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카 포트를 다시 끄집어낸 이유

리빙센스 2024. 4. 24.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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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훈 집과 낭만 26

모카 포트를 다시 끄집어냈다

옛 친구를 재회했을 때의 그 기분이란.

더는 만나지 않는 친구들이 있다. 가만 생각해 보면 그렇다. 중년의 나이에 곁에 남아 있는 친구는 사실 몇 되지 않는다. 고등학교 친구들은 대학에 들어가는 순간 멀어진다. 대학 친구들은 직장에 들어가는 순간 멀어진다. 첫 직장의 친구들은 다음 직장에 들어가는 순간 멀어진다. 두 번째 직장의 친구들은…. 여기서 멈추자. 잔인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친구를 갈아 치우면서 늙어간다. 물론이다. 우정은 영원하다. 나는 여전히 대학 시절 밤을 새우며 인류의 미래를 토론했던 친구들과의 우정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대체 그런 걸 왜 토론했는지는 모르겠다만, 대학생이란 게 원래 지적 허영의 절정에 도달하는 시기니 어쩔 도리는 없었다. 첫 직장에서 온갖 고난을 견디며 선배들 욕을 함께했던 친구들과의 우정도 여전히 생생하다. 그렇다. 다시 말하지만 우정은 영원하다. 친구는 영원하지 않다. 우정은 추억이 되어 살아남고 친구는 추억 속에서만 살아남는다. 하여간 인생이라는 건 참으로 일관성이 없다.

때로는 인생에서 사라진 친구와 다시 만나기도 한다. 이를테면 후쿠시마 출신 도쿄 여성 이즈미 안도 상이 그러하다. 나는 이즈미를 대학 시절 휴학하고 떠난 캐나다 어학연수 시절에 만났다. 옥상에서 혼자 맛대가리 없는 샌드위치를 우걱거리며 영어 단어를 외우고 있는데 이즈미가 나타났다. 그녀는 말했다. "나는 메리라고 해." 나는 답했다. "나는 데이먼이라고 해." 아시아권 학생들은 영어권 국가에 가기 전에 미리 영어 이름을 짓는 경향이 있다. 일본어 이름도 한국어 이름도 영어권 사람들이 외우기에는 어렵다고 지레 겁을 먹은 탓이다. 요즘은 그런 경향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아시아권 사람들의 자존감이 예전보다는 훨 높아지고 있다는 증거이니 아주 바람직한 일이다.

이즈미는 비즈니스 영어를 배우는 고급반에 있었다. 나는 총 8단계의 기본 회화반으로 구성된 학원에서 4단계로 출발했다. 학원은 한국인으로 가득했다. 캐나다로 가기 전 나는 결심했다. 절대 한국인과는 친구가 되지 않으리라. IMF 시절에 부모 돈으로 팔자 좋게 어학연수를 가면서 한국인과 어울리느라 영어 공부를 소홀히 할 수는 없다는, 나름의 결단이었다. 당연히 한국 아이들은 재수 없어 했다. 재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1년이나 캐나다에 머무른 뒤 한국에 돌아가 제대로 된 영어 문장도 구사할 수 없는 재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는 훨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친구가 필요했다. 학원은 스패니시와 차이니즈와 재패니즈와 코리안으로 가득했다. 스패니시 애들은 자기들끼리 놀았다. 차이니즈도 자기들끼리 놀았다. 재패니즈도 자기들끼리 놀았다. 코리안은 자기들끼리 놀기로 유독 유명했다.

이즈미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그녀 역시 일본인 친구가 없었다. 나는 한국인 친구가 없었다. 둘이 대화를 하면 어쨌거나 영어를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친구를 장단점 따져가며 만나냐고 묻는다면, 그 시절 캐나다달러가 얼마나 비쌌는지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한화가 바닥을 치던 IMF 시절이었다. 이즈미와 나는 곧 단짝이 됐다. 우리는 곧 '메리'와 '데이먼'이라는 가짜 영어 이름을 없애고 서로를 이즈미와 도훈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항상 옥상에서 맛대가리 없는 샌드위치를 우걱거리며 혼자 밥을 먹는 프랑스권 친구나 다른 스패니시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아르헨티나 출신 친구들을 점심 파트너로 섭외하는 데도 성공했다. 이즈미는 말했다. "너는 내 첫 한국 친구야. 사실 나는 한국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너는 좋아졌어." 1990년대였다. 이 글을 읽는 젠지 세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 당시 한국과 일본의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누구도 한국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다. 가장 인기 있는 아시아권 학생은 언제나 일본인이었다. 경제학적으로 보자면 1인당 GDP가 서너 배나 차이가 나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캐나다인들은 모두 «드래곤볼»을 읽는 것 같았다.

잠깐, 이건 인테리어 잡지인데 웬 소싯적 어학연수 이야기나 나불거리고 있냐고? 일단 좀 기다려보시라.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마지막 주말, 친구들과 작은 파티를 열었다. 이즈미는 각자 한국과 일본에 돌아가서도 자주 보자고 했다. 그렇게 될 리가 없었다. 우리의 삶은 각자의 방식으로 흘렀다. 1990년대가 끝나자 2000년대가 왔다. 이즈미가 한국에 온 것은 2000년대 중반이었다. 사흘 동안 그녀는 서울에 머물렀다. 이상하게도 캐나다에서 볼 때와는 느낌이 좀 달랐다. 반갑게 사흘을 보내면서도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 이 관계는 조만간 끝이 나겠구나.' 내가 일본에 간 것은 2000년대 후반이었다. 출장으로 간 김에 이즈미에게 전화를 했다. 이상하게도 목소리가 조금 차가웠다. 나는 일종의 '깜짝 방문이야!' 같은 서프라이즈를 안겨주고 싶었다. 잘못된 생각이었다. 도쿄에서 만나자마자 그녀가 말했다. "그런데 왜 미리 연락을 하지 않았어? 나도 사실 일정이 있는데 취소해야만 했어." 너무나도 한국인이었던 나는 그 말이 섭섭했다. 너무나도 일본인이었던 이즈미는 내가 연락을 미리 하지 않았다는 것을 섭섭해했다. 도쿄의 만남은 섭섭하게 끝났다. 어쩌면 우리는 다시 만나지 않을 것이다. 확신했다. 2000년대가 그렇게 끝났다. 2010년대도 흘러갔다. 이즈미 없이 흘러갔다.

나는 영원히 나의 모카 포트들과

평생을 함께할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결코 모카 포트를 배신하는 일은

없을 거라 확신했다.

이즈미의 연락을 다시 받은 것은 2023년 가을이었다. 그녀는 쓰지 않던 페이스북 메신저로 연락을 했다. "도훈! 너무 오랜만이야. 내가 서울에 가게 됐어. 꼭 널 보고 싶어." 서울에서 만난 이즈미는 늙었다. 나도 늙었다. 청년 시절에 마지막으로 만났던 우리는 중년이 된 얼굴을 마주 보며 웃었다. 이즈미가 서울에 온 이유는 꼭 나를 보고 싶어서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한동안 우울증을 겪었다고 했다. 그리고 우울증에서 빠져나오는 데 큰 도움이 된 한국인이 있다고 했다. 방탄소년단BTS의 RM이었다. 사실 내가 알던 이즈미는 전형적으로 약간의 혐한 감정을 갖고 있던 일본인이었다. 2023년의 이즈미는 K-팝과 방탄소년단의 열정적인 팬으로서, 나와 알던 시절에도 공부할 생각이 전혀 없던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었다. RM이 콘서트와 라방에서 하는 말을 모두 알아듣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간장게장을 먹고 방탄소년단 광고판이 있는 곳에서 사진을 찍으며 한남동을 산책했다. 우리는 늙었다. 변했다. 각자의 방식으로 살다가 이상한 방식으로 다시 모이게 됐다. 우정이 새로 시작되는 게 느껴졌다. 훨씬 편안하고 익숙한 형태의 우정 말이다.

내가 지난 20여 년간 커피를 마시는 방식은 천천히 변해 왔다. 처음 서울에서 혼자 살기 시작했을 때는 프렌치프레스로 커피를 내렸다. 가장 간단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모카 포트를 발견했다. 곱게 간 원두와 물을 포트에 채운 뒤 가스레인지 위에서 가열하면 보글보글 올라오는 커피 향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외국에 나갈 때마다 모카 포트를 샀다. 어차피 맛은 같지만 다른 컬러와 형태의 모카 포트를 모으는 건 꽤 즐거운 일이었다. 모카 포트는 여행 갈 때 가져가기도 편했다. 이탈리아 친구는 나를 칭찬했다. 그게 바로 이탈리아 사람들이 커피를 만드는 방식이라고 했다. 나는 영원히 나의 모카 포트들과 평생을 함께할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결코 모카 포트를 배신하는 일은 없을 거라 확신했다.

사람은 확신이라는 걸 하면 안 된다. 10여 년 전 사귀던 사람이 생일날 선물한 네스프레소 캡슐 머신이 나의 다짐을 무너뜨렸다. 편안함이 나를 굴복시켰다. 네스프레소 머신은 결코 모카 포트 같은 향과 맛을 내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이 나이가 들면 편한 것이 좋아지게 마련이다. 아침잠이 많은 나는 원두를 갈고 모카 포트로 끓일 시간을 미리 계산한 뒤 기상했다. 이젠 그럴 필요가 없었다. 캡슐을 넣고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되는 압도적 편리함을 모카 포트는 도저히 이겨낼 수가 없었다. 나는 모카 포트를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마음에 드는 모카 포트 몇 개만 창고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잊었다. 영원히 나는 캡슐의 안락함에 몸을 맡기고 살아갈 예정이었다.

이즈미가 도쿄로 돌아간 지 몇 달 뒤 나는 창고 정리를 하다가 모카 포트를 발견했다. 그것들을 꺼내어 안에 낀 커피 기름때를 깨끗이 씻었다. 곱게 간 원두를 사서 모카 포트로 커피를 끓였다. 아, 이 맛이었다. 커피란 자고로 이렇게 끓여야 한다는 듯한 향과 맛이었다. 나는 사랑하던 모카 포트들을 선반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제자리를 찾아줬다. 이 아름다운 오브제들을 창고에 처박아뒀던 과거를 회개했다. 우정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김도훈@closer21

오랫동안 <씨네21>에서 영화기자로 일했고, <GEEK>의 패션 디렉터와 <허핑턴포스트>편집장을 거쳐 «이제 우리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라는 책을 썼다. 평생(?)에 걸쳐 수집한 물건들과 아름다운 물건들이 공존하는 그의 아파트는 이상하고 아름다운 김도훈 나라다.

CREDIT INFO

editor심효진

words김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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