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자인가, 애국자인가?"…논란을 남긴 제1차 세계대전의 영웅 [역사&오늘]

김정한 기자 2024. 4. 24.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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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6년 4월 24일, 프랑스의 군인이며, 비시 프랑스의 국가수반을 지낸 필리프 페탱이 태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를 구한 영웅이자 제2차 세계대전에선 나치 독일에 협력한 반역자로 낙인찍힌 프랑스 역사상 가장 복잡하고 논란의 여지가 많은 인물 중 한 명이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그는 이미 59세의 고령이었지만, 베르됭 전투(1916)에서 독일군의 공격을 막아냈고, 이후 프랑스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돼 연합군의 승리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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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4일, 프랑스의 군인·정치가 필리프 페탱 출생
필리프 패탱(출처: Unknown author, 흑백사진(1940),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1856년 4월 24일, 프랑스의 군인이며, 비시 프랑스의 국가수반을 지낸 필리프 페탱이 태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를 구한 영웅이자 제2차 세계대전에선 나치 독일에 협력한 반역자로 낙인찍힌 프랑스 역사상 가장 복잡하고 논란의 여지가 많은 인물 중 한 명이다.

페탱은 생시르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프랑스 식민지 군대에서 복무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그는 이미 59세의 고령이었지만, 베르됭 전투(1916)에서 독일군의 공격을 막아냈고, 이후 프랑스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돼 연합군의 승리를 이끌었다.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이 된 그는 높은 인기 속에 1934년 국방장관, 1935년 국무장관 등 요직을 맡았다. 하지만 1940년 히틀러의 침공으로 프랑스가 패전에 몰리자, 페탱은 샤를 드골 등 항전파를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고 총리에 오른 후 독일에 항복했다.

페탱은 독일의 미점령 지역인 비시를 수도로 하는 새 정부의 수반이 됐다. 사실상 나치의 괴뢰 정권이었다. 그는 공직에서 유대인들을 추방하는 등 독일에 협조했다. 하지만 모든 일에 고분고분한 건 아니었다. 그는 히틀러의 참전 요구를 묵살했고, 독일이 프랑스인 포로 100명을 사살하려 하자 '나를 먼저 죽이라'며 막아내기도 했다.

독일은 연합군이 북아프리카의 프랑스령을 점령하자 비시 프랑스의 소극적인 태도에 분노해 프랑스 전역을 점령하고 페탱을 독일로 압송했다. 1945년 종전 후 독일에서는 석방됐으나 프랑스에선 반역죄로 체포됐다. 그는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 받았지만, 집행이 되지는 않았다. 그는 1951년 7월 23일 일드외 섬에서 수감 중 95세로 사망했다.

페탱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까지 엇갈린다. 일부 사람들은 그의 제2차 세계대전 중 부역 행위가 프랑스를 더 큰 재앙에서 구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들은 그를 반역자로 간주하며 그가 프랑스에 수치를 안겨줬다고 비난한다.

acenes@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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