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정신을 계승한다는 염치가 있다면

손소희 제30회 전태일문학상 수상자 2024. 4. 24. 16:14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기고]

[미디어오늘 손소희 제30회 전태일문학상 수상자]

▲ 전태일. 사진=전태일재단

싸우는 노동자를 기록하는 사람들, '싸람'은 주로 사람 발길이 적은 투쟁사업장을 기록한다. 싸움에는 크고 작음이 없지만, 긴병에 효자 없듯 싸움이 길어질수록 떠나가는 사람이 생기기 마련이고, 싸움이 사회적 의미가 작지 않지만 주목받기 힘든 노동자들의 투쟁을 기록하기 위해 만든 팀이다. 나는 싸람의 기록자이고 제30회 전태일문학상 수상자이다.

나의 글은 처음부터 전태일 문학상 공모전에 제출할 계획이 아니었다. 2010년에 노조파괴 시나리오가 유행처럼 번질 때였다. 공세적인 노조탄압이 벌어질 때였다. 구미국가산업단지 제1호 입주기업인 KEC가 첫 번째로 노조를 박살내려고 작정하고 덤벼들었던 기업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금속노조의 소속이었지만 노동조합으로는 별로 눈에 띄게 활약이 없던 금속노조 KEC지회가 어떻게 된 영문인지 노조파괴 시나리오를 뚫고 노아의 방주도 아닌 노동조합이라는 배를 타고 노조파괴 급물살을 민주노조 깃발로 저항하면서 당당하게 생존해낸 투쟁 이야기를 원고지 200매가 넘는 분량으로 글을 썼다. 이렇게 용감무쌍하고 정의롭고 당찬 노동자들의 투쟁 이야기가 아무리 멋지다고 해도 글을 실어줄 언론사를 만나기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운 처지였다. 나는 때마침 전태일문학상 공모전을 알게 되었다. 갈 곳이 없던 나의 글이 갈 곳이 생긴 것이다.

내 글이 전태일 문학상에 당선되었다는 소식은 병원에서 들었다. 난치성 희귀질환을 앓는 딸이 병원에서 사경을 헤맬 때였고, 나는 삶이 무기력하게 느껴질 때였다. 서울에서 걸려온 전화번호를 무시하지도 못하고 받았다. 당선을 알리는 전태일 재단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병원 복도에서 전화를 받고 놀라고 가슴이 벅차서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던 기억이 난다. 잘못 걸려온 전화가 아니길 바라면서 내 절망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희망으로 밝아졌다. 앞으로도 노동자들이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서 투쟁하는 이야기를 듣고 쓰면서 살 수 있겠다는 야심찬 계획도 세웠던 날이다.

▲ 조선일보 '12대88의 사회를 넘자' 연재기사 '노동법 밖의 노동자, 프리랜서 400만 명'

그러다 최근에 전태일 재단에 대한 말이 많이 들린다. 얼마전 조선일보창간 104주년 공동기획 '12대88의 사회를 넘자'를 연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멍하게 시간을 흘러 보냈다. 또 최근에 전태일 문학상 수상작을 책으로 펴내는 사회평론 출판사가 근로기준법을 위반했다는 근로감독 결과를 언론 보도로 알게 되었다. 보도에 따르면 사회평론은 근로조건 일부를 근로계약서에 명시하지 않고 임금명세서에 계산 방법을 미기재한 사실이 적발됐고 취업규칙도 현행 법령을 반영하지 않아 근로기준법 위반이 확인됐다고 한다.

근로기준법을 위반했다면 시정명령에 따라 행정조치를 받고 이후에 재발방지를 약속하고 성실히 이행하면 될 일이 아니겠냐고도 하겠지만, 일시적인 실수나 행정적인 착오로 보기에는 사회평론 출판사가 가지는 사회적인 위상이나 이미지는 상당히 문제적이다. 사회평론 출판사 대표 윤철호씨는 사용자단체인 대한출판문화협회(출협) 회장도 맡고 있다는 점에서 출협회장이 운영하는 출판사가 근로기준법을 위반했다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기도 하다. 그에 더해서 출판노조가 사용자단체인 출협을 상대로 1년 넘게 교섭을 요구하고 있지만 출협은 교섭에 성실히 나오지 않아 노동자들의 노동 3권을 무시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전태일 문학상 수상집을 펴내는 사회평론 출판사가 출판사용자단체를 대표하는 출판사라면 전태일 정신에 부합한 것인가라는 의문도 상식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들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출판노동자의 노동기본권을 무시하는 출판자본가가 대외적으로는 전태일문학상의 후원단체로 둔갑해서 진보라는 완장을 차고 노동자들의 권리 투쟁을 조롱하는 행태로 비춰져서 나는 전태일 문학상 수상자로서 자괴감을 느낀다. 전태일 재단이 이 문제를 모르고 있지 않다는 게 더 큰 문제다.

출판노조가 전태일 재단에 사회평론 출판사에 대한 문제를 적나라하게 제기했음에도 노동자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여전히 사회평론의 손을 놓지 않고 의지해서 책을 내고 있어 출판자본의 오만과 부패를 부추기는 꼴이 되고 있다고 생각되어 나는 억장이 무너진다. 전태일 정신은 어디서 찾아야 하냐고 되묻고 싶다. 전태일 문학상 수상자로서 부끄러움을 나의 몫으로 짊어지지 않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목소리를 내야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전태일 재단이 사회평론 출판사의 노동기본권 무시, 부당노동행위에 눈감고 모르쇠 하는 행동은 전태일 정신을 훼손하는 짓이다. 이 땅에서 희생을 감내하면서 노동자의 권리를 확대하기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를 기만하는 행위라고 나는 감히 말하겠다. 최소한 전태일 재단이 사회평론에 수상집을 내는 건 중단해야 한다. 최소한 그렇게라도 해서 힘겹게 싸우고 있는 출판노동자들을 지지해서 전태일 정신을 계승한다는 염치는 있어야 하지 않는가 말이다.

만약에 염치 없이 전태일 재단이 노동기본권을 조롱하는 사회평론 출판사에 계속 수상집을 낸다면 나는 부끄러운 전태일 문학상을 책장에 세워둘 생각이 없다.

Copyright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