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간 공전하는 랩·신탁 손해배상… 투자자만 발 동동

문수빈 기자 2024. 4. 24.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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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실 키운 건 증권사 불건전 영업관행
시장 가격보다 웃돈 수억 준 탓에 손실 커져

채권형 랩어카운트(랩)와 특정금전신탁(신탁)을 운용하는 과정에서 불법적인 돌려막기 전략으로 대규모 손실을 낸 증권사들이 1년 가까이 배상에도 나서지 않아 투자자들이 발만 구르고 있다.

증권업계는 “관행이었다”고 항변하고 있지만, 금감원은 검사를 통해 9개 증권사가 고객 간 수익률을 돌려막기하고 있음을 적발했다. 일부 증권사는 선제적 배상에 나섰으나 대다수 증권사는 징계안이 확정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입장이다. 이 때문에 일부 법인 투자자는 수백억원을 계좌에 그대로 담아두고 마냥 기다리는 상황이다.

랩과 신탁은 펀드와 달리 증권사가 고객과 일대일 계약을 통해 자산을 운용하는 금융 상품이다. 원래는 단기물을 편입하는 상품이나 증권사들은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만기 1~3년으로 유동성이 충분하지 않은 고금리 장기채권, 기업어음(CP) 등을 담았다. 만기 불일치(미스매칭)로 수익률을 끌어올린 것인데, 미국이 금리를 연달아 올리면서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증권사들은 돌려막기까지 손을 댔다.

서울 여의도 63스퀘어에서 바라본 흐린 날씨 속 여의도 증권가./뉴스1

랩·신탁 계좌는 통상 3개월의 단기자금을 운영하는 계좌인데, 상당수의 법인 고객이 지난해 상반기부터 1년 가까이 계좌에서 자금을 빼지 않고 있다. 증권사의 불건전 영업행태 탓에 평가손실이 최대 수십억원 쌓여서다. 실제로 돈을 빼면 손실이 확정되다 보니 버티기에 나선 것이다.

랩·신탁도 원금 손실 가능성이 있다고 공지돼 있긴 하지만, 대다수 법인 고객은 원금 손실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고 자금을 넣었다. 잠시 노는 돈을 운용할 때 찾는 것이 증권사의 랩·신탁이라고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증권사와 고객의 갈등은 202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레고랜드 채무 불이행 사태로 투자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채권 가격이 폭락했는데, 이 과정에서 증권사들은 특정 고객만 챙기고 나머지 고객에게 손실을 떠넘겼다. 금감원에 따르면 한 증권사는 다른 증권사와 종목이 서로 다른 채권 등을 주고받는 방식으로 6000번 거래해 5000억원 규모의 손실을 고객 간 전가했다.

그래픽=손민균

고객들은 증권사의 불법 거래가 손실을 더 키웠다고 보고 있다. 실제 KB증권의 채권형 랩 고객인 A법인의 계좌를 보면, KB증권은 이 계좌를 운용하면서 시세보다 비싼 가격에 채권을 샀다. KB증권이 다른 고객의 수익률을 우선시해 A법인의 계좌를 이용해 일부러 높은 가격에 채권을 받아줬다고 의심되는 상황이다.

지난해 4월 17일 KB증권은 A법인의 계좌에서 삼성카드 채권을 47억1000만원 규모로 사들였는데, A법인이 확인한 3개 신용평가회사(한국신용평가·한국자산평가·나이스) 자료에 따르면 당시 해당 채권은 43억2000만원 수준에 거래되고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평균 시세가 41억2000만원이던 현대커머셜 채권을 웃돈 5억6000만원을 얹어 46억8000만원에 사오기도 했다. KB증권이 시장 가격보다 비싸게 채권을 매수하면서 A법인의 평가손실은 최근 기준 26억원에 달하고 있다.

금융감독원 여의도 본원 내에 직원들이 지나다니고 있다./뉴스1

관련자 징계 확정과 별개로 금감원은 위법행위로 손실이 발생한 랩·신탁 계좌주들에 적법한 손해배상을 진행하라고 독려하고 있지만, KB증권을 비롯한 교보증권, 미래에셋증권, 유안타증권, 유진투자증권, 하나증권, 한국투자증권은 미온적 태도를 보여왔다. 다만 최근 들어 이중 일부 증권사는 배상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이들 증권사는 시장 상황에 따른 손실과 위법 행위에 따른 손실을 정확하게 구분할 수 없어 배상이 지연되고 있다고 해명하지만, 이미 NH투자증권(180억원)과 SK증권(100억원)은 불건전 영업행태에 따른 손실을 발라내 선제적으로 배상을 마쳤다. KB증권 관계자는 “배상과 관련한 내부통제 검토를 마치는 대로 신속하게 배상을 시행할 것”이라고 해명했다.

1년 가까이 증권사와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법인 고객이 증권사를 상대로 단체 소송에 나서기는 쉽지 않은 상태다. 고객마다 사정이 달라 통일된 대응을 하기 어려워서다.

결국 투자자들이 의지할 곳은 금감원뿐이나 원금 이상의 배상을 받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금감원은 이례적으로 증권사의 운용상 위법행위로 손실이 발생한 랩·신탁에 대해 고유자산 편입을 허용하면서도 그 한도를 원금 이내로 제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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