어느 독자가 써내려간 ‘한국 낚시 100년사’

채민기 기자 2024. 4. 25.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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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기록을 이기지 못한다” 적어둔 사실의 힘 보여준 작업
합리적 토론도 기록에서 출발… 남기고 보존하는 문화 가꿔야

낚시 월간지 기자로 30년 일한 독자 김국률씨가 본지 ‘나의 현대사 보물’ 코너에 보내온 압축 파일에는 낚시 서적 사진 23장이 들어있다. 첨부한 설명에 따르면 ‘낚시 입문’(1958)은 한국 최초의 낚시 전문 단행본이다. 두 달 먼저 나온 ‘초심자 필람 붕어낚시’가 소량만 찍은 비매품이었기에 그 책을 최초로 분류한 듯했다. 최초의 낚시 회보 ‘조우’(1959), 첫 전문 월간지 ‘낚시춘추’(1971)…. 다른 독자들의 소장품과 함께 ‘월간 낚시’ 창간호(1984)를 지난 2일 자 기사에 1980년대의 ‘보물’로 소개했다. 낚시를 해본 적은 없지만 자료를 모으고 정리한 집념은 충분히 느껴졌다.

더 많은 자료를 싣지 못해 아쉬워하던 차에 김국률씨가 560쪽으로 편저한 ‘사진으로 보는 한국 낚시 100년사’를 지난 주 편집국으로 보내왔다. ‘기억은 기록을 이기지 못한다’는 손글씨가 첫 장에 서명과 함께 적혀 있었다. 그는 숱하게 이사를 다니면서도 취재 수첩을 비롯한 낚시 관련 자료들은 버리지 않았다고 했다.

지난달 나온 ‘포트폴리오와 여행’에서도 기록의 가치를 봤다. 1992년부터 젊은 건축인들의 세계 여행을 지원해 온 김태수장학재단에서 30주년을 맞아 역대 수상자들의 포트폴리오(작업 기록)와 여행기를 모은 책이다. 재단 설립자인 재미(在美) 건축가 김태수씨는 자신보다 수상자들의 생각에 주목한 책이 되기를 바랐다. 그들이 제출한 작업과 여행의 기록 그리고 낯선 여행지에서 보내온 엽서까지 갈무리해 두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 뜻은 실현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책에는 포트폴리오의 중요성을 강조한 건축가 황두진씨의 글도 실렸다. “건축은 남지 않는다. 남는 것은 기록이다.” 도면과 문서 등을 백업한 하드디스크를 은행 금고에 보관하고, 사본은 지인의 도움을 받아 미국 중서부의 한 가옥에 두고 정기적으로 교체한다는 그의 기록 관리 노하우가 놀라웠다.

이처럼 철저한 태도는 그러나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 건축·디자인 분야를 취재하다 보면 “기록이 없다”거나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전문가들이 쓴 책도 서문만 펼치면 그들이 맞닥뜨렸을 벽이 바로 보인다. “여전히 서울 곳곳에 남아 시대를 증언하는, 많지 않은 당시의 아파트조차도 변변한 기록과 원천 자료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박철수 외 ‘경성의 아파트’) “수백 년 된 자료는 귀하게 여겨서 보관하고 정리한 것이 많은 반면 불과 수십 년 전의 자료는 버려지고 잊힌 것이 많았다.”(노은유·안상수 ‘한글 디자이너 최정호’) 이 분야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동안 건축가 조재원씨의 소셜미디어에서 예전에 봤던 에피소드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오래된 건물을 호텔로 고치는 작업을 맡았던 1990년대 말. 시청에 가서 건물 도면을 요청하니 담당자가 몇 년 치나 필요하냐고 물었다. 100년을 “질렀다”고 한다. 그러자 그동안 건물에 손댔던 건축가들의 서명이 포함된 100년 치 도면을 정말로 가져다 주더라는 이야기였다.

우리의 체질이 된 기록의 빈곤을 꼬집는 내용으로 기억했는데 이번에 다시 찾아보니 글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건물에 처음부터 있었던 부분과 100년 동안 추가되고 수정된 부분이 낱낱이 기록된 도면 덕분에 무엇을 없애고 무엇을 살릴 것인지를 합리적으로 정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막연한 향수나 감상이 아니라 명확한 근거에 따른 논의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담당자가 도면을 내오는 장면 이후의 후반부는 기억엔 없는 이야기였다. 기억은 역시 기록을 이기지 못한다는 이치와 함께, 기록은 지난날에 대한 것이지만 결국 미래를 위한 일이라는 사실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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