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욱의 술기행](114) “전통술 주방문(레시피), 3500개 정리했어요.”

박순욱 선임기자 2024. 4. 24.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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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술문헌연구소 김재형 소장, 7년여에 걸쳐 고문헌에 기록된 전통술 DB화 노력
성공한 벤처기업인에서 전통술 고문헌 전문가로 변신
고문헌 연구 저변 좁은 환경에서 ‘독학’으로 산가요록 등 128개 자료 분석
포털(한국술 고문헌DB)에 무료로 공개…부의주는 일년 동안 100번 빚기도
“문헌 해석의 목표는 복원 아닌 응용, 옛것을 토대로 현대적 재창조 계기 삼아야”
한국술문헌연구소 김재형 소장(사진 가운데)이 주류박람회 행사장에서 일행들과 시음을 하고 있다. 김 소장은 128개 고문헌을 뒤져, 3500개의 전통술 레시피를 DB화했다. /한국술문헌연구소

SKY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다. 대학원에서는 요즘에 더 잘 알아주는 인공지능을 연구했다. 1993년, 국내 굴지의 대기업 기술연구소 연구원으로 입사, 인공지능 가전 개발 업무를 맡았다. 그후에 더 잘 나갔다. 대학 1년 선배인 이재웅 벤처사업가(전 다음커뮤니케이션 회장)의 요청을 받아 다음 태동 초기에 합류했다. 한메일 개발을 담당, 다음이 포털사이트로 자리잡는데 큰 역할을 해, 다음의 ‘개국공신’ 중 한명으로도 대우받았다. 다음재팬, 다음게임 등 다음의 계열사 대표, 그리고 다음이 투자한 회사의 대표(투어익스프레스)도 했다. 이런 이력을 가진 그는 누구일까?

정답은 한국술문헌연구소 김재형 소장이다. 한국술문헌연구소 김 소장은 산가요록, 수운잡방, 음식디미방 같은 조선시대 이후 고문헌에 기록돼 있는 전통술의 제조방법(주방문, 레시피)을 데이터베이스(DB)화해서 공개하고 있다. 네이버에 들어가 ‘한국술 고문헌 DB’를 쳐서 들어가면 검색창이 뜬다. 여기에 특정 고문헌이나, 전통술 이름, 누룩 종류 중 어느 것을 치더라도 도표로 정리된 해당 술의 레시피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김재형 소장은 “현재까지 128개 문헌을 조사해, 3500개 정도의 레시피를 DB화했다”며 “전통술 빚기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검색만 하면 어렵지 않게 전통주 빚기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술문헌연구소 김재형 소장은 성공한 벤처기업인에서 전통주 고문헌 전문가로 변신했다. /박순욱 기자

예를 하나 들어보자. 가평잣막걸리로 유명한 가평의 전통술 양조업체 우리술은 작년에 ‘옥지춘’이란 신제품을 내놓았다. 조선 초기 1459년경 어의(임금 주치의) 전순의가 쓴 요리책(현존하는 요리책 중 가장 오래된 문헌)인 ‘산가요록’에 옥지춘 레시피가 소개돼 있다고 우리술측은 신제품 출시 당시, 홍보에 열을 올렸다. 옥지춘 역시 한국술문헌 DB에서 검색해보니, 산가요록 외에 승부리안주방문, 각방별양 같은 고문헌에도 옥지춘 주방문이 기록돼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한국술문헌 DB에 소개된 전통술 주방문이 옥지춘을 포함해 3500개가 넘는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단 한 사람’이 7년여에 걸쳐 3000개가 넘는 주방문을 100권이 넘는 고문헌에서 일일이 찾아, 모두 DB화했다는 사실이다. 또, 이를 누구나 무료로 볼 수 있게끔 포털에 공개했다는 사실 역시 놀랍다.

성공한 벤처기업인이 전통술 관련 고문헌 연구에 빠져든 이유는 뭘까? 더구나 7년 넘게 책상 옆을 떠나지 않고 고문헌 연구에 몰입했지만, 도대체 돈이 안되는 일을 그는 왜 지금도 놓치 못하는 걸까? 이런저런 궁금증을 안고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있는 원룸 사무실을 찾아갔다. 가족이 함께 거주하는 공간은 따로 있고, 이곳 원룸은 순전히 혼자만의 연구공간이라고 했다. 소파, 침대도 없고 책상, 책장, 그리고 직접 빚은 술로 꽉 채운 냉장고 2대가 다였다.

-어쩌다 전통술 고문헌 연구에 빠져들게 됐나?

“다음을 나와서 벤처기업을 따로 차렸다. 그런데, 잘 안됐다. 2년만에 접을 수밖에 없었다. 숨가쁘게 20여년을 달린 탓에 그때 뭔가 재충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서울 방배동에 있는 한국가양주연구소에서 술 빚기였다. 2017년 가을이었다. 백수환동주, 이화주 같은 막걸리를 중심으로 시중에서 쉽게 접하기 어려운 10여가지의 전통주를 직접 빚어보는 교육과정이었다.

과정 중에 고문헌에 기록된 주방문(레시피)를 배우는 시간이 있었다. 한글로 쓰여진 최초의 요리책인 음식디미방 등에 소개된 레시피를 도표로 정리하고, 그중 일부는 실제로 술빚기도 해봤다. 그런데 이게 너무 재미있었다. 가양주연구소 류인수 소장이 직접 강의를 맡았는데, 여러 문헌에 기록된 ‘레시피 도표 정리’를 숙제로도 잔뜩 내주셨다. 다른 교육생들은 어렵다, 귀찮다 등 불만이 적지 않았는데, 나는 밤샘을 할 정도로 전통주 레시피 정리가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한국술문헌연구소 김재형 소장이 포털에 공개한 한국술 고문헌 DB. 검색창에 들어가 삼해주를 치니, 77개 문헌에서 삼해주 레시피를 기록했음을 알 수 있었다. /박순욱 기자

그런데 하다보니, ‘레시피를 DB화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레시피가 소개된 술 종류가 워낙 많다 보니, 레시피를 정리하더라도, 나중에 찾아보기가 여간 어려운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직 누구도 시도해보지 않은 상태인데다, DB는 또, 내 전공이었으니, 어려울 게 없다고 여겼다. 밤잠을 안자고 전통주 레시피 DB에 매달렸다. 그 첫번째 결실이 이듬해인 2018년 3월에 나왔다.”

-첫번째 DB는 어느 수준이었나?

“한 20개 정도의 문헌에 기록된 500여개의 레시피를 정리했다. 여러 문헌에 중복돼 소개된 레시피도 있었고, 문헌 하나에 레시피가 평균 30개 정도됐다고 보면 된다.”

-지금은 어디까지 왔나?

“7년이 지난 현재 정리한 문헌 수만 128개 정도이고, 레시피는 3500여개에 달한다. 포털에 올려놓았으니, 누구든 접할 수 있고, 이를 토대로 다양한 전통주를 만들어볼 수 있도록 했다. 포털에 들어가 ‘한국술 고문헌 DB’를 치면 곧바로 들어갈 수 있다.”

한국술문헌연구소 김재형 소장이 자신이 빚은 전통주들을 설명하고 있다. /박순욱 기자

-7년 이상 전통주 DB에 매달렸는데, 수익 창출은 뭘로 하나?

“사실, 별게 없다. 일년에 2회 가양주연구소에서 한달 과정 ‘고문헌 연구 과정’ 강의를 맡고 있다. 부정기적인 강연 요청도 응하고 있지만, 딱히 돈이 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양조장을 차릴 생각도 없다. 하지만, 후세에도 볼 수 있는 전통주 DB작업을 오랜 기간 혼자 해왔다는 자부심은 결코 작지 않다. 고문헌에 나와있는 그대로 술을 빚을 필요는 없지만, 조상들이 어떤 재료로, 어느 정도의 비율로, 어떻게 술을 빚었는지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것은 의미가 크다고 여긴다. 옛것에서 새것을 배운다는 ‘법고창신’을 실천하려면, 우선 옛것을 올바로 알아야 하지 않겠나.”

-고문헌에 기록된 술을 요즘에 와서 빚기 어려운 점 하나가 계량형 단위가 통일돼 있지 않다는 지적이 많다.

“맞는 얘기다. 문헌에 나오는 사발, 복자, 병, 동이, 주발, 되, 바리, 말 같은 단위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 용량인지 알기 어렵다. 그 이유는 가양주 문화의 특성 때문이다. 누구나 집에서 술을 빚었기 때문에 자기 집에서 쓰는 부엌 도구를 그대로 계량 도구로 사용한 탓이다. 그런데 같은 사발이라도 집집마다 용량이 같을 수가 없지 않은가? 밥 공기도 조금씩 다 차이가 나는 게 정상이다. 그러나, 이것이 술 빚기에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문헌 해석의 목적은 복원이 아니라, 응용이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입맛에 맞추어 어떻게 쌀과 물의 양을 정할 것인가는 지금을 사는 우리가 결정할 몫이다.”

-고문헌 주방문은 한자가 대부분인데다, 한글이라고 해도 고어체라서 해독이 쉽지 않다. 어떻게 극복했나?

“한자는 사전이 있으니 어렵지 않다. 다만, 많은 노력과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어려운 글자나 문장은 고전이나 실록 등을 참조하면 실마리가 풀리기도 했다. 오히려 어려운 것은 한글 문헌이다. 일단 흘림체이면 가독성이 떨어져 글자 인지가 안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많은 문헌을 뒤적거리다 보면, 같은 이름의 주방문이 여럿 등장하는 수가 많아, 이를 토대로 유추해볼 수가 있다. 쌓여져가는 DB 덕을 보는 경우도 생겼다.”

한국술문헌연구소 김재형 소장이 빚은 술들. 왼쪽부터 백화춘, 노산춘, 삼해탁주, 청명주, 부의주, 매실주, 백엽주. /박순욱 기자

-고문헌연구의 가장 큰 어려움은 뭔가?

“혼자 해야 한다는 점이다. 술과 관련된 옛문헌 연구는 하는 분이 적다. 문헌 연구는 일종의 퍼즐 풀기 같은 것인데,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같이 토론하고 연구할 동무가 없다는 점이 제일 아쉬웠다. 그래서 찾은 해결책은 보고 또 보는 것이었다. ‘독서백편의자현(책이나 글을 백번 읽으면 그 뜻이 저절로 이해된다)’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같은 글과 문장을 여러번 되풀이해서 보면 뜻이 전달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래도 한국가양주연구소 류인수 소장님, 고창 우리술학교 이상훈 교장님과 교류하면서 많이 배웠다. 나의 스승님이다.

힘들 때마다 생각한다. 내가 하는 이 작업이 마지막 고문헌 정리가 될 수도 있다고. 내가 ‘지금’ 정확하게 정리하지 못하면 ‘후손’들은 내가 만든 부정확한 자료를 토대로 전통주를 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책임감을 갖고 임하고 있다.”

-가장 애착이 가는 연구결과는?

“모두 애착이 가지만 특히 ‘유성룡비망기입대통력’이 기억에 남는다. ‘유성룡비망기입대통력’은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이었던 유성룡이 왜란이 끝난 2년 뒤인 1600년의 달력인 대통력에 쓴 비망기다. 일본에 있던 문헌인데, 문화재청에서 2021년에 환수했다. 표지에 이순신 장군의 전사 장면이 적혀 있기도 하다. 이 달력의 여백에 술 빚는 방법(레시피)이 적혀 있는 것을 보고, 강의 때마다 소개하고 있다. 술 빚는 방법이 달력 여백에 기록돼 있을 정도로 술이 당시 일상 속에 깊숙하게 들어와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국술문헌연구소 김재형 소장이 전통주 빚기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한국술문헌연구소

-3500여개의 레시피를 정리해, DB화했는데, 실제로 술도 많이 빚어봤나?

“당연하다. 수백번 이상 술을 빚었다. 개미알이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부의주’라고 이름 붙인 술이 있는데, 부의주는 100번 이상 빚었다. 대나무즙을 사용한 술인 ‘죽력고’로 유명한 송일섭 명인(태인합동주조 대표)이 내게 하신 말이 있다. 내가 이것저것 귀찮게 자주 물어보니까, ‘한가지 술을 100번 빚어보기 전에는 술에 대해 묻지도 말라’고 하셨다. 그래서 정말 부의주(한번에 빚는 단양주)를 100번 이상 빚은 다음에 송 명인을 다시 찾아갔다. 일년동안 부의주 하나만 빚었다. 3일에 한번은 부의주를 빚은 셈이다. 쌀 불리기 과정(산장법)이 독특한 ‘청명주’도 많이 만들어본 술 중 하나다. 부의주 만큼은 아니더라도, 숱한 술을 빚어봤고, 지금도 계속 빚고 있다. 내가 소개한 레시피 대로 술을 빚으면, 정말 괜찮은 술이 나오는지 나부터 먼저 검증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옛 조상들이 했던 레시피를 그대로 따라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옳은 지적이다. 당시에 좋아했던 술의 스타일과 지금 현대인이 선호하는 술 성격은 같을 수가 없다. 술 원료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쌀만 해도, 그때 사용했던 쌀과 지금의 쌀도 똑같지는 않다. 조선시대 제조법 그대로 빚은 술이 현대인의 입맛에 맞을 리가 있겠는가? 선호하는 단맛의 정도도 크게 다르다.

다만, 옛문헌 분석을 통해 우리 조상들이 추구했던 술의 프로토타입(표준)을 파악하고, 이를 어떻게 현대적으로 재창조할 것인가를 고민하자는 것이다. 조상들이 술을 만들던 방법을 연구함으로써, 조상들이 술을 대하던 철학과 통찰력을 후대의 우리가 배워서, 새 술 개발의 화두로 삼자는 것이다. 우리 술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나 많은 상업양조장들이 이런 ‘법고창신’에 관심을 가져준다면, 우리 술이 한단계 점프할 수도 있고, 해외에서도 호평받는 계기가 마련될 수도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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