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플라자] 진짜 봄은 겨울옷을 넣을 때 온다
어느덧 애매한 겨울 자락이 모두 접어들고 ‘진짜’ 봄이 되었다. 벚꽃도 다 진 마당에 봄 타령하기는 조금 늦었나 싶지만,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내게 진짜 봄은 입춘도 아니고 경칩도 아니고 겨울옷을 집어넣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찾아온다. 봄의 꽃말은 역시나 옷 정리. 서랍에 들어찬 두꺼운 니트와 옷걸이의 뚱뚱한 외투를 모두 끄집어내며 봄맞이를 시작한다.
가끔은 이 작은 집에 롱패딩부터 민소매 티셔츠까지 사계절 옷을 다 품고 살아간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어디 옷뿐인가. 겨울용 솜이불에 봄가을용 차렵이불, 여름용 홑이불까지. 양말마저 계절 메뉴가 있다. 5평짜리 원룸에 이 모든 걸 집어넣고 살던 스무 살 때부터 나는 수납의 달인이 되었다. 봄맞이 한 번에 세탁기가 멈출 줄 모른다. 이렇게 비효율적인 과정을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일 년에 서너 번씩 반복해야 한다니. 쉴 줄 모르는 건조대를 바라보며 사계절이 뚜렷하지 않은 나라에 살았다면 조금 수월했을까 상상해 본다.
옷 정리 외에도 내 봄맞이 루틴 하나가 더 있다. 바로 식물장 정리다. 나는 제법 식물을 키우는 데 열정이 있어, 집에 화분이 열다섯 개가 넘어간다. 가장 먼저 거실에 김장 매트를 깔고 그 주위로 화분을 쭉 늘어놓는다. 그러고는 순서대로 한 놈씩 엎드려 매치며 속에 있는 흙을 모두 털어낸다. 그다음은 뿌리 크기를 가늠하여 더 큰 화분이 필요하면 새 화분으로 옮겨주고, 보통은 뿌리를 살짝 정리하고 흙만 새로 갈아 원래 화분에 다시 심어준다. 그 과정에서 가지나 줄기를 잘라 물병에 꽂아 키우거나, 남은 화분에 새롭게 심어주기도 한다.
분명 식물장 정리를 위해 시작한 일이 정리는커녕 화분 개수만 더 늘리는 일이 되곤 한다.
‘정리’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을 좋아한다. 끝맺음 같으면서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기도 하니까. 겨울옷을 정리하고 봄옷을 꺼내며 계절이 바뀌었음을 체감한다. 새로운 화분으로 옮겨간 식물에 새순이 돋아나는 걸 보며 온전히 봄을 맞이한다. 이제야 한 살 먹은 기분이 든다. 그렇게 새로운 시작을 위해 정리가 필요했구나, 직감한다.
사실 매번 옷 정리를 하지 않아도 크게 문제가 생기진 않는다. 옷걸이가 조금 힘겨워하며 옷을 뱉어내거나, 서랍에 옷이 끼여 완전히 잘 닫히지 않는다던가 하는 작은 애로 사항이야 있겠지만 그마저도 눈 가리고 살 수야 있다. 화분도 마찬가지로 식물이 조금 시들해지거나, 아니면 성장 속도가 많이 느려져 새순을 틔우기 힘들어하겠지만 죽지는 않을 것이다(죽을 수도 있고). 나도 일이 바쁠 때면 정리를 미루다 계절이 바뀌고 한참 뒤에나 인지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나는 말 그대로 정신없이 바쁘고, 집에서 머무는 시간을 그리 반기지 않으며, 집에 들어서기 전부터 쌓인 집안일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아침마다 옷장에서 날씨에 맞는 옷을 찾지 못해 씨름하고, 그로 인해 하루를 짜증을 내고 시작하니 다른 일이라고 잘 풀릴 수가 없다.
정리(청소)가 정신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정돈된 주변 환경은 불안과 스트레스를 줄여주고 집중력을 향상해 준다나. 정리의 효능을 직관적으로 느끼긴 힘들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명확히 알 수 있다. 정돈되지 않은 주변 환경은 떠올리는 것 자체로 스트레스를 준다.
확실히 정리된 집 안에서 생활하는 편이 기동성에 좋다. 내가 반팔 티셔츠를 두는 곳, 속옷을 두는 곳, 상비약을 두는 곳 등 기대한 장소에 찾던 물건이 있는 삶과 늘 여기저기 물건을 찾아 헤매는 삶에는 많은 차이가 있으니까.
겨울 덕분에 봄을 맞이했다. 정리로 내가 얻는 게 더 많으니, 아무래도 날씨에 불만하지 않고 집 안 곳곳 가꾸며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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