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분히 평범했어야 할 하루 [1인칭 책읽기]

이민우 기자 2024. 4. 24.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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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우 랩장의 1인칭 책읽기
「사람이 사람에게,
사람의 말을 이어갑니다」
잊지 않기 위해 반복하는 일
참사를 겪은 사람들은 치유의 씨앗을 심는다.[사진=뉴시스]

여자친구와 700일을 기념해 신도림의 한 초밥집에서 외식을 했다. 우리는 서로 축하했고 외식을 하는 내내 여러 번 웃었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강의를 하러 갔다. 수업이 끝난 후에는 다이소에도 들러 방울토마토 재배 세트 2개를 사고 배수구청소액과 쇠자를 샀다. CU에서는 펩시 제로콜라를 2+1으로 샀다. 그리곤 집으로 돌아왔다. 충분히 평범한 하루였다.

집에 돌아와 글을 쓰기 위해 책상에 앉았다. 비어 있는 한글 프로그램 페이지를 바라보다가 한참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더니 노트북 화면이 꺼졌다. 불을 켜지 않았기에 노트북 화면마저 꺼져버리자 방 안에 어둠이 가득 찼다. 어둠 속에서도 움직이지 않고 꺼진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오히려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한참을 어둠 속에 홀로 있자 어떤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것은 파도 소리였다. 어쩌면 노트북의 노이즈 소리일지도, 그도 아니면 근처를 지나가는 지하철 소리일 수도 있었다. 소리에 집중하자, 잊힌 기억들이 바위에 부딪혀 깨지는 파도의 포말처럼 방 안에 가득 차올랐다.

오늘이 며칠인지 알기 위해 노트북을 켜고 나서야 4월 16일이라는 숫자가 보였다. 자정을 넘긴 것이다. 다시 4월이구나. 까맣게 잊고 있었다. 4월 16일이라는 날짜를 보면,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기억에 실려 어디론가 향했다.

많은 이들이 4월 16일이 되면 2014년 그날을 떠올린다.[사진=뉴시스]

그날 나는 대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었다. 수업시간 스마트폰으로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다는 뉴스를 접했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수업시간에 자리에서 일어나 그 뉴스를 이야기했다. 잠깐 일었던 소란은 자리에 앉으라는 교수님의 목소리에 금방 사그라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원구조 소식에 모두가 안도했다. 그것이 오보라는 것을 알아차린 건 한참 뒤였다.

어떻게 그날의 일들을 또 새까맣게 잊고 지낸 걸까. 평소에도 난 무언가를 곧잘 까먹곤 했다. 그것이 지갑의 신용카드일 때도 있고 만년필일 때도 있고 혹은 옷을 걸어둔 자리일 때도 있었다. 무언가를 잊을 때마다 나는 부지런히 스마트폰이나 공책, 노트북에 더 많은 기록을 남겨뒀다. 하지만 정작 내가 견디기 어려운 커다란 사건들은 마치 없었던 일처럼 머릿속에서 지워지고는 했다.

지난 3월 책이 한 권 나왔다. 「사람이 사람에게, 사람의 말을 이어갑니다」다. 작가들이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며 진행한 '304낭독회'의 작품을 모은 책이다. 이 낭독회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 304명을 기리기 위해 매달 열리는 낭독회다. 예정된 횟수는 304회다.

2014년부터 시작한 낭독회이니 앞으로 15년은 더 열릴 거다. 나는 이 행위가 종교적 수행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교리나 진리를 잊지 않기 위해 반복하는 어떤 수행. 나 역시 몇번 304낭독회를 찾아갔었다. 하지만 막상 시를 낭독한 적은 없었다.

[사진=온다프레스 제공]

이번 4월 16일은 세월호 참사 10주기였다. 18살이던 사람이 28살이 됐을 시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고 연애를 하고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외식을 했을 시간. 다이소에서 물건을 사고 돈을 더 아낄 명목으로 2+1 상품을 샀을 20대 후반이 됐을 시간. 충분히 평범하고 마땅히 행복해야 했을 시간. 그 시간을 우리가 살고 있다.

다이소에서 사온 토마토 재배 세트에 흙을 채우고 씨앗을 심었다. 나는 이것이 「사람이 사람에게, 사람의 말을 이어갑니다」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304낭독회로 10년 전 학생들을 자신의 마음속에 품는 행위는 마치 씨앗을 품는 것 같아서 온전히 받아들이고 낭독회에 참여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상처를 딛고 또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민우 더스쿠프 기자
lmw@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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