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이브 전문가들이 파업을 벌이면?

임윤희 2024. 4. 24.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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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에게 자료명과 청구기호를 제출하니, 10㎝ 정도 두께의 검정색 파일 다섯 개가 카트에 실려 왔다. 그 묵직한 파일들이 내게 오는 순간, 이게 보통 물건은 아니겠구나 직감했다.
2007년 10월8일 캐나다 출신의 저널리스트 겸 작가 나오미 클라인이 밴쿠버 도서관 직원들의 파업 집회에 참여했다.ⓒBeth Lowther

17년 전, 캐나다 밴쿠버를 여행하다가 도서관 파업을 목격한 적이 있다. 구체적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돌아온 게 오래도록 마음에 걸렸는데, 이번에 다시 밴쿠버에 방문할 기회가 있어서 그 시절 파업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밴쿠버 공공도서관 7층의 스페셜 컬렉션실. 이곳은 도서관에서 갈무리한 가장 귀한 자료들을 별도로 관리하며 이용자에게 서비스하는 공간이다. 여기에 ‘밴쿠버 공공도서관: CUPE 391 파업 아카이브’라는 자료가 있었다. 사서에게 자료명과 청구기호를 제출했더니, 10㎝ 정도 두께의 검정색 파일 다섯 개가 카트에 실려 왔다. 그 묵직한 파일들이 내게 오는 순간, 이게 보통 물건은 아니겠구나 직감했다.

2007년 캐나다 밴쿠버 도서관의 파업 당시 현수막. 밴쿠버에 도서관이 생긴 이래 77년 만의 첫 파업이었다. ⓒ임윤희 제공

CUPE 391의 노동자들은 2007년 7월26일부터 88일 동안 도서관 문을 닫았다. 밴쿠버에 도서관이 생긴 이래로 77년 만에 벌어진 첫 파업이었다. CUPE(Canadian Union of Public Employees)는 캐나다의 대표적인 산별노조 중 하나로,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노조다. 뒤에 붙은 숫자는 각각의 지부를 뜻하는데, CUPE 391은 밴쿠버에 있는 여러 공공도서관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지부다.

내가 스페셜 컬렉션실에서 본 자료는 만듦새나 디자인이 그럴듯하진 않았다. 하지만 내용은 놀랄 만큼 탁월했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도서관 사서란 아카이브를 만드는 최고 전문가가 아닌가! 그러니까 내가 본 것은 아카이브 전문가들이 자신의 파업을 기록하고 정리한 자료였다.

도입부에서는 밴쿠버 공공도서관의 역사와 현황을 다루고 있었다. 파업 관련 아카이빙을 하면서 왜 이런 내용을 그것도 맨 앞에 배치한 것일까. 이는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일터가 어떤 곳인지 노동자의 시각으로 정리해나가는 작업이다. 또한 이 자료를 읽는 이들에게 본문으로 부드럽게 진입할 수 있도록 배경지식을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다음 장에서는 CUPE 391의 실체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노조 결성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역사를 요약한 뒤, CUPE 391의 현황을 정리했다. 노조원 수와 여성 및 비정규직 비율, 조직 체계와 분회 및 위원회 활동, 사용자와의 관계 등이 묘사되는데, 읽다 보면 노조의 디테일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그려진다. ‘우리는 이런 존재이고, 그걸 이렇게 밝힐 만큼 당당하고 떳떳하게 활동하고 있어.’ 이 자료를 만든 이들은 자신감 있게 이런 말을 속삭여대는 듯했다.

밴쿠버 공공도서관 7층의 스페셜 컬렉션실에서 서비스하는 ‘밴쿠버 공공도서관: CUPE 391 파업 아카이브’. ⓒ임윤희 제공

본격적으로 파업 이유를 살펴보려는데, 사서 선생님이 나에게 다가왔다. 노안이 와서 안경을 썼다 벗었다 하며 코를 박고 자료를 들여다보는 내가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슬며시 돋보기안경을 내밀며 이게 필요한지 물었다. 이런 세심한 돌봄을 누리는 맛에 내가 도서관에 다닌다. 하지만 돋보기라니, 그걸 받아들이기엔 나는 아직 젊다.

파업 의제로 내세운 ‘남녀 임금 격차’

다음 장을 펼쳐드니 드디어 CUPE 391이 내건 이슈가 나왔다. 클라우디아 골딘이 연구하여 2023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바로 그 사안, ‘남녀 임금 격차’가 이들이 파업 전면에 내세운 의제였다.

한국도 그렇지만, 전 세계 많은 도서관은 여성 노동자 비율이 매우 높은 일터다. 밴쿠버의 도서관 노동자들은 여성의 노동에 대한 사회적 폄훼가 자신들의 노동을 덜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게 만든 주요인이라고 진단했다. 이런 사안을 강하게 제기한 것도 흥미로웠지만, 이들이 자신의 노동을 다각도로 세밀하게 분석한 지점도 눈길을 끌었다. 가령 밴쿠버의 다른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노동자와의 임금 격차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었고, 남녀의 진급 차이로 인한 도서관 내부의 임금 격차도 제시했다. 비정규직 초급 사서의 임금으로는 도저히 밴쿠버에서 아이를 키우며 살 수 없다는 점도 어필하고 있다. 사서들의 아카이빙 작업답게, 뒤편에는 남녀 임금 격차와 관련한 자료 목록이 매우 길게 소개되어 있다.

파업 기간이 긴 만큼 협상 과정도 지난했다. 이들의 아카이빙에는 파업 직전부터 끝날 때까지 사용자인 밴쿠버시의 입장 변화, 노조 내부의 입장과 이견 등이 회의별, 협상 테이블별로 정리되어 있다.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 770여 명은 결정이 필요한 순간마다 투표를 통해 의견을 수합했다. 이들은 직접적으로 임금을 올리는 것만큼이나 자신들이 제시한 사안이 정규 시스템 속에서 지속적으로 논의되기를 원했다. 즉 성별에 따른 임금 격차 해소를 장기적 목표로 상정한 뒤, 노사가 이를 다루는 테이블을 공식적으로 마련하는 데 집중한 것이다. 파업의 결과로 만들어진 ‘동등한 임금 관련 노사위원회’는 현재까지 그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CUPE 391 파업 당시 반려동물과 함께하는 집회도 열렸다. ⓒ임윤희 제공

아카이빙의 주요 자료만큼이나 부록도 흥미로웠다. 필자, 연구자, 활동가 등의 릴레이 강연, 자전거를 타고 벌이는 선전전, 노숙인과 연대하는 뜨개질 모임, 반려동물과 함께하는 집회 등 파업 기간의 대시민 활동 자료가 글과 사진, 동영상으로 남아 있어 당시의 분위기를 짐작하게 한다. 파업으로 소득이 사라진 노조원을 위해 저리 융자를 소개하는 유인물에는, 단기 일자리라도 찾아야 해서 잠시 파업 현장을 떠나는 노조원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글이 남아 있어 마음이 짠해지기도 했다.

또다시 도서관의 날(4월12일)이 찾아왔다. 시민에게 서비스하는 공공기관으로서 도서관의 소중함을 되새겨볼 필요도 있겠지만, 이날이 도서관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노동환경 또한 돌아보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 그들 덕분에 우리 도서관의 오늘도 활짝 문을 열고 있으니 말이다.

임윤희 (도서출판 나무연필 대표, <도서관 여행하는 법> 저자)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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