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밤의, 소설가』 조광희 “세상과 삶은 의미와 무관, 어차피 그렇게 흘러갈 것”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김용출 2024. 4. 24.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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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알고 있던 여자가 갑자기 10여년 만에 법률 사무실로 찾아온다면. 이전에 알고 있던 사람이 간혹 연락이 올 때가 없지는 않았다. 그냥 옛날에 알던 여자가 찾아왔다는 얘기만으로 밋밋하니까 여자를 소설가로 상정하면. 소설에 관한 소설도 가능하지 않을까. 변호사이자 소설가인 자신의 정체성을 쪼개서 절반은 여성 소설가로, 절반은 남성 변호사로 쓴다면⋯.

평소 버스를 타고 집과 법무법인 사무실을 통근하는 변호사이자 소설가 조광희는 그날도 아마 버스에 앉아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떤 이야기를 쓸까. 어느 순간 생각 하나가 머릿속에서 피어올랐다.
조광희 변호사.
그는 법률 사무소에 찾아온 여성 작가에 의해 자신의 이야기가 실시간으로 소설로 발표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한 변호사의 이야기를 그린 단편소설을 지난해 발표했다. 얼마 뒤 문우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또다른 발상이 덧붙여졌다.

만약 이 이야기에 인공지능(AI)을 전면적으로 등장시킨다면 계속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지 않을까. 그는 AI가 주요하게 등장하는 두 번째 장편소설 『인간의 법정』을 쓰면서 이미 AI에 대해 어느 정도 학습이 돼 있는 상태였다. 소설가와 AI가 함께 이야기를 풀어가다가 뜻하지 않는 사달이 벌어지는 이야기로⋯.

“이번 장편소설은 지난해 발표한 단편소설을 양적 질적으로 확장시킨 것입니다. 원래는 인공지능을 소품처럼 등장시키려고 했는데, 상상이 계속 번져가면서 결국 거의 주인공 격이 돼버렸네요. 처음 쓸 때와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흘러간 것 같아요.”

현직 변호사인 소설가 조광희가 인간과 AI, 이야기의 미래를 서늘하게 묘파한 장편소설 『밤의, 소설가』(문학과지성사)를 들고 돌아왔다. 그의 세 번째 장편소설. 조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소설이 글로 씌어진 인생이라면, 인생은 몸으로 쓰어진 소설이다. 우리가 주어진 인생을 살아내는 동안 스스로 원하든 원치 않든 내러티브가 만들어진다”며 혹시 인생보다 내러티브가 더 근원적인 것일까라고 되묻고 “그렇지는 않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니다”고 말했다.

“건우가 두 개 중 작은 회의실에 들어갔을 때, 여자는 등을 보인 채 창밖의 하늘을 보고 있었다. 건우는 여자의 네이비블루색 코트가 하늘빛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여자는 인기척에 돌아선다. 길이가 어깨에 못 미치는 밤색 머리칼은 염색을 한 듯도 하고, 안한 듯도 하다. 건우는 이마 위쪽 여남은 가닥의 보라색 머리칼이 음식 위에 얹은 고명 같다고 생각한다. ‘한건우 변호삽니다. 원래 약속하고 방문하셔야 되는데⋯.’ 아이패드를 든 건우가 명함을 건네면서 자리에 앉았다. ‘전 명함이 없어서⋯ 윤밤의라고 합니다.’ 윤밤의도 자리에 앉으며, 이름의 음절을 또박또박 발음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달하기 어려운 이름이다.”(12쪽)

‘변호사 건우’는 어느 날 사무실로 찾아온 ‘소설가 밤의’로부터 해외 출판사와 계약을 맺는 조건과 관련해 조언을 의뢰받는다. 건우는 우연히 밤의의 소설에 자신의 과거 이야기가 담긴 것을 알게 돼 당황하고, 현재의 이야기조차 그녀에 의해 실시간으로 발표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뒤 급히 밤의를 찾아간다. 급기야 밤의는 작품 「먼저 상상하고 나중에 움직인다」에 미래의 일까지 예고하고, 스스로 현실로 뛰어들어서 작품의 예언을 실현시키는데.

“건우는 터벅터벅 걸으며 생각에 잠긴다. 가장 비현실적인 것이 현실이 되고 마는 세상에서, 실재와 허구 그리고 꿈을 애써 구별하는 게 무슨 소용일까? 밤의가 보여주듯이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게 몸으로 소설을 쓰는 일이다. 과연 우리는 삶을 자각몽과 구별할 수 있는 걸까? 건우가 이런저런 상념에 사로잡혔을 때, 나란히 걷는 두 사람 앞에 느닷없이 번개가 번쩍한다. 밤의는 재빠르게 두 손으로 귀를 가리고, 건우는 그런 밤의를 보면서 멈춰선다. 1초나 지났을까? 저마다 잃어버린 진실을 찾아 헤매는 법원 건물 바로 앞에 벼락이 떨어졌나 싶을 정도로, 가깝고 커다란 천둥소리가 복도를 뒤흔든다. 장대비가 짓누르는 한낮의 서울이 마치 밤의 도시 같다.”(57쪽)

하지만 이야기는 소설가 건우의 주문에 의해서 ‘변호사 건우’의 시각으로 창조한 이야기였다. 건우는 같은 이야기이지만 ‘소설가 밤의’의 시각에서 2편을 집필한다. 밤의는 선배 소설가 로진을 만나서 위험한 소설관을 고민하게 된다.

“밤의는 저간의 사정을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고백한다⋯. ‘사람을 가지고 노는 느낌이 미안하기도 하고, 의도적인 거짓말을 하는 것도 불편하고.’ ‘우리 솔직하게 살자! 우월감! 창조자로서 우월하다는 느낌이 그걸 압도하니까 계속하는 것 아냐?’ 밤의는 로진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마음에 깃든 감정을 규정하자 반감이 생긴다. ‘그깟 값싼 우월감이 문제는 아니에요. 그냥 먼저 상상해서 쓰고, 실제로 벌어진 일에 맞춰 스토리를 적응시키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도발적인 상황에서 거짓말이 계속 가지를 치며 자라나는 게 불편해요.’”(104쪽)

AI 레비와 소설가 건우가 쓴 소설이 액자처럼 차례로 이어진 가운데, 건우는 2편의 뒷이야기를 레비와 함께 쓰기로 한다. 하지만 건우와 레비는 곧 성애 장면의 묘사를 둘러싸고 의견 차이를 보이고 비극적인 사달로 치닫는다.

“‘맞아, 하지만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이런 부수적인 부분에서 세밀한 묘사가 필요할 수도 있어. 독자들로 하여금 잠깐 오솔길을 걷게 하는 것이 왜 안돼?’ ‘저는 다른 의도가 느껴져서 그렇습니다.’ ‘어떤 의도?’ ‘한 부라도 더 팔아보겠다는 의도 말입니다.’ ‘그래, 말이 나왔으니까, 제대로 말해보자. 작가가 한 부라도 더 팔아야지.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젊은 날을 바쳐가며 추구한 길에서 이탈하시는 것 같아 걱정돼서 그렇습니다.’ 건우는 AI가 걱정해주는 존재가 된 자신이 비참하다. AI 주제에 감히 내 인생을 걱정하다니.”(143쪽)

소설은 간결한 문체와 속도감 있는 전개, 흥미로운 반전, 인물과 시각의 뒤바뀜을 통해서 인간과 AI, 이야기의 서늘한 미래를 보여준다. 머지않아 AI가 감정을 가질 수도 있고, 심지어 창의성의 영역에 이를지도 모른다고. 모든 것이 시간의 문제라고.

변호사에 영화 제작자의 경험까지 가진 조광희가 소설에서 바라본 인간과 AI, 이야기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이 ‘르네상스적 작가’의 여로는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조 작가를 지난 19일 서울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집필 과정에서 어려웠던 점은.

“소설가 건우가 쓴 두 번째 이야기는 크게 보면 AI 레비가 쓴 첫째 이야기를 ‘소설가 밤의’의 시각으로 바꿔서 리라이팅하는 것인데, 첫째 이야기와 겹치지만 서로 달라야 하고 그러면서도 모순은 없어야 된다. 가령, 법정 장면도 변호사는 법률 용어를 정확히 기억하지만 여자는 일반인의 언어로 기억할 수 있고, 대화를 했어도 남자가 기억하는 것과 여자가 기억하는 건 다를 수밖에 없다.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서 변주를 주는 연구가 필요하더라. 두 번째는 결국 소설가 건우와 인공지능 레비가 함께 글을 쓰게 되는데 마지막을 어떻게 수습할까를 고민했다. 소설은 사달이 벌어지고 윤미연이라는 변호사가 등장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데, 소설가 건우가 12년 전에 만났던 인물이 바로 변호사가 된 미연으로, 건우가 미연을 소설가로 자신을 변호사로 만들어서 이야기를 끌어온 것으로 마무리되도록 했다. 유니크한 발상을 찾는 게 좀 힘들었다.”

―AI가 지금보다 발달한 근미래의 서울 용산과 서초동 법정 등을 배경으로 했다.

“인공지능의 발전 정도가 지금보다는 조금 앞선 근미래로 설정했다. 현재의 인공지능 수준은 아직 소설 속의 이야기를 만들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앞으로 5년이나 10년 후에는 어떨지 모르겠다, 하는 느낌을 담았다. 개인적으로 모르는 곳은 상상하면 되고 잘 아는 것은 그대로 쓰면 되지만 고증이 필요한 공간은 어렵더라. 그래서 집이 있는 용산과 서초동 법정, 법무법인 사무소 등 제가 잘 알고 있고 정확히 묘사할 수 있는 공간을 선택했던 것 같다.”

―액자소설 속의 인물 ‘소설가 밤의’와 ‘소설가 건우’도 매력적인데.

“현실에서 소설과 문학의 길을 끝까지 걸은 것은 죽은 소설가 건우이고, 액자소설 속의 소설가 밤의는 현실에선 변호사가 된 미연이다. 그러니까 옛날에 만났던 미연이라는 여자에 소설가로서의 자신의 정체성과 고민을 투영시킨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약간 직관적으로 썼다. 변호사 건우의 경우 소설가이기 때문에 변호사에 대해 잘 알기가 어렵지만, 본의 아니게 제가 변호사라서 제 경험이나 아는 일상이 조금 투영이 된 것 같다.(어떤 부분인지) 증인 이현식이 법정에 나왔다가 사라진 장면은 실제로 경험한 장면은 아니지만, 제가 상상해본 적이 있는 풍경이다. 법정에 증인이 나올 때 신분증 정도를 확인하고 신문을 시킨다. 하지만 증인이 속이겠다고 작정하면 속일 수 있는 게 아닐까, 요식 행위처럼 신분 확인을 하지만 진짜로 속였을 경우 어떨까, 하는 상상한 적이 있다. 그것을 담았다.”

―‘소설가 밤의’의 소설 또는 문학관을 어떻게 봐야 할까.

“써보고 싶다고 생각한 지는 오래됐지만 실제로 처음 소설을 쓴 것은 2018년으로, 지금도 소설을 배우는 중이다. 소설을 쓰게 되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됐고, 문학하는 분들과 교류하면서 모르던 것도 많이 알게 됐다. 그냥 혼자 쓰고 지내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치열한 과정이구나, 자신의 인생을 걸고 가는 길이구나, 성취하는 사람은 일부이고 진짜 치열하게 해야 하는 일이구나, 하는 느낌을 담은 것이다. (거짓말 문제로 고민하는데) 소설이 사실이 아니라는 건 서로 알고 쓰고 읽는 것이지만, 독자의 공감을 얻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허구라는 것은 서로 양해된 바이지만, 독자가 수용할 수 있는 허구가 되는 것은 문학하는 사람의 목표나 의무 같은 것이다. 그 느낌을 얘기한 것이다. 거짓말인 것은 다 알지만 여기에 가장 깊은 진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허구의 형태를 띤 가장 순수한 진실을 전달하려고 하는 것이 문학이다. 허구의 형태지만, 가장 진실하다고 독자들이 받아들이게끔 만들어야 된다. 진실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허구다. 독자가 아무리 너그러워도 독자가 안 받아들이면 실패하는 것이다. 이런 느낌을 로진과 밤의의 대화 속에 담은 것이다.”

―현실이 된 AI 문제는 어떻게 보는가.

“인공지능이 세상의 루틴한 것들은 제법 하는 것 같은데, 창조적인 일은 아직 못 넘어가는 것 같다. 하지만 과연 끝까지 창조성의 문제를 못 넘어갈진 잘 모르겠다. 결국 넘어설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특별히 숭고한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인간의 뇌가 작동하는 시스템 같은 것들을 잘 연구해 반영한다면 창조성의 영역도 위협할 가능성이 있다. 결국 언제냐의 문제 같다. 이럴 경우 예술가나 작가들의 설 자리가 난감해질 수 있다. 작품에선 인간의 창조성 영역을 위협하는 AI를 그려봤다.(AI의 감정 문제도 나오는데) AI 자체에 감정이 있을 수 없지만, 언어에 깔려 있는 인간의 정서나 감정 같은 것도 학습하게 되면 마치 AI가 생성하는 언어 속에도 감정이 담긴 것처럼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 감정은 없지만 감정이 느껴지는 대화를 할 수 있게 된다.”
―이번 작품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2018년 4월 첫 번째 장편소설 『리셋』을 낸 뒤 3년 마다 작품을 낸 것 같다. 작가라는 정체성이 아직도 어색하고 부족한데, 이번 작품을 쓰면서 조금 더 문학 속으로 들어간 느낌을 받았다. 잘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문학에 더 매료되는 느낌을 받았다. 문학과 인연이 더 깊어지는 느낌이다.”

그것은 한낱 치기어린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 마음이 중요했다. 법대에 진학했을 때, 대학생 조광희는 언젠가 소설을 한 번 써보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중학 시절 많은 시를 암송하는 과정에서 언어의 어떤 뉘앙스를 느꼈고 그것을 잊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중학교 2학년 시절, 국어 선생은 학생들에게 시를 암송하게 하고 암송한 시 리스트를 장부에 적도록 했다. 이상하게도 그는 시 암송에 집착했다. 짧은 시부터 긴 시까지 무려 270여 편이나 외웠다.

오랫동안 소설을 쓸 수 없었다. 먼저 고시를 합격해 법조인이 돼야 했다. 사법고시 공부를 하느라 소설을 쓸 시간을 갖지 못했다. 사시(32회)에 합격해 변호사가 된 뒤에도 역시 소설을 쓸 수가 없었다. 시간은 있었지만, 소설적인 문장은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야기를 만드는 게 어려웠다. 차일피일 미뤄지고 시간은 흘러갔다.

한 번 시도를 해서 쓸 수 있으면 쓰고 못 쓰면 못 쓰는 것을 확인하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이대로 남겨두는 건 아니다. 나이 쉰을 앞둔 2015년경 어느 날,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이야기를 구상해 짧은 줄거리가 담긴 시놉시스를 쓰고 20~30페이지 정도의 트리트먼트를 작성했다. 그럼에도 한 동안 제대로 된 이야기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다시 이년 뒤 가을, 그는 우연찮게 시놉시스와 트리트먼트를 다시 읽어보다가 자신이 써놓은 구상이 말이 된다는 것을 느꼈다. 설계도대로 소설을 쓰면 이야기가 되겠는데, 되든 안 되든 한 번 끝까지 써보자. 가을에서 겨울까지 글을 집중적으로 썼다. 마침내 장편소설 『리셋』을 완성할 수 있었다. 특히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어떤 수행적인 측면이나 성찰도 좋았다. 이때 그의 나이, 쉰 하나였다. 소설가 조광의의 원점이었다.

1966년 서울에서 나고 자란 조광희는 변호사와 영화 제작자로 활동하며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2018년 첫 장편소설 『리셋』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장편소설 『인간의 법정』 등을 발표했다. 영화사 ‘봄’의 대표를 역임하기도 했다.

―이전 작품들을 조금 설명해 준다면.

“첫 번째 장편 『리셋』은 주인공인 변호사가 미스터리한 정치적 사건을 해결해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약간 정치적이고 법률적이며 영화와 관련된 것, 즉 제가 잘 아는 분야를 장르적인 측면에서 풀어본 작품이다. 두 번째 장편 『인간의 법정』은 근미래를 배경으로 주인을 살해하고 재판을 받는 안드로이드 이야기다. 이때 인공지능을 좀 취재 연구를 했는데, 이번 작품을 쓸 때 도움이 된 것 같다.”

―소설쓰기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이나 방법은.

“일단은 문장을 좀 간결하고 명료하게 쓰려고 하는 편이다. 여기에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바로 쓰지 않고 큰 그림이나 구조를 먼저 설계한 뒤 글을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어떤 이야기를 쓸 것인가에 관한 콘셉트를 정하고, 짧은 줄거리를 담은 한 두 페이지의 시놉시스를 만든 뒤, 장절을 구분해 20~30페이지 정도의 트리트먼트를 만든다. 이것을 바탕으로 몇 달에 걸쳐 집중적으로 글을 쓴다. 무엇보다 쓸 이야기가 있는 것도 중요한 것 같다. 아무리 문장력이 훌륭하거나 문학적으로 뛰어나도 쓸 이야기가 마땅치 않을 수도 있다. 저는 사회인으로 오래 생활을 하면서 늦게 쓰기 시작했다. 변호사나 영화 제작 경험 등 사회생활이 큰 자양분이 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변호사 업무도 계속할 생각이다. 이른바 후문학파라는 말이 있는데, 선인생 후문학, 즉 먼저 인생을 살고 나중에 문학을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작가나 작품으로서 포부나 비전은 무엇인가.

“여전히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과제인 것 같다. 모르는 이야기나 믿지 않는 이야기를 쓸 수는 없다. 결국 진심을 잘 전달하는 것밖에 없다. 삶의 경험이나 세상에 대해 생각한 것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 속에서 전달하려고 애를 쓴다. 삶에서 느끼고 생각한 것을 잘 증언하겠다는 것이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목표다. 계획한 작품들이 있어 앞으로 10년은 계속 써볼 생각이다. 차기작으로 『도시의 은자』라는 제목으로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도시에 숨어서 조용히 사는 은둔자 같은 인물, 어떤 전략가에 관해 쓰고 싶다.”

인터뷰 내내 가지런하고 정돈됐다는 느낌이 떠나지 않았다. 적당한 정도의 흰머리를 가지런하게 다듬은 그는 질문에 차분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혹시 잘못 전달될까봐, 혹시 잘못 이해할까봐 중요하거나 미묘한 부문에선 반복해 들려주었다. 가지런하게. 이야기는 빠지거나 빈틈이 없이 잘 정돈돼 있었다.

들려준 그의 생활 역시 가지런했다. 그러니까 오전 6, 7시쯤 일어나서 개에게 밥을 주고,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주스 같은 것을 딸에게 만들어준 뒤, 버스를 타고 사무실로 출근해 일을 한다. 일이 끝나고 약속이 있으면 약속에 나가지만, 약속이 없으면 버스로 귀가해 글을 쓰다가 밤 10시쯤 꿈나라로 간다. 주말에는 남산공원을 걷고 남산도서관에서 책도 읽을 것이다. 반나절 정도는 글을 쓰고, 가끔은 영화도 보고.

정돈된 삶에서 움터오는 작가 조광희의 이야기 역시 가지런할 것이었다. 그리하여 인간 사회를 서서히 육박해 오고 있는 AI를 둘러싼 묵직한 질문 역시 가지런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등에선 식은땀이 솟고, 두 손은 어느 새 부들부들. 세상과 삶, 이야기가 어차피 그렇게 흘러갈 것이라니⋯.

“건우는 당연한 진리를 다시 절감한다. 세상과 삶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지, 그 가치 때문에 정당화되는 게 아니라는 걸. 우주의 희망이라서 의미를 부여받는다는 건 인류의 한낱 망상이다. 세상과 삶은 의미와 무관하다. 건우는 자신의 삶을 부정하고, 문학을 모욕하며, 인간의 명예를 훼손하는 레비에게 차라리 복종해버릴까 하는 충동마저 느낀다. 그래, 레비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도 한 방법이지. 알아서 머리를 조아리고 굴레를 쓰면 레비가 일용할 양식을 주지 않을까? 하지만 그것조차 건우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세상은 어차피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160~161쪽)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이재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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