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체적 난국’의 조율사, 노재봉 전 국무총리 별세

최경운 기자 2024. 4. 24.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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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정부 때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노재봉(88) 전 국무총리가 23일 혈액암으로 별세했다. 국제정치학자이자 정치사상 이론가인 고인은 노태우 정부에 참여해 국가 전략 기획·실행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노태우 정부 집권기는 정치·사회적 민주화 물결이 몰아치고 함께 국제 정세가 격동하는 시기였다. 고인은 이로 인해 빚어진 ‘총체적 난국’의 조율사 역할을 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노재봉 전 국무총리가 23일 별세했다. 향년 88세. 사진은 지난 2008년 4월 세종문화회관 예술의 정원에서 열린 '건국 60년, 60일 연속 강연'에서 강연자로 나선 노 전 국무총리. /연합뉴스

경남 마산 출신인 노 전 총리는 마산고와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국제정치 이론과 정치사상 등을 연구했다. 1970년대 중반 이철승 신민당 대표의 ‘중도통합론’에 영향을 줬고, 노태우 전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이던 1987년 자문역을 맡아 6·29 선언 작성에 관여했다. 이 인연으로 1988년 말 중국 및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와 수교 등 북방 외교를 추진하는 노 전 대통령의 외교담당 특보로 임명됐다. 1990년 3월부터 12월까지는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다. 대통령 비서실장에 임명됐을 때에는 휴직을 할 수 있었음에도 사표를 내고 서울대를 떠났다. 고인은 국제 정치와 국내 정치에 대한 식견을 바탕으로 노 전 대통령의 내치(內治) 전략을 기획하고 실행에도 관여했다. 고인은 1990년 1월 22대 총리에 취임했으나 120일 만에 ‘강경대 사망 사건’ 이후 시위가 격화하면서 자리에서 물러났다. 1992년 14대 총선 때 집권 민주자유당 전국구 후보로 당선됐으나, 1995년 2월 김영삼 정권의 과거사 청산 수사 와중에 탈당해 정계에서 은퇴했다.

노 전 총리가 참여한 노태우 정부 집권기는 민주화 이행기이면서도 ‘총체적 난국’이라 불린 시기였다. 노 전 대통령이 직선제로 당선됐지만, 사회 각계에서 분출하는 민주화 요구와 임금 인상, 물자 파동, 부실 공사 등 누적된 정·경(政經) 부패가 터져 나오면서 사회 불안정이 일상화했다. 국제수지 적자 전환 등 국가 경쟁력도 하향세로 돌아섰다. 노 전 총리의 제자인 조성환 경기대 교수는 “88서울올림픽 이후 노태우 정부가 본격 추진한 북방정책과 남북 유엔 동시 가입 등 전방위 외교, 국내적으론 기득권과 밑으로부터 분출하는 요구 사이에서 민주화와 함께 각종 제도적 차원의 자유화로 타협을 모색한 전략 브레인이었다”고 했다. 노태우 정부가 민주화 물결 속에서 표류하지 않은 데는 고인의 공이 컸다는 평가도 있다.

한국 정당 사상 처음으로 집권당 대선 후보가 추대나 단일 후보 찬반 투표가 아닌 경선으로 결정된 1992년 대선 민자당 후보 경선이 도입되는 데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노 전 총리는 은퇴 이후엔 제자 그룹 등과 공부 모임을 만들었고 ‘한국자유회의’ 같은 지식 플랫폼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성신여대 교수 출신인 김영호 통일부 장관 등이 공부 모임 멤버였다. 노 전 총리는 제자들과 토론하며 그 결과물을 엮어 ‘자유민주주의와 그 적들’(2018) 등을 펴냈다. 고인은 제자들에게 민주화와 함께 제도의 자유화,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의 중요성과 함께 이를 위한 지성인들의 역할을 강조했다. 한 제자는 “고인은 남북의 실존적 차이는 자유민주주의와 공산 전체주의 체제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임을 자각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고 했다.

유족으로는 아내 지연월씨, 딸 모라, 아들 진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될 예정이며 발인은 27일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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