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백 년 이어진 시선집, 600개의 세계가 온다

임지영 기자 2024. 4. 24.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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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지성 시인선과 창비시선이 각각 600호, 500호를 발간했다. 50년 역사를 가진 시선의 출간에 관여하고 있는 이광호 문지 대표와 송종원 〈창작과비평〉 편집위원을 만났다.
이광호 문학과지성사 대표는 ‘새로운 언어적 모범이나 실험에 대해 열려 있는 시선집’을 지향해왔다. ⓒ시사IN 이명익

1975년, 신경림의 〈농무〉가 창작과비평사에서 출간되었다. 계간지 〈창작과비평〉 여름호가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판매 금지된 해이기도 하다. 그해 12월, 문학과지성사가 출범했다. 계간지 〈문학과지성〉 동인인 김병익 문학평론가가 언론 탄압으로 해직된 이후였다. 3년 뒤인 1978년 문학과지성사는 황동규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를 첫 번째 시집으로 냈다. 그렇게 창비시선, 문학과지성(문지) 시인선이 시작되었다. 약 50년이 지났고 최근 각각 500호, 600호를 발간했다.

좀 더 늦게 시작했지만 문지 시인선이 600호에 먼저 도착했다. 시인들에게 문지 시인선은 어떤 의미일까. 민음사의 ‘민음의 시’도 300호를 훌쩍 넘겼고 문학동네 시인선도 200호가 지났다. 소규모 출판사들도 시선을 내고 있지만 “중심에 있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듯이, 문지 시인선”이라고 이장욱 시인은 〈문학과사회〉 2024년 봄호에서 말했다. 이원 시인은 문지 시인선이 “여전히 전위의 정점과 깊이의 최전선을 호명하고 포용한다. 출발이 그랬던 것처럼 지금까지도 시를 가장 우위에 둔다”라고 썼다.

창비시선에 대한 시인들의 신뢰도 견고하다. 500번째 시선을 맞아 시인들의 추천으로 401~499번 시집의 시를 추린 안희연·황인찬 시인은 “한 권의 시집은 하나의 세계에 준하는 것이고 한 권의 시집을 읽는 일은 하나의 세계를 마주하는 일이므로 시를 사랑하는 우리는 한 권의 시집을 읽으며 우리 자신조차 몰랐던 우리의 가능성을 알아차리게 된다“라면서 ”창비시선은 내일을 꿈꾸고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타진하며 우리 삶의 혁명을 모색하며 걸어왔다”라고 말했다. 50년 역사를 가진 시선의 출간에 관여하고 있는 이광호 문지 대표와 송종원 〈창작과비평〉 편집위원을 각각 만났다. 창비 서교빌딩과 문학과지성사 사옥 사이 거리는 걸어서 10분이다. 한국 시문학을 이끌어온 양대 산맥이 지척이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이 600호를 냈다. 1978년 이후 46년 동안 출간된 시인선을 한군데 모았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 문지의 ‘문학과지성 시인선’

6층짜리 문학과지성사 사옥의 꼭대기층은 ‘아카이브’ 장소다. 출판사의 50여 년 역사를 증명하는 책들이 3면의 서고를 채우고 있다. 볕이 가장 잘 드는 장소를 차지한 건 책이 아니라 화분 30여 개다. 주말에도 사무실에 들러 화분에 물을 준다는 이광호 대표가 요즘은 라일락 철이라며 꽃이 핀 화분을 가리켰다. 문학과지성사 하면 떠오르는 이청준과 조세희 등의 ‘소설명작선’에도 시선이 가지만 아무래도 가장 눈에 띄는 건 시집이다.

고 오규원 시인이 디자인한 ‘네모 안의 네모’와 이제하 작가가 그린 시인의 캐리커처는 이원 시인의 말대로 멀리서 봐도 ‘문지 시집이구나, 표지가 언제나 입구가 되어주었다’. 심보선 시인처럼 대놓고 ‘촌스럽다’고 하는 이들도 있고 이 대표마저 디자인을 바꿔보려 했으나 늘 반대에 부딪혔다. 이미 그 자체로 고유명사가 되었기 때문에 ‘귀중한 전통을 이어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에 승복한 셈이다. 최근에야 유광 종이를 무광 종이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시인이 원하는 캐리커처를 표지에 싣기도 한다. 큰 변화라면 변화다.

이광호 대표와 문지의 인연은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과리 평론가 등의 제안으로 계간지 동인에 합류한 뒤 편집위원과 사외이사 등의 활동을 이어온 지 25년이다. 2017년에는 문학과지성사 대표에 취임했다. 문학평론가이기도 한 그는 1988년 등단할 당시 창비시선 1호와 문지 시인선 1호를 비교하는 비평을 쓰기도 했다. 신경림 시와 황동규 시의 차이가 창비와 문지의 차이이기도 했던 시절이다.

한때 문지 시인, 창비 시인이라는 분류가 있을 정도였다. “신경림 시(창비)에는 1인칭 농민의 목소리가 나온다. 억압받는 농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느낌이 강했고, 황동규 시(문지)는 ‘나’라고 하는 시적 자아를 확신하지 않고 그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창비가 서정시의 계보가 뚜렷하고 현실과 접점을 찾으려고 노력했다면 우리(문지)는 시대의 억압을 개인 내면의 억압으로 받아들이는 언어들이 많았다. 최승자·이성복·김혜순의 시들도 1970년대 사회적 억압을 얘기하지만 직접 말하기보다 개인의 삶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좀 더 전위적 언어로 드러난다.”

지금은 문지 시인, 창비 시인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어렵다. 시대가 달라졌고 경계는 느슨하다. 양쪽 시선에 모두 포함된 시인도 있다. 이 대표도 정체성을 잘못 규정하면 ‘폭력적인 것’이 된다고 말했다. 다만 문지가 일관되게 지향하려 했던 바는 있다. 또 나오는 단어가 ‘전위’다. ‘새로운 언어적 모범이나 실험에 대해 열려 있는 시선집’이 되려고 했다. 새로운 세대의 시인들을 향한 말이기도 하다. “최근 한 10년, 500번대 시집의 경우 리스크가 있어도 첫 시집을 내는 젊은 시인들에게 문을 좀 더 열어두자는 모토가 있었다. 100권 가운데 13권 정도가 시인의 첫 시집이더라. 1년에 낼 수 있는 시집이 10권, 많아야 15권이다. 세대별로 견고하고 꾸준하게 자기 시를 갱신하면서 좋은 시를 쓰는 분들도 있기 때문에 새로 들어오는 분들에게 진입장벽이 있는 편이다. 13권은 적은 숫자가 아니다.”

문지 시인선 중 가장 많이 사랑받은 시집은 1989년 출간된 기형도 시인의 〈입 속의 검은 잎〉이다. 초판 재판을 합쳐 94쇄를 찍었다. 37만여 권이 팔렸다. 이 대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시집이기도 하다.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할 당시 문학 담당 기자가 기형도 시인이었다. 개인적으로 충격적이었던 시집은 최승자의 〈이 시대의 사랑〉(1981)이다. “소위 여성시라고 하는 것의 차원을 바꿨기 때문에 엄청나게 임팩트가 컸고 그 영향으로 이후에 훌륭한 신인이 많이 나왔다.”

이 대표가 보기에 시의 전성기는 1980년대다. 기존 매체가 강제로 폐간되고 무크지의 전성기가 왔다. 소설보다는 시가, 고통이나 억압을 즉각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형식이었다. 글쓰기의 전략 측면에서 문학사적 의미가 있었다. 지금은 지형이 달라졌다. 이 대표는 한국 문학의 가장 큰 약점이 한국어로 쓰였다는 것과 시장이 작다는 점이라고 설명한다. 본질적으로 사이즈가 작아서 다양성을 갖기가 어렵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서점에 가면 한 코너가 시집이고 시에 대한 기본 팬덤이 있다. “기형도의 경우 내가 기형도 세대이고 동년배니까 기억하고 좋아하는 게 당연한데 지금의 10대나 20대가 기형도를 읽는다는 건 되게 신기한 일이다. 독자들이 계속 태어난다는 사실이 놀랍다. 시장의 사이즈는 모르겠지만 그 지속성은 세계적으로도 놀라운 부분이다.” 우리보다 시장이 큰 일본이나 서구에서도 시집이 생존하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이례적이다. 근래 어떤 의미에서 실험적이라고 볼 수 있는 진은영 시인의 시집(〈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이 10만 부 가까이 팔렸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문지 시인선의 출간을 결정하는 단위는 출판 편집위원회다. 〈문학과사회〉 편집 동인을 하고 있거나 했던 비평가 7명이 협의한다. 한번 동인에 들어오면 1~2년 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역할을 하게 된다. 옛날에는 기다리기만 해도 좋은 원고가 많았지만 경쟁사도 많고 젊은 세대가 갖는 문학적 태도도 달라졌기 때문에 투고된 원고 중에서 결정하는 비중 못지않게 젊은 시인을 발굴해 계약을 추진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최근 김혜순 시인의 문지 시인선 〈날개 환상통〉이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시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성복 시인의 시론집 〈무한화서〉도 후보에 선정되었다. 세계문학에서 한국 시에 관심이 높아지는 배경에 대해 이 대표는 “시라고 하는 장르를 한국 문학시장이 포기하지 않고 지켜왔기 때문에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문지 시집이 그해 재판을 찍고 쇄를 거듭해, 1년에 팔리는 시집을 따지면 최소 20만 부다. 재판을 찍는다는 건 시인이 영입되고 탄생할 수 있다는 의미다. 한국 시가 세계적 위상을 갖게 된 건 결국 독자가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2019년 6월 김혜순 시인(가운데)과 최돈미 번역가의 시집 <죽음의 자서전>이 캐나다 문학상인 그리핀 시 문학상(Griffin Poetry Prize)의 2019년 최종 수상작으로 선정된 후, 김혜순 시인 등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최근 문지는 501번째 시집부터 599번째 시집까지, 총 99편의 시집 뒤표지 글, ‘시의 말’을 묶어 〈시는 나를 끌고 당신에게로 간다〉를 펴냈다. 시인의 말이 아니라 ‘시의 말’이다. 문학적 글쓰기의 요체와 관계가 있다. “문학적 글쓰기라고 하는 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경험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나라고 믿었던 것이 깨지는 순간이 있는 거고 그게 글쓰기가 된다. 나라고 믿는 것에서부터 멀어지는 것, 그게 글쓰기의 기원이다. 시인의 말이 아닌 시의 말은 시 쓰는 과정의 연장선상에서 터져나오는 어떤 말이다. 규정할 수 없는 문학적 언어가 다채롭게 담겨 있다.”

문학과지성사는 특정 개인의 출판사가 아니라 문학 공동체의 것이라는 창립 초기의 뜻을 이어오고 있다. 대부분의 주식을 ‘문지문화협동조합’이 보유하고 있지만 조합원들은 경제적 지분을 갖지 않고 ‘정치적’ 의결권만 가진다. 문지가 줄곧 순문학에 집중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 대표는 그럼에도 민간기업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출판시장이 어려울 때 실용서가 잘 팔린다. 50년 동안 실용서나 자기계발서를 내지 않고 상업 출판사를 유지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처음에는 외국 문학과 아동서도 다루지 않았다. 요즘 실용서도 인문이란 이름으로 나오기 때문에 엄격한 의미의 인문 시장은 굉장히 좁아졌다. 문학하는 사람이면서 경영자 입장에서 출판사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물적 토대를 만들고 지키는 게 쉽지 않다.”

이광호 대표는 500여 개 출판사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한국출판인회의 회장이기도 하다. 독서진흥예산의 축소와 저작권 문제 등 출판계 안팎의 과제도 고민해야 하는 처지다. 30~50대를 오롯이 문지와 보낸 그에게서 어떤 자부심이 엿보인다. “정년이 보장된 대학교수를 그만두고 매출을 살피며 직원들 월급을 주어야 하는 압박감을 이어가는 이유는 출판사 그리고 문학의 공공성 때문이다. 자부심일 수도 있지만 책임감이고, 문학청년이었던 사람으로서 문학에 대한 여전한 애정도 섞여 있는 것 같다.” 문학이 담론의 생산지였던 시대도 지났고 그 힘은 확실히 약해졌지만 그럼에도 한 권의 시집은 상상력과 감성을 단단하게 만들고 채우는 데 훌륭한 도구라고 설명하는 그의 어조에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4월9일 송종원 <창작과비평> 편집위원이 창비시선 500 특별시선집과 기념시선집을 들고 창비의 연혁이 적혀 있는 벽을 배경으로 섰다. ⓒ시사IN 신선영

■ 창비의 ‘창비시선’

충주에서 나고 자란 송종원 〈창작과비평〉 편집위원은 고등학생 때부터 시집을 읽었다. 고등학교 선배이기도 하고 인근에서 살았던 시인이 창비시선 1호 시집을 쓴 신경림이었다. 그의 시를 친구들과 읽었고 대학에 진학한 뒤에는 여러 출판사의 시선을 두루 접했다. 2009년 〈경향신문〉에 시 평론으로 등단한 후 창비 출판사의 제안으로 젊은 비평가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듬해 출간된 이기인 시인의 〈어깨 위에 떨어지는 편지〉 해설을 쓰기도 했다. 시집에 실린 그의 첫 해설이다.

2016년 계간지 〈창작과비평〉 편집위원에 합류했다. 현재는 창비시선의 출간을 결정하는 시 소위원회 소속이기도 하다. 시인과 평론가로 구성된 위원 4명이 한 달에 한 번 회의를 한다. 출판사에 투고한 원고뿐 아니라 위원들이 괜찮다고 생각해둔 시를 가져와서 이야기하는 자리다. 생각은 일치하기도 하지만 갈리기도 한다. “그 안의 대화가 중요한 것 같다. 대부분 좋은 시집은 괜찮은 인상을 받았는데 정확히 잘 모르겠다는 데서 시작한다. 그 끌림을 놓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사실은 익숙한 끌림일 수 있고 고유성 같은 것들이 의심스럽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한다. 토론하는 과정에서 각자의 생각이 교정된다.” 검토하는 시가 창비시선의 영역을 어떻게 채울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자주 생각한다. 창비시선이 지켜온 덕목을 고수하는 느낌의 시집도 있지만 조금 다른 결이어도 한국시의 자장 안에서 봤을 때 의미를 지닌 경우도 있다. 의견이 엇갈려 한 달 뒤 다시 토론을 벌이기도 한다.

정호승 시인의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는 60쇄 가까이 찍으며 각별히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이제 창비에서 출간되지 않지만 최영미 시인의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도 50만 부 넘게 팔렸다. 이번에 송 편집위원은 창비시선 중 시인들의 애송시를 추려 특별시선집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거리에 노래를〉에 담았다. 즐겨 읽는 시편을 추천해달라는 요청에 시인 77명이 시를 보내주었다. 시를 훑어보며 새삼 창비의 시 세계가 구축한 영역이 대단히 넓다는 걸 깨달았다. “개념적으로 말하면 평화와 공존의 감각 같은 것들이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가령 이근화 시인의 시집 〈뜨거운 입김으로 구성된 미래〉 속에 ‘물방울처럼’이란 시가 있다. 허수경 시인 등 병환 중에 있던 시인들의 실명도 나오고 그것을 괴로워하며 자신의 삶에 대한 괴로움도 토로하다가 뜬금없이 세탁소 상호가 나오기도 한다. 뭐랄까, 사람들의 삶 속에 고통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말하는 느낌이다. 시인 하면 떠오르는 비명의 이미지 같은 것들이 있잖나. 괴로운 걸 폭발시키는 그런 이미지뿐만 아니라 그걸 달래보려는 어떤 품 같은 것들이 창비시선의 디자인하고도 닿아 있는 느낌이 있었다.”

이번 특별시선집에서 그는 창비시선의 특징으로 ‘개인의 내면에 머무는 시선이 아니라 특정 장소와 시대 안에서 관계를 형성하는 사람들이 주고받는 눈길이 드러난다는 점’을 꼽았다. “가령 밥을 먹는다고 하면 고독하고 적막한 식탁에서 혼자 밥 먹는 게 아니라 사람들과 나눠 먹는 밥이다. 이시영 시인의 시 중 ‘공사장 끝에’라는 시가 있다. 철거 용역들이 수군대는 소리를 시로 썼는데 철거하려는 집 안에 사람이 있을지 모르니 오늘 밤은 자게 하고 지켜보자는 식의 풍경이 등장한다. 고통의 자리지만 그 안에 담긴 온기 같은 걸 담아내는 측면이 창비의 지향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3월27일 ‘창비시선 500 기념시선집·특별시선집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김사인 시인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금은 시집 한 권당 대략 2000부를 찍지만 1만 부를 인쇄하던 시대도 있었다. 98학번인 송종원 편집위원은 1990년대 말까지는 시집을 선물하는 일이 자연스러웠다고 회상한다. ‘생일이면 시집을 선물하고 어떤 시집을 읽었느냐고 묻는 일도 일상적이었다. IMF(외환위기) 직후 책을 읽는 게 가성비에 맞지 않는다는 식의 생각이 생겨난 것 같다’. 시 독자가 줄어든 것 같아도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이기도 한 그의 곁에는 늘, 여전히 시를 쓰겠다는 문청이 있다. ‘여대’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성별이 편중되어 있고 평론가로서 독자와의 만남을 하면 남성 독자가 드물다는 특징은 있다.

시선 500호의 의미는 간단치 않다. 출판사가 판을 깔았지만 시인과 독자가 이룬 결실이다. 한 출판사가 아니라 한국 문화가 만들어낸 결과물이기도 하다. “어떤 서점에 시집 코너가 있고 그 안에 아주 오래된 시집과 최근 만들어진 시집이 같이 꽂혀 있는 건 한국만의 특별한 상황이라고 알고 있다.” 지난 시를 다시 훑어보며 신경림·김사인·나희덕 등 대표적인 ‘창비 시인’뿐 아니라 아직 충분히 조명되지 못한 시인들도 있다는 걸 발견했다. “2000년대 이전 시집 중 더 호출해 이야기해도 될 만한 시집들이 꽤 있고 그런 시집의 역사에 참여해 부분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개인적인 영광이기도 하다.”

문지 시인선과 창비시선의 차이에 대해 묻자 색에 비유하기도 했다. 문지는 말하자면 빨간색이다. “위급 신호를 보내주는 느낌이랄까. 우리 세계의 어떤 부분이 무너지고 있고 여기가 되게 위험하다는 걸 보여준다. 최근 출간된 이장욱 시인의 〈음악집〉을 보면 ‘신경정신과에서 살아남기’라는 시가 있다. 한 개인의 고통이 있는데 의사도 치료할 수 없는, 한국 사회의 어떤 흔적이 담겨 있다. 끔찍한 고통의 현장을 잘 그리면서 위급한 부분을 보여주는 것 같다. 창비는 녹색 느낌이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세계의 불안 요소를 탐지한다기보다 한자리에 오래 있으면서 고통에 처한 사람들이 와서 쉴 수 있고 해결책까지는 아니더라도 돌볼 수 있는 힘 같은 걸 준다. 한자리를 우직하게 지키며 서 있다는 느낌이 든다.”

책을 읽는 독자들이 쪼그라들고 있는 시대, 시집 한 권을 읽는 건 왜 중요할까. “시집이나 문학책을 잘 들춰보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불편할까 봐서다. 불편한 걸 들여다보는 순간 내 세계가 좀 더 넓어진다. 고통 없이는 나의 세계가 넓어지기 어렵다. 내 고통이든 누군가의 고통이든 그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보고 같이 고민해보는 순간에 열리는 세계가 있다. 고통을 매개로 열리지만 고통만 있는 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만남도 있을 것이고 어떤 기쁨도 있을 것이다. 부당한 고통이 아니라면 좀 더 세계를 풍성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해줄 것이고 시집은 그 과정에 좋은 경로를 제공해줄 것이다.”

임지영 기자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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