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화형 못다 이룬 ‘시시포스 신화’ 도전, 산 자들 이어야

한겨레 2024. 4. 24.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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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 홍세화 형 영전에
1985년 망명지 파리서 만나
“홍세화, 알리려면 책 써야”
국제전화로 2시간 출판기념회
1999년 6월17일 한국언론회관에서 열린 홍세화 귀국환영 및 출판기념회에 고인을 성원하던 지인들이 모였다. 왼쪽부터 유홍준 교수, 소설가 조정래, 시인 김지하, 박형규 목사, 리영희 교수, 고인 부부, 최학래 당시 한겨레 사장, 권영길 당시 국민승리21 대표, 임재경 전 한겨레 부사장. 한겨레 자료사진

홍세화 형을 처음 만난 것은 55년 전, 내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에 들어간 1969년이었다. 외교학과에 나보다 고등학교 3년 선배인 누군가가 입학한 것이었다. 공과대학을 다니다 어떤 심각한 이유로 학교를 그만두었다가 무슨 마음인지 다시 문리대 외교학과를 시험쳐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화 형이 운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당시 교양과정부 제도가 생겨 우리는 1년간 따로 교양(?)을 쌓아야 했는데, 운 나쁘게도 교양과정부가 공대 부지를 임차한 탓에 세화 형은 그 먼 공릉동(당시는 경기도)까지 다시 공대쪽으로 등교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세화 형을 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은 착오였다. 세화 형은 당시 자신의 어린 시절 참상으로부터 비롯된 엄청난 실존의 문제에 부딪쳐 있었고, 그리하여 형이 도전하기로 마음먹은 ‘시시포스의 신화'에 비견한다면 형은 이제 겨우 낮은 구렁에서 한두번 미끄러 떨어진 것 뿐이었다.

1979년 이른바 남민전 사건이 터져서 수많은 관련자들이 투옥되고 수난당한 후, 나는 1985년 베를린에서 열린 ‘제3세계문화회의'에 초청받아 처음 해외로 나가게 되었다. 소설가 황석영 윤흥길 두 분과 함께 참석한 그 국제회의가 끝나고 재독 민주동포들이 주선한 행사가 보훔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렸는데, 파리에 망명해있던 세화 형이 프랑크푸르트까지 달려왔다. 행사를 마치고 나는 파리까지 가서 함께 며칠을 보내면서 궁금한 것이 있어서 형에게 물었다. “형, 남민전은 비선 조직이었다던데, 형을 점찍은 윗선은 누구요?” 형이 한참 주저하더니 답해 주었다. “박석률이지.” 나는 놀랬다. 두 사람은 경기고 동기로, 1979년 무렵 박석률 선배가 운영하는 어떤 사무실에 나도 여러번 간 일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물었다. “형, 그때 나랑은 거의 매일 만나는 사이였는데 왜 나는 점을 찍지 않았소?” 세화 형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는 입이 가벼워서… 기밀이 누설될까봐…” 농담인 것도 같고 진담인 것도 같은 그 말에 잠시 불쾌하기도 했지만, 나는 번뜻 어떤 직감이 스치는 것을 느꼈다. “아하, 세화 형하고 석률이 형이 나를 빼줬구나!” 나는 정색하고 형에게 말했다. “형, 내가 형을 구출해 낼게.” 그리고는 덧붙여 말했다. “형, 어떻게든 책을 한 권 써야 돼. 홍세화라는 사람이 여기 남아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야 돼.” 세화 형은 말없이 수긍하고 있었다.

책 쓰기 까지…생활비에 워드프로세서에 후배들 도와

지난해 7월 고인이 강화군에 사는 박호성 교수 자택을 찾았을 때 찍었다. 왼쪽부터 이영구 목사, 필자, 박호성 교수, 고인. 필자 제공

홍세화 구출작전을 세우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사자들이 나서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1991년 마침 7·1동지회(1971년 위수령 사태로 강제징집당한 대학생들의 모임)가 20주년을 맞아 기념문집을 만들기로 한 바, 나는 여기에다 홍세화의 근황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때 제목을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다시 만남'으로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 바, 1995년 홍세화 저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책이 나올 때 발문으로 실은 바로 그 글이다.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라는 노래 가사를 통해, 잊혀지고 있던 홍세화를 다시 기억시키는 것으로써 구출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그동안 세화 형은 프랑스 망명생활에서 겪은 일과 생각들을 틈틈이 모아 글쓰기를 시작했다는데, 그가 글을 완성할 수 있었던 데는 후배 벗들의 진정어린 도움이 있었다. 경기고 후배(나하고는 동기)인 이영구가 세화 형이 글을 쓸 수 있도록 1년치 생활비를 지원하였고, 후배인 박원순이 영국 유학 마치고 돌아오던 중에 자신이 쓰던 워드프로세서를 기꺼이 선물했다. 그리하여 책 한 권 분량을 다 쓴 세화 형은 나에게 그 원고를 보내왔고, 나는 유홍준 형과 상의하여 창작과비평사에 출판을 의뢰했다. 책 제목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착안되었음은 유홍준 형이 자랑(?)하는 바 그대로이다. 책의 출판기념회는 ‘저자 없는 출판기념회'로 진행되었다. 행사장인 출판문화회관 강당에 전화기를 가설해놓고 파리에 있는 저자와 2시간 가까이 국제전화 통화를 하면서 펼친, 슬프면서도 가슴 뿌듯한, 전무후무한 출판기념회였다.

‘척탄병’ 형이 낸 산길과 물길 넓히고 키우는 건 산자들 몫

귀국 후 홍세화 형은 옛친구들보다는 새로운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면서 자신의 길을 걸어갔고, 나하고는 그리 자주 만나지 못하고 지냈다. 그러던 중 2019년 무렵 ‘3·1혁명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나는 우리 ‘애국가'에 얽혀있는 문제점들을 발견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한 운동을 시작한 바, 세화 형에게 먼저 연락해서 영향력있는 논객으로서의 지원을 요청한 적이 있다. 그런데 당연히 협조 동참할 것으로 기대했던 세화 형의 답은 전혀 예기치 못한 관점이었다. 요약하면 애국가 또는 국가라는 것은 국가주의의 산물이므로 그 자체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취지였다. 이것은 내가 전혀 예기치 못한 관점이었다. 아하, 똘레랑스! 서로 다른 사상이나 생각에 대한 용인!

각설하고, 세화 형이 갔다. 영원한 이방인! 가장자리 변방인! 그리고 소박한 자유인! 그는 사색하는 지성인이면서 실천하는 생활인이었다. 허나 세상은 지혜만으로 바뀌지 않으며, 용기만으로 달라지지 않는 법. 홍세화는 지혜로운 전략가이면서 용기있는 행동인이었으나, 그가 젊은 시절부터 염원했던 ‘시시포스 신화에 대한 도전'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어쩌면 올라가려고 했던 목표의 중턱에도 못미쳤을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자칭 ‘척탄병’으로, 불굴의 정신으로 앞장서서 산길을 냈고 물길을 텄다. 외롭게, 쓸쓸하게, 그러나 끈질기게… 이제 그 산길을 더 넓히고 물길을 더 크게 내는 일은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다.

임진택/마당극 연출가·창작판소리 명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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