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지제도, 100년 걸쳐 3단계 변화…농지 효율적 이용 방안 찾아야

관리자 2024. 4. 24.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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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전벽해 60년, K-농업을 말하다] (4) 얽히고설킨 농지제도…과거·현재·미래
1910~1918년 일제 조선토지조사
근대적 토지소유제 확립됐으나
식민지 지주제로 소작쟁의 격화
1950년 대한민국 정부 농지개혁
토지개혁 제1 경제 과제로 부상
현 제도 모태…자작농 창설 이뤄
1994년말 농지법 제정
UR 협상 등 영향…법제도 손질
영세 소농문제 해결할 기반 마련
제도·정책 나아갈 길
농업진흥지역 확대…보상 강화
전용 심의 등 ‘관리기구’ 도입을
농지를 농민에게 적정하게 분배하려는 목적에서 1949년 제정한 ‘농지개혁법’.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현재 얽히고설킨 농지제도의 맥락을 자세히 보려면 장장 100년에 걸친 역사를 거슬러 올라야 한다. 한국 근현대 농지제도의 역사는 일제의 조선토지조사사업, 1950년 대한민국 정부의 농지개혁사업,  1994년 ‘농지법’ 제정의 3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각 단계의 역사적 의의와 한계를 짚고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를 살펴본다.

토지조사사업, 근대적 토지소유제도 확립

일제는 1910~1918년 조선토지조사사업을 시행했다. 목적은 임야를 제외한 전국 모든 토지에 대해 소유권·지형지모·지가 등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궁극적으로는 측량을 통해 필지별 위치·지번·지목·지적·지위등급·지가·형상 등을 정확히 파악하고 소유자를 확정해 등기부와 지적도·토지대장 등 절대적·배타적인 소유권을 법적으로 부여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려는 것이었다.

이 사업은 일제가 막대한 사업비를 투입한 최초·최대의 식민지 침탈 시책이었다. 하지만 한국 근·현대사 시각에서 보면 이 사업을 통해 근대적 토지소유제도가 확립됐다는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사업 이전과 비교하면 민법과 등기제도 등으로  절대적·배타적 토지소유권의 법적 보장을 받게 됐다. 사업을 통해 작성된 등기부·토지대장·지적도 등의 토지공부는 현재도 이용되고 있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으로 식민지 지주제가 확대되면서 농가경제가 피폐해지고 소작쟁의는 격화됐다. 소작지 비율은 1919년 50%에서 1936년 58%로 증가했으며, 자작농 비율은 1916년 20%에서 1932년 16%로 감소했다. 1932년 농가수의 3.5%에 지나지 않는 지주들이 80%를 차지하는 소작농가를 지배했으며, 이들 지주는 전체 논 면적의 67.3%, 밭 면적의 50.1%를 소유했다. 

농지개혁, 식민지 지주제 해체

광복 직후인 1945년말에 남한의 전체 농지 222만6000정보(1정보는 약 1㏊·3000평) 가운데 소작지 면적은 144만7000정보(65%)에 달했다. 당시 제1의 경제적 과제는 토지개혁이었다. 수많은 정당·사회단체가 방식은 다를지언정 모두가 토지개혁을 주장했다. 

남한에서는 미군정이 1946년 2월 ‘토지개혁법’ 초안을 작성하게 한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1950년 3월 개정된 ‘농지개혁법’을 공포하기까지 4년이 경과했다. 그동안 지주들은 소작지를 사전 방매했고, 미군정은 1948년 3월에 귀속농지를 매각했다. 농지개혁은 1950년 3월 시작됐으나 한국전쟁으로 중단됐다가 1950년 10월 재개돼 1951년 3월 농지 분배가 완료됐다. 지주들의 소작지 사전 방매 면적은 71만3000정보, 귀속농지 매각 면적은 26만2502정보, ‘농지개혁법’으로 분배된 면적은 34만2365정보였다. 농지개혁에 따른 자작농 창설은 지주와 정부의 합작으로 이뤄진 셈이었다.

농지개혁의 의의는 일제의 조선토지조사사업과 식민지 농업정책이 양성한 반봉건적 식민지 지주제를 해체, 자작농체제를 창출한 것으로 집약된다. 전체 농지 중 소작지 면적의 비율은 1945년 65%에서 1960년 12%로 줄었으며, 전체 농가 중 소작농가의 비율은 이 기간 49%에서 6.7%로 줄었다. 자작농체제 확립으로 농업생산력이 발전했으며, 토지자본이 산업자본으로 전환되고 양질의 노동력이 공업부문에 공급돼 자본주의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 

그러나 사업 이후 농지임대차가 급증했고, 영세소농 생산구조가 뚜렷해졌다. 자작농 비율은 1960년 60%에서 1990년 31%로 감소했으며, 임차지 면적 비율은 같은 기간 11%에서 37%로 증가했다. 1~3㏊ 농가 비중은 27%에서 38%로 증가했다.

농지개혁은 대한민국 농지제도의 모태가 됐다. 1948년 제정한 ‘제헌 헌법’은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하며 그 분배의 방법, 소유의 한도, 소유권의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써 정한다’고 명시했다. 이에 따라 ‘농지개혁법’은 농가 아닌 자의 농지와 자경하지 않는 농지 및 농가당 3㏊ 초과 소유 농지를 국가가 매수해 소작농에게 분배했으며, 상환이 완료된 분배 농지를 가산으로 상속하고, 농지매매증명을 얻어 매매하도록 하며(통작거리 4㎞), 소작과 위탁경영은 금지했다. 이후 ‘헌법’은 1962·1972·1980·1987년 등 4차에 걸쳐 전부 개정됐는데, 모두 ‘농지의 소작제도는 금지된다’고 명시했다. 1987년 개정된 현행 ‘헌법’은 이와 함께 ‘국가는 농지에 관해 경자유전의 원칙이 달성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한다고 규정했다.

1993년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등이 주최한 ‘농지법 제정을 위한 공청회’ 모습. ‘농지법’은 이듬해 제정됐다. 농민신문 DB

영세소농문제 해결 위한 ‘농지법’ 제정

그러나 소작제도 금지 규정을 실행하는 법률은 존재하지 않았다. ‘농지개혁의 성과’를 지키기 위해 1958~1979년 6차에 걸쳐 ‘농지법’을 제정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무산됐다. 

그 외의 농지제도 관련 법령으로 1972년 12월에 제정한 ‘농지의 보전 및 이용에 관한 법률’은 절대농지·상대농지의 지정과 농지전용허가제, 대체농지 조성비 부과와 농지기금 창설, 필지별 농지카드와 농가별 농지원부 작성 등을 규정했다. 1975년 4월 제정한 ‘농지확대개발촉진법’은 미간지의 개발 촉진을 목적으로 개발농지의 전용 금지와 대체개발비 부과 등을 규정했다. 1986년 12월 제정된 ‘농지임대차관리법’은 임대차 계약 신고, 농지관리위원회 설치와 농지매매증명 발급, 통작거리 4㎞에서 20㎞로 확대, 농지 소재지 주민등록 이전과 사전거주 6개월 등을 규정했다. 1990년 4월에 제정한 ‘농어촌발전특별조치법’은 농업진흥지역의 지정, 농지전용부담금 부과, 농업진흥지역 농지소유 상한 확대, 상속·이농 등에 따른 비농민 농지 소유 신고, 소유상한 농지의 처분 의무 등을 규정했다.

1994년말 ‘농지법’의 제정 배경은 두가지다. 첫째 1993년말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 타결,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출범으로 농산물 수입 자유화가 이뤄졌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농업구조개선을 효율적으로 뒷받침할 농지제도를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둘째, 농지제도 관련 규정이 여러 법률에 복잡하게 분산돼 이를 하나로 통합·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농지개혁에 착수한 1950년으로부터 44년이 지나 마침내 ‘농지법’이 제정됐다. 그 역사적 의의는 농지개혁사업 이후 제기된 영세 소농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농지의 농업 외 활용이 늘고 있다. 사진은 태양광발전사업을 위해 가짜 버섯재배사를 만든 모습. 농민신문 DB

‘농지법’ 한계도 산적

다만 ‘농지법’은 입법 취지를 구현하고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첫째 농업인과 농업법인만 농지를 소유할 수 있다고 했으나 11가지 예외규정을 명시해 비농업인이 농지를 소유할 수 있는 대문을 열어놓았다. 둘째 농지이용증진사업은 시행된 적 없으며, 품목별 농지이용계획은 ‘농지법’ 시행 초기 각 시·군별로 수립했으나 활용된 적은 없다. 셋째 농지임대차를 원칙적으로 금지했으나 9가지 예외규정을 둬 농지임대차를 사실상 허용했다. 넷째, 집단 우량농지 지역을 농업진흥지역으로 지정하고 농업생산과 관련 없는 용도로는 개발 행위를 할 수 없게 금지해 농지로 보전하도록 했으나 그 면적은 전체 농지 면적의 50%에 불과하며, 그나마 매해 2000㏊ 이상 전용을 통해 감소하고 있다. 다섯째, 농지위원회와 농지관리위원회 등 농지관리기구가 있으나 핵심 기능인 농지거래 허가와 농지이용조정 등의 기능은 없다. 무엇보다 ‘농지법’이 농지 소유 규제에 치중하고 있어 농지개혁이 낳은 영세 소농 구조라는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다.

앞으로 농지 제도·정책의 방향은 소유에서 이용으로 전환해야 한다. 첫째, ‘농지법’의 중심은 농지 보전에 두고, 경자유전 원칙을 농지농용 원칙으로 전환해 농지전용을 최대한 억제하도록 한다. 농업진흥지역 농지 면적을 확대하고 전용을 금지하며, 농업진흥지역 내 농지의 가격이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에 발생하는 경제적 손실에 대한 보상을 크게 강화한다. 둘째, 농지의 효율적인 이용을 위해 농업경영의 효율성·경제성·생산성이 높은 농업경영체가 한곳에 대규모로 집적된 농지를 경작하도록 한다. 비농업인 소유 농지는 농지임대차를 통해 우수 농업경영체가 경작하도록 농지관리기구 등이 조정한다. 셋째, 농지관리기구를 도입해 농지의 매매 허가와 임대차 신고, 농지의 이용 집적을 위한 이용 조정과 선매권, 농지 관련 정보와 장부의 수집·관리, 농지의 비축과 매매·임대차 알선을 통한 농업경영구조 개선, 농업진흥지역 관리, 휴경·유휴 농지 방지와 재활용, 농지취득자격과 농지전용 심의 등의 농지관리 업무를 일상적·항상적으로 수행하도록 해야 한다. 

박석두 GS&J 인스티튜트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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